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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26주간 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제1독서

<많은 민족들이 주님을 찾으러 예루살렘에 오리라.>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8,20-23
20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민족들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오리라.
21 한 성읍의 주민들이 다른 성읍으로 가서
“자, 가서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자. 나도 가겠다.” 하고 말하리라.
22 많은 민족들과 강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에서 만군의 주님을 찾고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러 오리라.
23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그때에 저마다 말이 다른 민족 열 사람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갈라진 세상을 하나로 일치시키시려는 주님의 마음이 묻어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때"는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 소명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완성되는 유일하고 완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 "때"의 도래를 의식하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결단을 내리십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순종이 결단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루카 9,53)
사마리아인들은 북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정복되면서 이방인과의 혼혈이 늘고 종교까지 뒤섞이게 되자 유다인들의 무시를 받아왔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모르지 않지만(요한 4,1-41 참조) 그분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이 못마땅해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지요.


이 일은 그저 여행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갈등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이루시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이유와 목적이 잘 드러난 복선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제사가 하느님과 인류, 유다인과 이민족의 화해를 위한 결정적 사건인 까닭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5-56)
제자들이 구약의 엘리야처럼 불을 내릴 능력이(1열왕 18,20-40 참조) 마치 자기들에게 있는 듯이 분노하며 흥분하지만, 예수님은 발끈하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담담히 다른 길을 택해서 걸어가십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에서 환대받지 못해 손상된 스승의 체면 때문에 분노한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상 구겨진 것은 제자들의 허영과 숨은 야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 이 소모적 적대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시면서 당신의 계획을 더 굳히시지 않으셨을까 헤아려 봅니다.

제1독서에서는 민족들 사이에 대동단결의 판이 활짝 펼쳐집니다.  

"한 성읍의 주민들이, 다른 성읍으로 가서, '자, 가서,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자. 나도 가겠다.'"(즈카 8,21)
경계하고 구분하고 차별하던 선민의식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모든 민족이 한 분이신 주님을 향해 나아옵니다. 자기들만의 하느님이라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구원관에서 서로를 진리와 구원으로 이끌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한 판 화합과 일치의 장이 열리고 있지요. 참으로 흐뭇하고 흥겨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목숨 바쳐 이루시려는 화해의 잔치일 것입니다.


"나는 라합도 바빌론도 나를 아는 자로 여긴다. 보라, 에티오피아와 함께 필리스티아와 티로를 두고, '그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하는구나."(화답송)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사 안에서 때로는 이스라엘과 불화하고 적대했던 원수들까지도 주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포용하심을 노래합니다. 구원은 이스라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내리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어울리고 조화를 이룬다는 것, 서로에게 입힌 상처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화해로써 거리를 좁히려 애쓰며 하나 되기 위해 다가가는 것, 근거 없는 무시와 우월감의 폭력을 멈추고 상대를 "우리"로 바라보는 것. 사실 이런 과정들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정과 공동체, 사회에서는 물론 자기 존재 안에서도 나날이 미세하고 복잡한 진동과 분열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오늘도 말씀으로 일깨우시며 담담하고 초연히 가실 길을 가십니다. 죽음을 각오한 발걸음에 분노나 억울함, 서운함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무질서하고 애먼 감정일랑 그저 흔연히 떠나보내고, 주님께서 이루실 화해의 제사를 향해 그분과 함께 담담하고 초연히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얕고 얇고 가벼운 우리 성정만으로는 불가능할 터이지만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복음 환호송) 주님께서 우리 존재의 중심을 묵직히 잡아주시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평화의 사람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