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성삼일에 들어섰습니다. 아프지만 참 귀한 시간입니다. 제게 올해 주님 만찬 미사 전체를 아우르는 말씀은 좀 생경스럽게도 "세례"입니다.
제1독서와 화답송, 제2독서의 말씀은 "피"로 집중됩니다. 그리고 복음환호송과 복음에는 "사랑"이 부각됩니다. 구약 이집트 탈출의 순간에는 이스라엘 백성 집 앞에 바른 짐승의 피가 선택된 백성임을 증거했고 하느님께서는 그걸 보시고 재앙을 건너뛰셨지요. 또 사도 바오로는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1코린 11,25)고 말씀하신 파스카 만찬을 떠올리며 예수님께서 어느 한 민족이 아닌, 온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파스카의 어린양이심을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요한 13,3)을 아시고...
전부이시고 모든 것이시며 또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수난의 시간을 피하거나 미루실 수도 있고, 당신 손에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해 다른 방식의 구원도 고려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때를 기꺼이 받아들이십니다. '억지로 떠밀리듯'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로 당신 피의 제사를 선택하십니다.
세족례의 장면은 제게 또 다른 세례식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종처럼 엎드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어주시지요. 당황해하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10)고 선언하시고요. 정말입니까? 제자들이, 아니 우리가 예수님도 인정하실만큼 깨끗합니까? 글쎄요. 스스로 영육의 깨끗함을 자신할 사람이 얼마나 될 지 모르지만, 선뜻 답하기 어려운 문제임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다가오시기는 하는데 당당히 머물기는 송구스러웠습니다. 제 꼴을 아는 까닭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 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속삭이십니다. "너는 깨끗하다. 내가 너를 씻어 주었기 때문에 깨끗하고, 네게 나의 피가 발려있기 때문에 깨끗하며, 너에 대한 내 사랑 때문에 깨끗하다."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공덕과 마찬가지로 깨끗함 역시 주님께서 주도해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우리 몰골과 상태를 세세히 따져본 뒤에 이리저리 깎아서 주시는 게 아니란 말이지요.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요한 13,10)는 말씀처럼, 우리는 이미 물의 세례를 통해 깨끗해졌지요. 그리고 그간 삶의 질곡을 거쳐오면서 묻은 발의 먼지는 오늘 예수님께서 깨끗이 닦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거룩한 피로 우리는 온전히 정화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한 마디 덧붙이십니다. "나에 대한 너의 사랑으로 너는 깨끗하다." 주님을 향해 타오르는 우리 사랑의 불이 우리 자신을 정화한다고 하십니다. 온전히 정화되고 나서 주님께 사랑을 드리겠다고 생각한다면 평생 불가능할 수도 있기에, 불결하고 불순한 채로 이글이글 힘껏 태워올리는 사랑의 불꽃, 분향처럼 올리는 연기는 그분께 봉헌하는 제물인 동시에, 우리 자아의 고질적인 아집, 탐욕, 분노, 정념, 이기심, 교만이라는 제물을 흔적도 없이 살라 재로 스러지게 해 줍니다. 그 사랑의 불꽃 위로 떨구어지는 우리 통회의 눈물은 놀랍게도 이 고약한 것들이 타면서 풍기는 악취를 향기로 바꿉니다. 사랑은 이렇듯 못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친히 우리의 발을 정성껏 닦고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 손길에서 우리는 물의 세례, 피의 세례, 사랑의 세례를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벗님의 발을 씻어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깨끗하다." "너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어라." 그러니 힘내어 예수님과 함께 다음 여정으로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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