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역사의 반복처럼, 매년 연중행사처럼 분쟁 그리고 천재지변, 기상이변과 각종 질병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이런 인재人災와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 등은 이젠 지구라는 행성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에게 일상화되어 버린 듯 무감각하기도 합니다. ‘금년도 예외 없이!’ 예수님 시대 이후 세상은 세기말世紀末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은 종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종말終末을 앞둔 시간을 살아간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욱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침 시기와 또한 새로운 시작,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를 앞둔 지금은 공교롭게도 계속해서 비슷한 복음의 메시지를 듣다 보면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이 시기만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때까지 우리네 삶도, 역사의 시간은 바로 ‘어제는 금요일, 그러나 부활 주일이 오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두 날을 온전히 살았던 사도들은 결코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아니 계신 것처럼(=不在) 보일 때가 예수님이 가장 강하게 現存하신 때이며,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보일 때가 다시 살아 돌아오실 때라는 것을 철저하게 배웠고 체험했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실제로 영적으로 전례력에서 별로 의미 없는 날, 바로 토요일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역사는 어떤 면에서 약속과 성취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구는 현재 토요일인데 과연 부활 주일, 곧 재림은 올 것인가? 영성적 의미에서 우리는 성금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에 살고 있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재림은 오리라는 기다림으로 살아야 하는 우주적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당신께서 몇 번이나 예루살렘을 모으려고 하였으나 마다하였다.”(루13,34)하고 한탄하시면서도, 품으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을 향한 애틋한 심정으로 눈물을(19,41) 흘리시면서까지 회개하도록 촉구하셨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역사적으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루살렘은 자신의 속량(=구원)을 스스로 잃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 결과로 닥친 환난을 피하기 위해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며, 하느님께 피신하라는 의미)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악의 구렁에서 나오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죄악의 구렁으로 들어가지 마라.)”(21,21)고 권고합니다. 이런 권고는 마치 6. 25전쟁을 겪으신 분들은 이런 어려운 상황을 온몸으로 겪으셨기에 실감하셨으리라 보며, 그러니 전쟁 중에 누가 그 전쟁의 중심 지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빠져나와 피난을 떠나다 보면 거동이 불편한 임산부나 젖먹이가 딸린 여성들이(21,23)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야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한 일이라고 봅니다. 이런 전쟁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말씀, 곧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구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1,28)라는 말씀을 통해서 종말의 시간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 시간은 속량(=구원)과 심판의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종말의 시간을 앞두고 우리는 역사와 신앙의 교훈을 통해 누구 앞에 어떻게 서 있을 것인지 지금부터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불안과 걱정으로 허리를 굽히지 말고, 머리를 들어 세상의 표징을 읽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되새기면서 힘차고 충실하게, 밝고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마지막 그 날, 그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날이며 시간이 되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존재”(묵18,9)의 행복을 만끽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 귀의하여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빛의 편에 선다면 그날은, 그 시간은 결코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날과 시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매 순간이, 그날과 그 시간이 계속될 뿐 내일은 없습니다. 내일이 있으려니 지금 주어진 시간을 헛된 것에 탕진하고 소진하고 산다면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 사람에게는 바로 그 마지막 시간이 곧 심판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내일이면 이미 늦습니다. ‘때는 늦으리라!’ 그러기에 오늘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21,28)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마지막 날은 고통과 절망으로 끝나는 날이 아닌 기쁨과 희망으로 벅찬 새로운 날이 되리라 믿습니다. 속량의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위기의 시간에 두려워하지 않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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