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9-15
9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10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1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12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14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유다 지도자들, 원로들, 율법학자들이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위협할 때 사도들이 한 대답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곧 그 정체성과 활동의 근거가 들어 있습니다.
이를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 이는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녀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마르 16,10)고 하지요.
그리고 그 다음은 시골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마르 16,13)고요.
그러므로 직접 보고 들은 이들을 통해 전해지는 예수님에 대한 체험은 한 곳에 멈추거나 고여 있을 수 없습니다. 관계를 통해, 사건을 통해 퍼져나가 새로운 체험을 낳고 새로운 제자들을 낳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의 자연스런 생명 원리입니다. 이 확산의 매개체는 엄청 대단할 것도 없이 예수님을 "딱 한 발자국" 먼저 체험한 존재입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사도 4,13)
유다 지도자들이 본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쫒아 주신 여자였다."(마르 16,9) 마르코 복음사가의 눈에 비친 부활의 첫 증인,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에 대한 시각이야 워낙 적대자들 입장으로 서술한 것이니 이해할 수 있지만, 마리아의 경우 이왕 복음서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다든지, 십자가 죽음을 곁에서 지켰다든지 등, 보다 긍정적인 프로필도 없지 않았을 텐데 지금 같으면 개인 의료 비밀 정보 유출 수준으로 굳이 그녀의 사적 어두움을 들추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머물러 보았습니다.
기라성같은 남성 공식 제자들을 놔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이가 여자라니, 그것도 과거에 온전치 못했던 그런 여자... 설마 이런 질투와 비하의 의도로 그녀를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닐 텐데요...
사실 저는 오늘 복음의 첫 줄을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이 행간에서 읽혀졌기 때문입니다. 일곱 마귀에게 시달렸던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구원자시고, 예수님에게 마리아는 목숨을 내놓고 살려 낸, 구출해 낸 사랑하는 여인이지요. 저는 마리아라는 한 여인에게서 온 인류를 봅니다. 그녀는 갖가지 영적 · 육적 · 심리적 · 정신적 질병으로 제각기 병들고 무너지고 파괴되어가는 인류를 대변합니다. 우리 중 과연 누가 일곱 마귀로 대변되는 온갖 죄와 악과 어둠과 유혹에서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있을지요...
베드로, 요한이나 마리아에 대한 꾸밈없이 솔직한 설명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하고 그분의 말씀을 전하며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죄인들입니다. 무식하고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데다 일곱 마귀에게 시달리기까지 하던 사람들이라 세상 앞에 떡하니 내놓을 변변한 타이틀 하나도 갖추지 못한 한심하고 별볼일 없는 존재들에 불과하지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협을 받아도 사랑하는 이의 무덤으로 새벽같이 달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롱과 모욕이 기다려도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나누고 베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 복음은 이렇게 똑똑치 못하고 엉성하고 허술한 바보들의 진심을 통해 선포되고 퍼져 나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다 그리스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영성체송 참조) 벗님이 바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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