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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연중 제 5주간 월요일 성 바오로미끼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성무일도 ~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아침기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제1저녁기도

 
2월 4일 연중 제5주일 제1저녁기도 후 끝기도
 

 

 

 

 

 

 

 

 

 
 
성 바울로 미끼와 동료 순교자 기념 
 
바울로 미키는 1564년에서 1565년 사이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예수회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른 25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은 후 1597년 2월 5일에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다. 
 
동시대의 저자가 쓴 [성 바울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 사기]에서
(Cap. 14, 109-110: Acta Sanctorum Febr. 1, 769)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 
그들이 못박혀 있던 십자가들이 땅 위에 세워졌을 때 놀라웁게도 모든 이들은 파시오 신부와 로드리게스 신부가 준 격려의 말에 응하여 견고한 자세를 취했다. 원장 신부는 거의 부동 자세로 시선을 하늘에다 못박아 놓고 있었다. 마르티노 수사는 시편을 노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주여,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라는 시편을 외웠다. 프란치스코 블랑코 수사도 낭랑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감사 드렸고 한편 곤살보 수사는 목소리를 좀더 높혀 주의기도와 성모송을 낭송했다. 
우리 형제인 바울로 미키는 자신이 이제까지 서 보았던 강단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강론대 위에 서 있다고 느끼고서 우선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자기는 일본인이자 예수회원이라고 밝히고, 자기는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이 받은 그 위대한 특전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강론을 마쳤다. "이제 이 순간을 맞아 내가 진리를 배반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여러분 중에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이 나의 원수들과 내게 폭력을 가한 모든 이들을 용서하라고 나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국왕을 용서하고 나에게 사형을 집행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라고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동료들에게 시선을 돌려 이 마지막 고뇌의 순간에 동료들을 격려하기 시작했다. 모든 동료들의 얼굴에 커다란 기쁨의 표정이 나타났고 특히 루도비코에게서 그러했다. 군중 가운데서 한 교우가 루도비코에게 "당신은 조금 있으면 천국에 있게 될 것"이라고 외치자, 그는 기쁨에 넘친 동작으로 손과 온 몸을 위로 뻗쳐 모든 군중들의 주의를 끌었다. 
루도비코 곁에 있던 안토니오는 하늘에다 시선을 못박고는 예수와 마리아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부르고 나서 나가사키의 주일 학교에서 배운 "찬양하라, 주님을 섬기는 아이들아."라는 시편을 노래했다. 그 곳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과제 가운데는 이와 같은 몇 가지 시편의 학습이 있었다. 
다른 이들도 평온한 얼굴로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구경꾼에게 참된 그리스도교 생활을 영위하라고 격려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행위들로써 그들은 기꺼이 죽는다는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네 명의 회자수들이 칼집에서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장검을 꺼냈다. 모든 신자들은 이 무서운 장검을 보자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외치고 슬피 울면서 탄식하여 그 울음 소리는 하늘까지 치솟았다. 회자수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두 차례 칼을 휘둘러 그들을 쳐죽였다.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三木)는 지금의 오사카 인근 도쿠시마(德島)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고, 10여 세 되었을 무렵 아즈치야마(安土山)의 예수회 신학교에 제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22세 때인 1585년 졸업과 동시에 수사가 되었다. 수사가 된 성 바오로 미키는 타고난 성품과 열정으로 전교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후에 주교 마르티네즈(Martinez Pedro)를 따라 오사카(大阪)에서 활동하던 중 예수회 신부인 오르간티노(Organtino Gnecchi-Soldi)의 눈에 띄어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함께 활동했다. 이후 그는 불교 승려들과 많은 토론을 벌였고, 자신이 저술한 교리서들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깨우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 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1590년 순찰사 발리냐노(Valignano Alessandro)가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596년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금교를 무릅쓰고 교토 일대에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히데요시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 결과 1597년 초에는 교토와 오사카 일대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 박해로 게이한 지방에서 체포된 사람들은 작은 형제회 수사 6명, 예수회 수사 3명과 일본인 신자 15명 등 24명이었다. 성 바오로 미키는 이때 오사카에 있다가 뜻하지 않게 체포되어 1597년 1월 1일 교토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어 그는 1월 3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오사카를 거쳐 1월 9일에는 나가사키로 출발하였고, 27일 동안 혹한 속을 걸어서 2월 5일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들 일행은 도중에 일본인 신자 2명이 자진하여 체포됨으로써 모두 26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날 저녁, 성 바오로 미키는 동료들과 함께 나가사키(長崎)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사카(西坂)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순교 직전에 그는 당당한 얼굴로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