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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4주간 월요일 / 송영진 신부님 ~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강론>(2024. 11. 25. 월)(루카 21,1-4)

 

복음

<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사랑받고 있으니 사랑하여라.”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1) ‘사랑’에 관해서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받았으니 주어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9-11).”

요한 1서에 있는 이 말들은,

사실상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9-10.12-14).”

하느님(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도 사랑을 실천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2)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모두 봉헌한 일은,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한 일입니다.

<그 헌금은 아마도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에 대해서 묵상할 때,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 그 ‘사랑’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치는 행위와 온 마음을

다 바치는 사랑은 따로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정 때문에 마음으로는 다 바치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고 일부만 바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자신의 봉헌을 과시하고

자랑하려고 가진 것을 다 바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넣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일

뿐인데,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이는 그 모습이 아니라,

과부의 마음속을 보셨습니다.

 

3) 예수님 말씀에서,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이라는 말씀은,

부자들이 마음을 다 바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온 마음이 아니라, 약간의 선심 정도.>

어쩌면 부자들 가운데 일부는, 그날의 생활비를 전부 다

바친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있었다면 그 액수는

상당히 큰 액수였을 텐데, 그들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쳐도, 풍족함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계속 부유하고 풍족한 생활을 할 것입니다.

반대로, ‘궁핍한 가운데에서’ 라는 말씀은,

가난한 과부가 온 마음을 다 바쳤음을 나타냅니다.

동전 두 닢을 바친 다음에, 그 과부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다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믿음이 있었으니까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마태 6,34).

그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어떤 체험을 통해서든지 묵상이나 기도를 통해서든지 간에,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라고 깨닫고,

감격하고, 기뻐하게 되면, 사람이 변하게 되고,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4)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것일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고, 그래서 변화되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한 번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적 없다.” 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기는 것인지?

이 질문에 대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받고 있는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된다.” 라고 말하면서 ‘사랑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상투적인 대답이고,

위선자들의 경우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 차이는 ‘믿음’의 차이일 수도 있고, ‘성품’의 차이일 수도

있고, 부족한 것이 없어서 하느님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풍족함’과 하느님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는 ‘궁핍함’이라는

각 개인의 ‘처지’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