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에서 12km 떨어진 소토 일몬테(Sotto il Monte)에서 가난한 농부인 조반니 론칼리(Giovanni Roncalli)의 14명의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제상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는 베르가모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교육을 받고 로마의 성 아폴리나레 대학(San Apollinare Institute)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곳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중, 1902년 10월 영성 지도자인 구속주회의 프란체스코 피토키(Francesco Pitocchi) 신부를 만나면서 “하느님은 모든 것이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Dio tutto, io sono nulla)라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명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904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나서 사제품을 받은 그는 다음 해에 베르가모의 테데스키(Giacomo Maria Radini Tedeschi)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어 1914년 주교가 선종할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다. 교구장 비서로 일하면서 그는 교구사와 신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암브로시우스 도서관에서의 연구 작업은 후에 교황 비오 11세(Pius XI)가 된 라티(Ambrogio Damiano Achille Ratti) 추기경과의 만남을 갖게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의무병으로 그리고 후에는 군종 신부로 군 복무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21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는 그를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의 이탈리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어 1925년 아레오폴리스(Areopolis)의 명의 주교로 품을 받고 불가리아 감목 대리로 파견되었다. 1935년 대주교로 승품된 그는 그리스와 터키 주재 교황 사절로 이스탄불에서 근무했다. 그는 교황청에 대해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터키 정부의 각료들과 우정을 맺으며 동방 교회 신자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힘쓰며 교회 일치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에 점령당한 그리스에 대한 도움과 유대인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철수한 1944년 12월 22일부터 파리 주재 교황청 대사로 임명된 그는 프랑스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1953년 1월 12일에는 추기경으로 서임된 후 1월 15일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교황 비오 12세(Pius XII)의 선종으로 1958년 10월 25-28일 개최된 교황 선거에서 그는 7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으로서 요한 23세라는 이름을 선택한 그는 11월 4일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좋은 목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우선 교황이 된 후 처음으로 개최한 추기경 회의에서 추기경 숫자를 70명으로 제한하는, 식스투스 5세(Sixtus V) 교황 때부터 내려오던 규정을 폐지하였다. 1958년 12월 23명의 추기경을 새로 임명했는데, 그중에는 밀라노(Milano) 교구장으로 후에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가 되는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2년까지 그가 임명한 추기경은 모두 87명으로 늘어났다.
1959년 1월 25일 교황 성 요한 23세는 추기경들에게 로마 교구 시노드 개최, 공의회 개최, 교회법전 개정 등 세 가지 계획을 선언하였다. 로마 교구 시노드는 1960년 1월 24-31일까지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개최되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는 교황 성 요한 23세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공의회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치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회의 생활을 쇄신하고 그 가르침과 조직을 현대에 맞도록 개혁한다는 취지를 분명히 했다.
그 밖의 괄목할 만한 개혁으로는 그리스 멜키트파(Melchites) 총대주교 막시모스 4세(Maximos IV)의 호소를 받아들여 비잔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을 허가하는 한편, 미사 경본과 시간 전례서(성무일도)에 대한 새로운 예식 규정을 인가하고(1960년), 미사 통상문의 감사 기도 제1 양식(로마 전문)에 성 요셉(Josephus)의 이름을 삽입했으며(1962년), 교회법전 개정을 위한 교황청 위원회를 구성한 일(1963년)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1960년 교회 일치를 위한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을 신설하고 이듬해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의 대표가 참가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비가톨릭 인사들을 참관인으로 초대하는 등 일련의 쇄신 작업이 이어졌다. 그는 또한 회칙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 1961년 5월 15일)를 통해 가톨릭 교회의 사회 가르침을 쇄신하고,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년 4월 11일)를 통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온 인류가 함께 힘써야 함을 강조했다.
1963년 5월 22일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축복을 준 교황 성 요한 23세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던 6월 3일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5년도 채 안 된 재임 동안 성 요한 23세 교황은 인류를 향해 열려 있는 교회가 되도록 가톨릭 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좋으신(착한) 교황’(papa buono)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는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 소송이 시작되어, 2000년 9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복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2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에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청 시성성은 성 요한 23세 교황이 시성을 위해 필요한 두 번째 기적 심사 없이 시성될 수 있는 거룩한 인물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공로를 인정해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시성 승인을 받았다. 성 요한 23세 교황의 축일은 일반적 관례에 따라 선종한 날인 6월 3일에 기념하다가 시성식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일인 10월 11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다.♧
소박하고 인정 많고 사랑스러웠던 사목자, 요한 23 교황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목 노선이나 행동 방식을 유심히 분석해보니, 역대 교황님들 가운에 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요한 23세 교황님이 시작하셨지만, 아직도 진행 중인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실현하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는 분위기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소박하고 인정 많고 사랑스러웠던 요한 23세 교황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리워합니다. 그는 정녕 탈권위주의의 전형이었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그는 베네치아 대교구 교구장이자 추기경으로 사목하고 계셨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는 추기경이기에 앞서 베네치아 시민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네치아 시민 모두의 부담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는 수많은 다리 위를 걸어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의 집을 스스럼없이 방문했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의 머리를
한참동안 쓰다듬어주는가 하면 열심히 노 젓는 뱃사공의 뚝심을 칭찬했습니다. 큰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모퉁이 길을 돌아오는 할머니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넸습니다. 당시로서는 3D업종이었던 부두노동자들과 조선소 근로자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안타까워했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되고 나서 맞이한 첫 번째 성탄 전야, 그는 어린이 병동을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지냈는가 하면, 그 다음날 성탄절 아침에는 교도소에 갇혀있는 ‘사랑하는 아들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교황청에 근무하는 직원들, 운전기사, 주방 아주머니, 비서 신부님과 절친 관계, 1촌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런 요한 23세 교황님의 행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습니다.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군중들에게 인사하려고 발코니에 섰을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조금은 웃었습니다.
세련되고 이지적이던 전 교황님들과는 달리 너무나 편안한 할아버지, 넉넉하다 못해 뚱뚱한 할아버지 한 분이 딱 나타나신 것입니다. 큰 체구를 고려해서 크게 맞춘다고 맞춘 수단인데도 몸에 꽉 끼어서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유머 감각이 탁월하셨던 교황님은 힘겨운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비서 신부님을 향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농담을 건넬 정도였습니다.
다음의 일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유머러스한 분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교황님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가운데 한 부인이 그를 뚫어지듯이 바라보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새 교황님은 너무 늙고 뚱뚱하셔!”
그 말을 들은 교황님께서는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자매님,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는 미인 선발 대회가 아니랍니다.”
한 신앙인이요, 동시에 사목자로서의 좋은 모델이 되어 주신 요한 23세 교황님,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우리에게 아버지요 선물로 보내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땅의 모든 사목자들이 교황님을 닮아 더 겸손하고, 더 온유하며, 양들을 향한 자비심과 연민의 마음으로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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