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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오상선 신부님 ~

 2월 16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단식은 잘 알다시피 어떤 목적 하에 일시적으로 먹기를 중단하는 겁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지면서 의료나 미용 목적의 단식이 유행해서 그 무게가 가벼워지긴 했지만,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순교적 행위가 되기도 하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절대자 앞에 나아갈 때 맑고 정갈한 상태를 새롭게 회복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비워내는 과정으로 행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이나 패망,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와병, 민족적 수치 앞에서 옷을 찢고 먼지를 머리 위로 날리며 재를 뒤집어쓰고 베옷을 걸치고 단식했습니다.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예언자를 통해 전해질 때 역시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그분 마음을 돌리고자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단식은 인간이 하느님께 통회와 청원의 마음을 담아 취하는 겸손의 표현이고 또 다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식을 단지 굶는 행위라 본다면,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라는 말이 가능하긴 합니다 단식의 지향보다 그 빈도수에 관심을 둔다면 그럴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단식을 그 의미나 지향보다 횟수와 형식에 관심을 두는 의식이 팽배해지자,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이사 58,4).

그리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이사 58,6).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풀어 주고, 끌러 주고, 내보내고, 부수어 버리고, 나누고, 맞아들이고, 덮어 주고, 숨지 않는 것" 즉, 가난하고 약해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대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연대입니다. 그저 먹고자 하는 자기 욕구를 절제하는 단식에 그치지 말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고 실제로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행위가 진정한 단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단식이 내가 굶고 비워내는 행위에서 타인을 채우고 풍요롭게 해 주는 행위로 승화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진정한 단식이 됩니다.

그렇다면 단식이 온전히 이타적이기만 한 행위일까요? 내가 굶어 남의 배를 채우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움의 행위에 따르는 놀라운 은총을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을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9).

피조물로 이 지상에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요! 빛과 치유, 의로움, 주님 영광의 보호, 주님의 경청과 즉각적 응답... 이렇게 주님과 단단히 결속할 수 있다면, 몇 끼 굶는 게 문제겠습니까, 내 밥그릇 비워 남 주는 게 대수겠습니까! 단식의 가치가 이렇게 놀라운 것이라면 어찌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식은 사랑입니다. 아니, 사랑이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태 9,15)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실 때 혼인 잔치와 신랑, 잔치 손님의 표상을 사용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르익어 절정을 이루는 혼인 잔치, 그 사랑이 세상에 공표되고 인정 받는 그 자리에서는 누구도 사랑 이외의 것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신랑은 신부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신부 역시 신랑에 대한 사랑으로 잦아듭니다. 신랑의 친구들은 소리 높여 축하하며 사랑의 흥을 돋우고, 손님들은 사랑의 포도주에 취해, 저마다 과거의 현재의 미래의 사랑 안에서 헤엄칩니다. 이 자리에선 남녀노소, 빈부격차, 인종, 민족, 그밖에 어떤 차별적 요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신랑이 현존하는 혼인 잔치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단식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머지않아 신랑을 빼앗기고 잔치가 끝나고 친구와 손님들도 뿔뿔이 흩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긴 신부는 누구보다 황망히 울며 애태울 것입니다. 님을 잃은 슬픔에 잠겨, 비로소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찾느라,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단식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그들처럼 단식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단식을 살지 못한 부끄러움에 다시 처음부터, 단식의 가나다부터, 단식의 ABC부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은 단식 자주 하십니까? 안 하신다구요? 정말 부럽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늘 함께하시니까요. 그래서 단식할 필요가 없으시니 감축드립니다.

저는 사순절 시작하기 전부터 단식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요즘 신랑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맘이 너무 짠할 때가 많아서입니다. 그분이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안에서 함께 고통받고 억압받고 계시니, 어찌 혼인잔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끔 그분과 함께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수 없을 때, 그분을 그리며 가난한 이들과 동참하여 단식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번 사순절엔 신랑이신 그분과 함께 기쁨의 잔치도 벌이겠지만, 가끔은 사랑의 단식을 통해 그분을 빼앗긴 이들에게 다시 그분을 찾아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보다도 그들의 상처가 아물고,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주님 어전에 가납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