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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2주간 목요일 / 송영진 신부님 ~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강론>(2023. 11. 16. 목)(루카 17,20-25)

 

복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0-25
그때에 20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23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24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25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0-25)”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은 것은,

종말의 날이 언제냐고 물은 것입니다.

(그날을 미리 알려 주는 어떤 표징이 있겠느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종말의 날’은 하느님 나라가 오는 날(시작되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는

예수님의 답변은,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종말의 날은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는 날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이다.”(이미

시작된 종말이 완성되는 날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은”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 마음속에”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신앙과 신앙생활 안에서,

사랑 실천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넓게는 이 세상 안에서 건설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건설과 완성은

세속 국가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어떤 표징과 함께 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루카 16,16).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어떤 특정 장소에 세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 세상 전체에서,

또는 우주 전체에서 건설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말은 우주의 파괴와 소멸이 아니라

변화와 완성입니다.

‘종말 전의 재난들’은 회개하라는 경고일 뿐이고,

이 세상을 완전히 파괴해서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은 “너희가 나의 재림을 하루라도 보기를

갈망할 정도로 심한 박해를 받을 때가 오겠지만”입니다.

종말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고,

심판하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신앙인들은) 박해를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 빨리 재림하셔서 박해자들을 심판하시기를,

또 신앙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라도’ 라는 말은,

그만큼 심하고 혹독한 박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그 날이 언제인지

말할 수 없다.”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순교자들이 희망도 없이

절망 속에서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 순교자는 순교 직전에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고(사도 7,55-56),

자신의 신앙과 순교가 옳은 일이라는 것을, 또 이제 곧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확신과 기쁨 속에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가짜 메시아와

가짜 ‘재림 예수’가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라는 말씀은,

가짜 메시아와 가짜 ‘재림 예수’에게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짜로 재림하실 때,

혹시라도 가짜 재림 예수라고 오해하는 일은 없을까?

그런 의문에 대한 답변이 24절의 말씀입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번개가 치면 곧바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누구든지 그분이 재림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신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생략하고

곧바로 부활, 승천, 재림을 이루시면 좋지 않은가? 라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십자가는 생략할 수 없는 필수 과정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 대신에 당신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신 일입니다.

<각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인데, 지상에서의 인생을 생략하고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