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는 좀 부정적인 견지에서 두 인물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와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뗄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긍정적인 의미에서 또 한 인물이 들어오지요.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입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 물었다."(요한 13,23.25)
우리는 누군가에게 직접 여쭙기 곤란한 일이 있을 때 그와 가장 친한 사람에게 부탁해 간접적으로라도 답을 얻곤 합니다. 그 제자가 제자단 안에서 그런 역할이었나 봅니다. 수석 제자라 할 수 있는 베드로 역시 그에게 부탁할 정도니까요.
하느님 앞의 인간은 다양한 역할과 소명을 지닙니다. 열성적으로 직접 선교에 뛰어든 이도 있고, 노동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이도 있고, 지식을 쌓아 전달하는 이도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기도로 세상을 떠받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좀 더 접근해 그 신비를 맛볼 수 있는 여부는 신분의 종류, 소임의 성격, 자리의 높낮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건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이 하느님과 자신과의 '거리'에 달린 문제입니다. 봉쇄 담장 안에서도 탐욕과 분노로 하느님을 멀리할 수 있고, 세상 장터 한가운데서도 하느님과 일치하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그분 심장에서 울리는 사랑의 소리를 듣는 특권 역시 딱히 어떤 신분에 주어진다기보다, 어느 신분이든 예수님과 가까운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지향과 열성, 실천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분 품 안에 머무르는 이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스스럼없이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예수님 마음에 흐르는 내밀한 고통은 물론 기쁨과 환희까지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 신비에 접근할 권한은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느냐, 가까이 있느냐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 제자 덕분에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 마음을 열어보이십니다.
[쿼바디스]란 영화 기억하시나요? 아주 오래된 영화여서 기억에 가물가물 하지만, 베드로가 로마 선교 가는 여정에 박해와 죽음이 두려워 포기하고 돌아가려 할 때,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가 떠나시려 하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지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요한 13,36)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고 말씀하시지요.
베드로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다시 회상하며 자기의 지팡이를 길에다 꽂아 버려둔 채 박해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로마로 힘차게 되돌아갑니다. 결국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게 되고, 베드로가 버려 둔 지팡이에서 잎이 돋아나 무성한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가 됩니다.
벗님도 현실을 직면하기가 몹시 두려워 회피하거나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지요? 그때 베드로가 오늘 주님께 던졌던 이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쿼 바디스, 도미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려 하느냐는 질문이지만 사실은 [주님, 제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묻는 질문이지요. 그분께서 명쾌한 답을 벗님에게 내려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분께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시어 벗님에게 승리와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시길 축원합니다.
[Quo vadis, Domine?]
예수님은 오늘 마음이 산란하시고 착찹하십니다.(요한 13,21 참조)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 중 하나가 당신을 고발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분노하시지 않고, 안타까워하시면서도 그 일을 시작하라고 독려하십니다. 당신은 이미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말입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27) 그리고나서 작정하신 듯 제자들에게 당신이 곧 영광받게 될 것이고 떠나게 되어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요한 13,31-33 참조) 베드로는 여전히 못알아 듣고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요?"
예수님은 어디로 가시는가요? "죽으러" 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금 내가 그분을 따라 죽을 수는 없지만 언젠가 나도 죽을 날이 옵니다. 그때야 나도 그분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길은 수난의 길이고 죽음의 길입니다. 그것이 의미없는 두려운 길이 아니고 생명과 부활로 가는 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주님을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는 길입니다."(이사 49,6) 그래서 죽음도, 부활도 영광의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잘 죽어야 합니다. 나의 죽음이 가족이나 다른 이웃, 세상에 유익한 죽음이 되어야 합니다.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는 그런 죽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말로만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헛된 맹세는 필요없습니다.
"쿼바디스" 영화에서, 나중에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에 대한 정답으로 박해를 피하는 길이 아니라 박해와 죽음이 기다리는 로마로 다시 돌아가고, 그가 버린 지팡이에서 새로운 생명이 피어났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 잘~ 죽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부활을 위해 잘~ 죽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그래야 부활이 뭔지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진정한 부활을 꿈꾼다면 먼저 잘 죽어야만 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약하기 짝이 없는 나는 베드로처럼 또 넘어지기를 반복하지만(요한 13,38 참조), 주님께서는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고,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이사 49,5) 그러니 용기를 갖고 성주간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여정에 동참하면서 어떻게 잘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잘 죽을까에 대해 깊이 묵상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목적지는 죽음이요, 죽음은 부활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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