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목요일(예레17,5-10)(루카16,19-31)
제1독서: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10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 말씀에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
부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묘사한 대목입니다. 당시 자주색 염료의 제품이나 고운 아마포 의류는 상당히 고가라서 어중간한 중산층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 사치품이었는데 복음 속 부자에게는 일상복 정도였으니 그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지요.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대문을 사이에 두고 안팎으로 극명한 대비가 이루어집니다. 부자가 편히 드나들던 제집 대문 앞에, 결코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없는 한 가련한 이가 굶주린 채 병든 몸으로 누워 있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 모두 생을 마감하지요. 라자로가 지상에 살 때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도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것에 비해 부자는 "소리를 질러"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고 라자로를 활용하려는 해결책까지 제시합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오만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루카 16,25)
아브라함의 응답입니다. 라자로가 받는 위로는 지상 삶에서 겪었던 "나쁜 것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합니다. 거기서도 라자로는 목소리를 내지 않지만 아브라함이 그를 위한 목소리가 되어 주고 있지요.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루카 16,26)
부자는 라자로의 심부름으로 혀를 식히길 바라지만 불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이 무자비해서가 아니고 라자로가 냉정해서가 아니라 "구렁"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라자로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던 부자네 대문이 이처럼 아득한 심연의 "구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초대하고 보살피러 쉽게 여닫고 드나들 수 있을 때 활용하지 않았던 대문이 이제는 오히려 부자를 옴쭉달싹 못 하게 만드는 "구렁"으로 변한 것입니다.
부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은 고의적으로 라자로를 해치거나 박해한 적이 없고 그저 무관심했을 뿐이었다고 항변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부자가 받는 사후 고통의 원인에 대해 힌트를 제시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17,5).
부자는 철저히 자신의 힘과 재산에 의지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었다면"(예레 17,7),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하는 약자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을 경외하고 지켰을 것입니다. 그의 무관심은 약자에게만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무관심이었고 더 나아가 생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무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무관심은 경시, 무시의 다른 단어지요.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예레 17,9).
부자가 라자로에게 적극적으로 해악을 저지르진 않았더라도, 그를 방치한 채 그 옆에서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산 것만으로 라자로와 율법과 주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께서 이를 모르실 리 없지요. 사실 주님은 라자로 안에서 줄곧 외면당하고 거절당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사랑하지 않은 탓을 물으십니다. 실제적으로 저지르는 악행이 아니더라도 선을 외면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묻고 계십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선을 행하며 살게 창조되었지요. 선행은 우리 본성의 발휘일 뿐, 사후 세계를 담보로 지불하는 계산적 투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제 안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려는 선을 외면하거나 동기를 오염시키는 것은 자기 부정이고 자기 근원에 대한 부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제 눈을 들어 각자 자기의 대문 앞을 살펴봅시다. 지금 누가 어떤 모습으로 누워 있는지요? 아직 여닫을 수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닫힌 대문이 구렁이 되기 전에, 대문이 사랑을 단절시키기 전에 얼른 나서서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길을 터 놓읍시다.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열린 문으로 터놓은 길이 구렁을 넘는 다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보듬었던 라자로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사후의 삶에서 침묵의 증인이 되어 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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