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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13주일 / 이수철 신부님 ~

 연중 제1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삽시다

“믿어라, 찾아라, 나눠라”

 

 

 

오늘은 예수성심성월 6월의 끝날이자 제13주일이고 교황주일입니다. 해마다 한국교회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이나 가까운 주일을 교황주일로 지냅니다. 어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이어 오늘 지내는 교황주일이 참 잘 어울립니다. 교황주일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참 자랑스런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 최고의 정신적 지도자인 교황님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삽시다”에 걸맞는 참 훌륭한 교황님입니다. 가톨릭신문에 소개된 교황님의 참 특별했던 6월14일 오전 8:30에 시작하여 밤까지 이어지는 일정을 소개합니다.

 

 

 

이날 87세 교황은 교황청에서 전 세계에서 온 100명이 넘는 코미디언을 만났고,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에서 열린 주요 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인공지능의 윤리적 측면에 대해 연설했을뿐 아니라, 여러 지도자들을 독대하며 40대의 그 누구도 녹초가 될 일정을 소화하는 활력을 보였습니다. 교황이 주요 7개국 정상회담장에 들어섰을 때, 시끌법적하던 분위기가 한순간 정적에 휩싸였고, 각국 정상들은 경외심으로 교황을 바라봤습니다.

 

 

 

교황이 연설할 때 각국의 정상들은 집중했습니다. 토론토대학교의 정치공학자이자 G7 연구소를 이끄는 존 커튼은 “교황은 특별한 셀럽”이라고 말했다. '셀럽'이란 celebrity(유명인)의 줄인말로, 사전적으로는 직업상 연예인은 아니지만 큰 인지도를 얻어 이를 자산으로 살아가는 이를 뜻합니다. 교황은 가톨릭교회를 넘어 명실공히 세계의 정신적 대통령임을 깨닫게 됩니다. 컬럼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말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교황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대안을 발명해야 한다. 교황직이 날개를 펼칠수 있도록 교황직을 재해석하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고 배울, 희망의 표징같은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인물을 교황으로 모신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도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복음적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옛 성현은 이런 참사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하고, 맞서야 할 만한 것에 맞서라. 그것이 참된 용기이다.”<다산>

“스스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부랑자도 무섭지만, 스스로 돌아보아 옳다면 천만 명과도 맞설 수 있다.”<맹자>

 

 

 

이런 대장부가 참사람이며 바로 우리 가톨릭 교회의 순교성인들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설교시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에게, 주님과의 만남은 참되고 적절한 파스카 체험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워졌고 새생명의 문들은 그들앞에 열렸다.”

 

 

 

새삼 참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에 있음을 봅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매일 만나 주님을 닮아 변모되어감으로 참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믿어라!”입니다.

 

참 좋으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생명이자 사랑이신, 희망이자 기쁨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 우리 삶의 중심과 의미가 되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의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이런 하느님을 믿을 때 해결됩니다. 지혜서가 이런 하느님을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제1독서 지혜서 전문을 통째로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들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정의는 죽지 않는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정의로운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삽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셨고 당신 본성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을 그것을 맛보게 됩니다. 육신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을 떠난 영혼의 죽음이 문제입니다. 이게 진짜 두려워해야 할 죽음입니다. 살아있다하나 실상 하느님을 모르는, 하느님을 떠난 죽은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에 속한 의로운 이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둘째, “찾아라!”입니다.

 

무엇을 찾습니까? 자비로운, 치유의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세상에 용서가 필요없는 사람은, 치유가 필요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죽은 딸을 살리려고 부성애를 발휘하는 회당장 야이로, 또 회당장의 죽은 딸, 그리고 열두해 하혈병을 앓던 여자 모두가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정확히 최고의 명의이신 치유의 주님을 찾았고 만났습니다.

 

 

 

예나 이제나 죄인이자 병자인 우리가 찾을 분은 단 한 분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복음에서 치유의 구원을 베푸신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도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용서와 치유를 선물하십니다. 열두해 하혈병을 앓는 이에 대한 치유선언은 바로 미사에 참석하여 치유를 갈망하는 당신을 믿는 우리 모두를 향한 복음말씀입니다.

 

 

 

“딸아(아들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도대체 주님을 만남이 없이 어디서 이런 완벽한 전인적 치유를 받을 수 있을런지요! 야이로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는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이들을 향해 정신 번쩍 들게하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육신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만나 깨어 날 때 그대로 부활의 삶인 것입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은 물론 잠시 영혼이 잠들어 죽어있는 듯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주님과 함께 깨어 일어나 부활의 삶을,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참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심신이 무기력하여 무너지려 할 때 즉시 "탈리타 쿰!" 하며 일어나기 바랍니다. 더불어 귀가 막혀, 입에 막혀, 잘 듣지 못하고, 잘 말하지 못한다 싶을 때는 “에파타!”외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귀를, 입을, 마음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셋째. “나눠라!”입니다.

 

내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주님께 받은 주님의 것이니 말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 나눌수 없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말한마디 천량빚 갚는다는 말도 있고, 친절한 말씨, 따뜻한 마음도, 작은 미소의 사랑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나눌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이래서 더불어의 공동생활을 권하는 것입니다. 만병은 혼자의 외롭고 쓸쓸한 삶에서 시작됩니다. 서로 같은 처지의 아픔을 나누는 동병상련의 나눔도 힘이 됩니다. 얼마전 작고한 민중시인 신경림의 시 ‘파장’ 첫 부분은 저절로 미소짓게 합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친구같은 얼굴들”

 

 

 

그러나 나눔의 절정은, 나눔의 진수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교회가, 즉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니아 교회가 보여줍니다. 이 교회를 극찬하는 바오로의 나눔에 대한 가르침은 그대로 주님의 마음과 일치합니다. 참 깊고 아름다운 내용이라 제2독서 코린토 후서 말씀을 전부인용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씀인지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자 가난해 지신 주님을 본받는다면 우리 역시 자발적으로 나눔으로 비움의 가난을 택할 것이요, 이 가난은 곧 부요로 바뀔 것입니다. 나눔의 비움으로 풍요로워지는 내외적 삶입니다. 마지막 말씀도 참 나눔의 영성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 시간에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말그대로 자발적 ‘억강부약(抑强扶弱) 대동세상(大同世上)’의 실현입니다. 즉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의 실현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을 원하십니까?

 

 

 

주님을 믿으십시오.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의 것을 나누십시오.

 

이렇게 살 때 주님을 닮아 참 온전하고 아름다운 삶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