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사도 11,19-26; 요한 10,22-30 ) |
제1독서
<그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1,19-26
그 무렵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도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들인 우리의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성전 봉헌 축제 기간에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한창 긴장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이 시간적 배경을 기술하면서 예수님과 유다인 무리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전합니다.
겨울은 황량히 죽은 듯 보이나 내면에 생명을 배태하는 시기입니다. 겨울의 침묵과 멈춤이 없다면 찬란한 생명의 봄도 없지요. 지금 유다인들의 꽉 막힌 상태가 마치 겨울 같습니다. 배척 당하시는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고난과 죽음 역시 겨울을 떠올려 줍니다. 지금 그들 모두는 겨울 한복판에 있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
예수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주님의 양이었다면 예수님의 목소리를 진즉에 알아들었겠지요. 일찌기 이사야 예언자가 전한 주님의 말씀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이사 6,9) 하셨던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이미 속으로 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어떤 기적이나 표징이 일어나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고착된 신념이 진실을 덮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이미 그들에겐 예수님이 메시아이신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이 정한 태생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메시아일 수 없고, 혹 스스로 메시아라 한다면 신성모독이니 결론은 뻔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복음이 어떤 경로로 퍼져나가 주님의 양떼가 형성되는지 보여줍니다.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11,19).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간 신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국경을 넘은 복음은 초반엔 유다인들 위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11,20).
그러다가 다양한 민족을 통해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지요. 오묘한 파장이 느껴집니다. 복음이 살아서, 우연을 가장한 섭리적 경로로 예상치 못한 길을 확장해 나갑니다.
살아계신 말씀께서 나아가시는데 사람은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씀께서 친히 이러저러한 경로로 당신 양들에게 가 닿으십니다. 그리고 양들은, 마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복음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스펀지처럼 흡수해 말씀과 하나가 되지요.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사도 11,23)
성경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이들이 개척한 새 교회에 바르나바가 파견됩니다. 이제 막 시작되는 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 모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아름답고 유연한 유기체를 이룹니다.
바르나바의 기쁨은 복음을 전하는 이의 기쁨이고 말씀과 하나된 이의 기쁨입니다. 사도의 기쁨이고 목자의 기쁨입니다. 바로 주님의 기쁨입니다.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사도 11,25-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실한 바르나바의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사울을 교회 안에 편입시켜 자리잡게 해 준 것입니다. 사울에 대해 의혹을 떨치지 못하는 이들도 바르나바를 믿기에 옛 사울인 바오로 사도를 받아들일 테니까요. 야구에서 감독이 적시에, 적재적소에 구원투수를 내보내듯이, 이 역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라 아니 할 수 없겠지요.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신 이들은 세계 곳곳 어디에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어도 결국 예수님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머리와 계획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만남과 마음의 움직임과 실행을 통해 복음은 세상 끝, 가장 말초 신경에 해당하는 땅 끝까지 이르러 아버지의 뜻을 완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모여든 당신의 양들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아무도 아버지와 아들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의 여정을 되짚어 봅시다. 우연을 가장한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롭게 나에게까지 전해져 왔는지요! 창조 때부터 나를 선택하신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부지불식 중에 협력했는지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초세기 안티오키아에서 지금 여기 나에게까지 이어진 신앙의 혈류를 느껴 봅시다. 이 모두는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8) 하신 아버지와 예수님의 의지로 가능한 기적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시듯, 우리도 그분들과 하나입니다. 그분들과 우리를 이어준 신앙의 선조들과도 하나이고, 저마다 신앙의 진리를 고백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 역시 하나입니다. 교회는 이렇듯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유기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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