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수요일 (이사 50,4-9ㄴ) (마태 26,14-25)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9ㄴ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파스카 만찬의 밤입니다. 유다는 이미 수석 사제들과 모종의 계약을 맺고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마태 26,16) 노리는 중에 이 자리에 왔습니다.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마태 26,18)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만찬상을 차릴 집 주인에게 할 말을 일러주시는데, 이 말씀은 오히려 당신 자신에게 각인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 "때"를 위해 오신 예수님은 당신께서 이루실 일에 대해 무지하지 않으셨기에, 이제 한 걸음 한 걸음 당신의 "때"를 향해 나아가시는 중입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4,21)
"도둑이 언제 올지 집 주인이 알고 지키면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마태 24,43 참조)는 비유까지 드셨던 예수님께서, 다 아시면서도 배신할 이를 애초에 잘라내시거나 막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향해 흘러가며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마태 26,24)는 순리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던 예수님이 전혀 아무 감정의 동요도 없으셨을 리는 없지만, 근심하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감정은 매우 절제되어 나타납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거나 서운함·분노·실망으로 마음이 출렁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래오셨듯이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에 마음을 쓰시지요. 특히 유다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25) 하신 말씀에는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염려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이 앞날을 모르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들 이야기하지요. 자기에게 펼쳐질 미래의 고통을 뻔히 알면서 어떤 조치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건, 만용도 아니고 자포자기나 무기력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굉장한 용기이고 믿음의 힘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예수님에게서 고요하면서도 강인한 에너지가 흘러나옵니다. 모든 것을 받아 안은 평화일까요. 아직,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마태 26,22)
벗님 여러분은 학창시절에 선생님이 질문하면 손을 잘 드셨나요? 저는 잘 들지 못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어땠나요? 저는 심부름은 정말 기쁜 마음으로 잘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수도자가 되면서도 저는 나름대로 늘 적극적인 "예"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처럼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고 하실 때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유다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한결같이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하는 것을 보니, 유다도 자신이 예수님을 팔아먹는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자신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더 확고하게 믿고 싶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구원하실 거라고 믿었을 겁니다. 유다의 믿음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이 유다와 달랐을 뿐이지요.
사실 우리 대부분도 유다와 비슷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나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어찌 죽게 내버려 두실라구요! 하느님께서 이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 설마 죽을만한 고통을 안겨주실려구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희생제물로 삼아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이었답니다. 그런 하느님이 나를 희생제물로 삼아 나의 가족과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없다면서 나의 희생과 고통,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유다가 되는 겁니다. 오늘 유다가 될지 내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를지 잘 선택하기를 축원합니다.
독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입니다. 십자가 길에서 예수님이 겪으실 모욕과 수모가 예언자의 목소리로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이사 50,8.9)
고난으로 향해 가는 중에 예수님께서 견디실 수 있는 힘은 아버지의 현존입니다. 당신을 믿어주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예수님을 지탱하는 힘이지요. 아버지에게서 받는 극진한 사랑이 예수님께서 유다까지도 참아주고 여기 이 순간까지 제자들 공동체에 함께 받아 데려온 힘입니다.
"주님은 ...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화답송)
그분은 지금 악에게 마음을 준 유다나, 당신을 모른다고 할 베드로, 조만간 두려움에 뿔뿔히 도망칠 제자들을 경멸하지 않으십니다. 죄악, 어두움, 두려움, 실망과 좌절에 사로잡힌 그들을 연민하시며 그 억압의 사슬을 끊어주시려 몸소 수난의 길로 걸어 들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주간 독서를 통해 사흘 동안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를 첫째, 둘째, 셋째까지 연달아 들었습니다. 이로써 수난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준비한 우리는, 주님의 종의 노래의 가장 절정인 넷째 노래를 성 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때 듣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말씀과 함께 이미 주님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밀물처럼 차오르는 죄의 기억 때문에 후퇴하지 말고, 남을 탓하느라 곁길로 빠지지도 말고, 절망과 좌절이 내민 손을 더듬느라 멈추지도 맙시다. 나약하고 염치없는 죄인인 채로 나아갑시다. 어차피 우리의 의로움은 스스로의 행실로 얻을 수 없고, "의롭다 하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잊지 맙시다. 예수님 십자가 곁에서 한 방에 구원을 쟁취한 그 사람, 역사상 가장 염치없는 욕심쟁이 우도(右盜)가 우리에게 희망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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