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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33주간 목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 마카베오기 상권의 말씀입니다.2,15-29
그 무렵 15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모데인에서도 제물을 바치게 하려고 그 성읍으로 갔다.
16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이 그 관리들 편에 가담하였지만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한데 뭉쳤다.
17 그러자 임금의 관리들이 마타티아스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성읍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는 큰사람이며
아들들과 형제들에게도 지지를 받고 있소.
18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
19 그러나 마타티아스는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20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21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
22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
23 그가 이 말을 마쳤을 때, 어떤 유다 남자가 나오더니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왕명에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24 그것을 본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25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26 이렇게 그는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27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
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나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28 그리고 그와 그의 아들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 둔 채
산으로 달아났다.
29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평화'를 추구하라고 이르십니다.

"오늘 네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십니다. 안타까움으로 애가 타시는 듯합니다. 하느님의 도성이며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정작 평화에 대해 무지하다니요...


지금 이스라엘은 진정한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향해 활짝 열린 계시가 예루살렘의 눈에는 아직 봉인되어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요.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지만, 예수님을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 알아본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권력과 세도에 흑심을 품은 제자들은 자리 경쟁에 골몰하고 군중은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었지요. 그리고 종교 기득권자들은 자리를 보전하려 음모를 꾸밉니다.


하느님께서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 관념 안에 새겨진 하느님 상이 각자의 야망과 욕망을 반영하는 탓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이와 약자, 고아와 과부, 병든 이와 소외된 이의 보호자임을 알게 되면 그분에게서 등을 돌릴 것입니다. 힘과 권력, 성공과 재물 등 그들이 바라는 무사 무탈 풍요 안위의 평화와 결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루카 19,43)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파괴한 실제 역사를 예견합니다. 세상이 보장하는 평화에 취해 칼을 주러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그분 백성은 실제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 다섯 아들과 함께 독립 항쟁을 시작한 마타티아스를 소개합니다.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1마카 2,18)
배교를 강요하는 관리들이 마타티아스를 회유합니다. 그가 성읍의 지도자이고 동족의 존경을 받는 큰 사람이어서 그의 배교가 적잖은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측근이 되고 세속의 재물까지 누리는 삶은 안전하고 풍요롭기까지 할 겁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주는 평화에 길들여지는 삶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안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것으로 이미 충분하고 흡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필요 없으니까요.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갔다."(1마카 2,29)
세상이 주는 평화를 거부한 이들은 광야로 떠납니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삶의 결핍과 가난을 껴안는 장소이고 기회입니다. 하느님께 신의를 지키기 위해 광야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목숨을 걸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평화를 지키는 삶은 종종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내놓고 영육의 가난을 떠안은 이들은 이미 하느님과 닿아 있기에 누구도 그 평화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나의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평화의 길을 헛짚고 헤매일 때 슬피 우십니다. 세상이 주는 풍요와 안위에 취해 진정한 평화가 던지는 도전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무뎌지지 않도록 마음을 성실히 벼리고 닦아나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벗님과 함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