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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4주간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드라마들을 보면, 항상 악역이 있고 선량한 주인공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악인의 술수나 모함 때문에 온갖 오해와 박해를 받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시청자들은 한결같이 악인을 보며 저런 나쁜 놈(년)이 있나 흥분하며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불쌍한 주인공 편이 되며 함께 울고웃습니다. 대분분의 결말은 해피앤딩이지요. 그제서야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합니다.

이렇듯 사람들 마음 안에는 늘 의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악인을 선천적으로 싫어하고 거부하는 경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이런 악인들이 꼭 있다는게 아이러니합니다.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악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벗님 여러분은 참으로 의인인가요? 여러분 주위에 진짜 못되먹은 악인이 있나요?

의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지혜 2,12.16.18) 하느님이 의로운 분이시기에 하느님의 자녀는 의인일 수밖에 없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니고 있으며(지혜 2,13) 온유하고 인내로운 사람입니다.(지혜 2,19) 그래서 의인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할 줄 압니다."(지혜 2,22)

반면, 악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실 원래부터 악은은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원래의 자기 모습을 어떤 이유에서든 상실하거나 왜곡된 사람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7,29)

당신을 믿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이려고까지 하는 유다인들을 피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그러다가 초막절 축제 때가 되자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요한 7,10)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지요. 당신을 두고 메시아니, 아니니 갑론을박을 벌이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신"(요한 7,28) "나는 그분을 안다"는 내용 안에 저 엄청난 고백, 아니 선포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안다"는 말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대화에서 먼저 등장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자렛 출신에 마리아와 요셉의 외아들이며 지금은 집을 떠나 돌아다니는 방랑 설교자로서 식자층도 못 되는 제도권 밖의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는 치료사"라는 정도의 정보는 굳이 감출 필요 없이 드러난 사실이니까요. 그러니 그들이 영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역사와 사실에 기인하기 때문에 인간 예수에 대해서는 대략 그림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 앎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지혜 2,22), 지혜서 저자는 의인에 대한 악인들의 음모를 적나라하게 나열한 뒤, 결국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지혜 2,21)고 확정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 믿음과 의혹 사이 어디쯤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요한 7,30)에 지혜서에 나열된 악행을 적극적으로 자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건 불신과 적대감이 아직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은 단계일 뿐, 예수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믿을 이유보다 믿지 말아야 할 이유에 더 집착하는 그들의 저울은 이미 기울었다고 보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시점에서 예수님이 "큰 소리로" 하느님 아버지를 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도 성전이라는 공적인 특수 장소에서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앎은,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요한 7,29)에 참됩니다.

아버지과 하나이신 아드님의 오심, 아드님과 하나이신 아버지의 보내심은, 소위 인간 조직 안의 파견 근무나 소임 이동처럼 한 개체가 다른 개체에게 일정한 권한을 위임하고 공간적 장소적으로 이동시키는 것과는 다릅니다. 완전히 하나시기에 서로를 완벽히 알고 온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세상 구원이라는 계획을 위해 자신을 서로에게 모조리 내주고 텅 비어버린 신비, 흡사 죽음같은 비움의 상태가 육화이며 강생이니, 우리 경험의 틀로는 가히 짐작조차 어렵겠지요.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아마도 그건 육화, 강생에 이어 십자가 구속이라는 남은 잔을 채우는 소명에 온전히 동의하신 까닭이겠지요. 또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인 이상 더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누구에게도 숨길 필요가 없으니 그리 당당하실 수 있으신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감히 피조물이 하느님을 안다고요? 사실 진정으로 그러고 싶지만 천상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처럼 온전한 앎은 불가능하겠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알 수는 없음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을 더 깊이 알 수 없다는 인간적 한계를 고통스럽게 절감하며 몸부림치고 눈물지을 때, 바로 그때 앎이 곧 사랑이 됩니다. 그토록 진심으로 당신을 찾는 이를 하느님께서 모른 체 하실 리 없으시니까요. 그리고 지식으로 차오르는 "앎"이 아니라 사랑으로 깨닫는 "앎"을 존재 가득 채워주실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혹시 "나는 그분을 안다"는 이 고백이 외침은커녕 입 안에서, 목구멍에서만 맴돌고 있다면, 아니 아직 뱃속에서조차 형성이 안 되었다면, 각자 자신의 앎이 어디에서 멈추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 눈을 멀게 하고 시야를 흐리게 하는 것이 이기심과 탐욕인지, 죄의식과 두려움인지, 무관심과 게으름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혹시 자신이 인격신인 하느님과의 관계를 미꾸라지처럼 피하면서 그저 단순한 "종교 장신구주의자" 정도로 성당 건물만 오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을 듯합니다.

어쩌면 오늘 예수님께서 던지신 "나는 그분을 안다"는 초대가 우리 신앙 인생을 재점검할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진정 "은총의 때"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면 알수록 나는 의인이 되고, 모르면 모를수록 악인이 될 위험은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아는 하느님의 귀한 아들딸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