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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부활 제 4주간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 오상선 신부님 ~

? ✝ 5월 14일 토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사도 1,15-26; 요한 15,9-17)

제1독서

<마티아가 뽑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15-17.20-26
15 그 무렵 베드로가 형제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16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붙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해서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17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20 사실 시편에 ‘그의 처소가 황폐해지고 그 안에 사는 자 없게 하소서.’
또 ‘그의 직책을 다른 이가 넘겨받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3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24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25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26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은 열세 번째 사도인 마티아 성인의 축일입니다.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그가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은"(사도 1,25) 일화를 자세히 다루지요. 예수님께서 명하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이어갈 부활의 증인을 충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요한복음 중에서도 가장 감미로운 부분 중 하나인 15장의 대목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부활시기 내내 우리가 만나온 복음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잘 드러나 있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의 사랑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 대해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고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이심을 명확히 계시하셨지요. 우매하고 무딘 우리로서는 그 사랑을 조금, 아주 조금밖에 알아들을 수 없긴 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사랑이 어떠하리라는 각자의 청사진을 어렴풋하게나마라도 품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사랑한 원형은 당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고 고백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이 당신 안에서 따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대로 사랑했다는 뜻이지요. 제자들이 스승에게서 받은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온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아드님을 거쳐 제자들에게까지 와 닿게 된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사랑이신 하느님, 사랑의 원천에서 흘러나온 사랑은 아들 예수님께 쏟아부어지고, 그 사랑이 제자들에게 그대로 베풀어졌다면, 이제 제자들은 자기들이 받은 그대로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발출된 사랑이 이렇게 세상 안에서 연결되고 이어지며 확산되는 것이지요. 우리 중 그 누구도 받은 사랑이 내게서 멈춰버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나에게까지 흘러온 사랑이 이미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과학과 예술이 진화하면서 모방이 아닌 창의적 작품이 주목받기는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코헬 1,9)는 말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의 "따라쟁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시작된 사랑이 예수님을 거쳐 제자들, 이천 년 동안 무수한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를 지나 우리에게까지 도달했습니다. 사랑을 할 줄 모른다면 눈을 돌려 하느님을, 예수님을, 제자들과 성인 성녀들을, 그리고 우리 이웃들을 보면서 따라하면 됩니다. 원래 사랑이 내 발명품이나 창작품이 아니니까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바로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고스란히 그 수혜자가 된 우리가 따라해야 할 사랑이고요 .그런데 "친구"란 누구일까요? 어디까지가 친구일까요?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피조물인 우리, 보잘것없는 죄인인 우리를 친구라 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사도 1,24)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격 따위를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자격으로 치자면, 자신이 예수님의 친구라 불리기에 얼마나 미안한 존재인지 잠시 가슴에 손을 얹어보면 다들 알 수 있겠지요.

  이는 당신의 그 사랑을 따라하는 우리에게도 "친구"의 자격을 따지지 말라는 조용한 권고일 겁니다. 만일 사랑할 대상, 친구 자격에 조건을 건다면 이미 사랑이 아닐 겁니다. 하느님에게서 출발해 내게까지 이르른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랑의 허울을 썼지만 '이용'이나 '계산', '자기 만족', '자기 과시'가 감추어진 '결과적 미담'은 될지언정 엄밀히 말해 사랑은 아니란 뜻입니다.

  오늘 뽑힌 마티아 사도를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유래된 열둘이라는 숫자의 완전성이 재정비되고 회복됩니다.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세상에 사랑을 흘려보낼 통로가 보강된 셈이지요. 어쩌면 주님께서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에게도 하느님 사랑의 통로가 되어달라고 초대하시는 듯합니다. 제비뽑기는 후보자의 자격보다 하느님 선택이 우선이니 잠시 부족한 제 꼴은 내려놓고 용기를 내어볼 만 합니다. 사랑은 한참 부족한 나에게도 흘러갈 길을 내달라고 요구하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벗님도 이 사랑의 제비뽑기에 당첨되신 사랑의 통로입니다. 벗님을 통해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이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에게까지 흘러흘러 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