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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사순 제 2주간 화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선행을 배우고 공정을 추구하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10.16-20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주님은 공동체적 모범 답안에 수정을 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 23,3).

지도자는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를 구성원들에게 모범적으로 제시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군중은 지도자에게서 삶의 모범 답안을 찾고 싶어하지요.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당시 종교 권력자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권한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들의 지식과 가르침을 행동과 구분하시지요.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나름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는 열심한 이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과 실제 행동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것이지요.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이것이 바로 그들이 간과한 진리입니다. 모든 이가 형제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타인 위에 군림하거나 그들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필요에 민감히 감응하고 손을 내밀지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형제 간에도 선후가 있듯이 형제적 공동체 안에도 기본 질서를 위한 위계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위계는 세속적 권력 구조와는 정반대의 질서를 추구하지요. 높은 자리의 형제일수록 더 낮아져야 하고 모든 이를 섬기는 종의 소명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겁고 힘겨운 짐을 형제의 어깨에 올려놓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이는 이기적인 야심가에 불과할 뿐, 엄밀히 말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근거를 제1독서에서 듣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 고모라의 백성들아"(이사 1,10).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너무 무겁고 그 원성이 너무 커서 유황과 불로 아브라함 때 진즉에멸망한 도시들입니다(창세 18,16-29 참조). 그런데 기원전 740년대쯤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소환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독서 대목에서 중략된 부분에는, 주님께 제사를 드릴 때 겉으로는 예를 갖추면서 그 속은 위선과 허세, 착취와 폭력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을 꾸중하시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소돔의 지도자, 고모라의 백성이라 부르신 것을 보면 그 죄의 악취가 얼마나 역겹고 혐오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놓쳤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돌이키길 바라시는 걸까요?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6).

사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혀 생소하고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찌기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안에 다 들어 있는 말씀들이니까요. 듣기는 하되 다만 실행하지 않은 일들이고, 가르치기는 하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기대하지 않을 만큼 무의미하고 하찮은 덕목이 되어버린 말씀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사야 시대의 하느님의 탄식과 신약의 예수님 탄식이 한 목소리로 울립니다.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여, 율법의 내용을 자기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해 취사 선택하고, 그런 자신을 모범 답안처럼 내세우는 소위 종교 지도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주님의 안타까움이 강하게 묻어납니다.

실제로 말한 바와 실행이 온전히 일치하는 이는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곧 '완성'이니까요. 그러니 사실 사람에게 언행일치라는 덕목은 아무리 애를 써도 늘 부끄러운 미완의 과제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언행이 완벽히 일치하시는 하느님처럼 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계시지요. 가령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떠버리 위선자가 되지 않기, 실행하지 않는 바에 대해서 침묵을 택하기, 비난과 불평 멈추기, 타인의 짐을 덜어 주고 숨어서 선행하기,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앞다투어 섬기기, 가난한 이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 편에 서기, 약자의 목소리가 되어 주기...

이는 어떤 제사보다, 어떤 예물보다 주님을 흡족하게 해드릴 값진 선물입니다. 벗님이 그동안 잘 해온 실천들이 있으실 테니 너무 욕심 내지 마시고, 거기에 더하여 하나만 더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마침 지역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연민과 참여의 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말로만 이렇니 저렇니 하지말고 우리 각자의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기도와 희생, 나눔을 통해 이 사순절이 주님의 형제로서 보폭을 맞추는 행복한 여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우리, 작은 것 딱 하나씩만 더 해봅시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