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6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깨닫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1,1-7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4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5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7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2-13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마르 9,5)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며 때론 천국체험도 하고, 때론 연옥체험도 하고, 때론 지옥체험도 합니다. 

제가 수도원에 들어와서 첫 한두 해는 그야말로 천국이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수련기부터 가끔씩 연옥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구요. 유기서원기가 되니 그 연옥이 더 자주 보이더니, 급기야 종신서원을 하고나서는 연옥만이 아니라 가끔씩 지옥체험도 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이 수도여정을 계속할 수 있음은 여전히 그 때의 천국체험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예수님은 애제자 셋에게 타볼산에서 천국체험을 하게 해주십니다. 그곳에서 마냥 머물고 싶은 게 그들의 바램이겠지만 그들은 연옥과 지옥이
뒤범벅된 삶의 현장, 수고와 수난이 점철된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만 하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런 영광스러운 천국체험을 하게 해 주신 것은 미구에 스승을 잃게 되는 지옥체험을 하게 될 때 이 천국체험을 기억하여 믿음을 잃지 않고 항구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켜 주심이겠지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 험난하고 어려운 인생여정, 수도여정이지만 언젠가 우리가 체험했던 그 잊지못할 천국체험 때문에 믿음 가운데 한 발자국 발자국 걸어가게 되지요. 

우리가 한적한 피정의 집에 머물며 세상걱정 잊어버리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성체 앞에서 기도하다보면, 매일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또 아주 오랜만에 특별한 기회를 얻어서 멋진 해외여행을 하면서 맛갈진 음식과 잘꾸며진 호텔에서 귀빈 대접을 받게 되면, 평생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짧은 경험은 우리가 누리게 될 천국의 맛뵈기 체험일 뿐입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일상의 희로애락을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아무리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우리가 잠시 경험한 그 하늘나라 체험이 우리를 꿋꿋이 살게 해 줍니다.

실제로 이 타볼산 체험은 제자들로 하여금 산을 내려와 열심히 십자가의 희생을 감내하도록 해준 동력이었답니다. 오늘 벗님 여러분은 언제 이런 타볼산의 천국 비슷한 체험을 하였던가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자, 이제 오늘 말씀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볼까요?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종종 몇몇 제자만 데리고 다니실 때가 있는데 이번에도 애제자,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마르 9,2)

그 선택의 기준에 대해서 동행하는 이들이나 뒤에 남는 이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잡음 없이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가끔 누가 가장 높으냐의 문제로 말다툼을 하거나(마르 9,33-37 참조) 다른 제자의 미래도 알고 싶어 슬쩍 질문을 던지는 모습(요한 21,21 참조)을 보면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 받고 싶은 욕구와 시기 질투 경쟁심은 대동소이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꼭 편애나 차별 불평등은 아닐 겁니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한 하느님의 이름은 온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영혼의 수만큼 다양한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실 때에도 각 사람에게 맞는 거리와 자리를 존중하신 배려라고 보여집니다. 이번에는 아마도 미래적으로 제자들 중에서도 당신의 죽음 이후에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더 희생해야 할 그런 믿음직한 제자들만 데리고 가신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른 제자들을 못믿어워하거나 차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져야할 십자가의 무게를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지워주시려는 자애깊은 배려는 아니었을까 느껴집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지금 이곳에 삼위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신 성부 하느님과 그들을 덮은 구름으로 현존하시는 성령, 그리고 예수님.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스런 현존의 자리에서 제자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시나이 계약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두려워하여 직접 듣기를 피했었지요.(탈출 20,19 참조) 이 말씀 내용에 머무르다 보면, 거기 담긴 하느님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자상하고 자부심 가득한지 느끼게 됩니다. 당신과 아드님의 사랑 관계를 먼저 밝히시고, 당신의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제 우리가 마태오의 증언을 통해 들은 베드로의 고백,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내용을 확증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영감으로 자신도 모르게 고백한 내용을 직접 하느님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니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라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믿음은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이지 인간 편에서 값을 지불하고 얻어낼 수 있는 대가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믿음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자라고 있는지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느낄 겁니다. 믿음은 단순히 기분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존재적이고 인격적인 결단의 행위입니다. 믿음의 대상과 믿는 주체가 서로에게 동시에 갖는 바람이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세 제자는 예수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런 모습을 마주합니다. 이는 그들의 나약한 믿음을 보증하고 확증해 주는 놀라운 신비 체험입니다. 그런데 이 체험은 믿음의 단계에서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오늘의 영광을 체험했으면서도 스승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갈팡질팡하게 될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과정이니까요. 은총으로 씨뿌려진 토양 위에 우리가 들은 것, 배운 것, 머리로 아는 것, 몸으로 체험한 것, 그리고 영혼이 감지한 것, 이 모든 것 통합되어 가면서 믿음은 자라납니다. 흔들리면서 넘어지면서 커갑니다. 그러니 믿음을 두고 우리가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겸손만이 믿음을 보증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