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 분배하며 자주 마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자캐오 얘기를 묵상하면서 떠올랐습니다.
성체를 모시러 나오는 분들 가운데서 마뜩잖은 모습을 자주 접합니다.
걸음이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제게 가까이 와 성체를 받지 않으십니다.
제가 다가가거나 손을 내뻗어야만 할 정도로 떨어져 받으시는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손 높이가 너무 낮아 제가 낮춰야만 영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하시기에 제가 불편한 것도 있지만
그렇게 영할 거면 뭐 하러 영할까 생각도 됩니다.
혹시 성체를 별로 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지.
열망은 없고 네가 주고 싶으면 주라는 식은 아닌지.
그런데 제가 왜 이 얘기를 오늘 길게 하냐 하면
오늘 묵시록에서 이렇게 나무라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이렇게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자캐오와도 비교되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의 말씀에 비춰볼 때 자캐오는 한때 차디찬 인간이었습니다.
돈을 끌어모으기 위해 사람들에게 냉혹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관심과 열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자캐오가 오늘 주님을 뵙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갈 정도로 대단한 열성을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캐오처럼 주님을 만나 뵙고 내 집/안에 모셔 들이려면
이 정도의 열성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열성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팬이라면 어떤 팬이고 어느 정도로 열광할까요?
유명한 가수의 공연에 가려면 몇십만 원의 표가 아깝지 않고,
그렇게 주고라도 공연에 갈 수 있는 것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공연장에 가서는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손길이라도 스치기를
바랄 정도로 열광하는데 우리는 그 정도로 주님께 열렬한 팬이고 뵙고자 합니까?
그런데 저 자신을 들여다보면 애초부터 저는 뜨겁지 않았고,
온돌로 치면 저는 뜨끈뜨끈한 돌이 아니라 차디찬 돌이었습니다.
온돌이 본래 그렇습니다.
불을 때기 전에는 차디찬 돌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뜨거운 불로 달궈지기 전의 우리는 본래 차디찬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차디찼던 자캐오를 주님께서 뜨겁게 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먼저
주님이 당신의 뜨거운 불로 달궈주시길 바라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고 겸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저를 오늘 뜨겁게 하소서!
주님, 제가 타오르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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