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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 안드레아 사도축일 / 정인준 신부님 ~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0,9-18
형제 여러분,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복음: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주님께서 장차 당신과 함께 일할 일꾼들을 모으시지요.

갈릴리 호숫가에서 네명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지나시다가 시몬과 그이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라고 말씀하십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지요.

놀랍게도 그들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아합과 그이 부인 이지벨을 피해서 엘리야는

그 옛날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멀고도 먼 호렙산으로 도망가듯 갑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1열왕 19,16)

그래서 엘리야 예언자는 그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가까이 가서 그에게 걸쳐 줍니다.

그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며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즉시 엘리야에게 달려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1열왕 19, 20)라고 청합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고 그길로 그는 부모에게 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워서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약속한대로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

여기에 비해서 주님께서는 당시의 관습이던 겉옷을 걸쳐 주는 것도 없이 말씀으로만

바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지체 없이 주님을 따라 나서지요.

다른 기회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런 문맥으로 보아서는 주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보다도

더 단호하게 그물 뿐 아니라 부모도 떠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부모에 인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유대민족에게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모의 장례까지도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주시는 소명은 인간관계를 넘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하시는 것이지요.

사도 바오로는 잠자기 쉬운 우리에게 특별한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사도들이 갖고 있는 복음선포의 소명을 잊거나 아니면 소극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이사 52,7)라는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복음 선포자의 소명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말씀에 귀를 기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사도 바오는 이사야의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53,1)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렇지만 사도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0,17)라며 그리스도에게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 특히 바닷가에서 불렸던 이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 뽑힌 바오로도 다

주님과 말씀의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살아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복음, 편지, 묵시문학 형식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도들, 특히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도 그렇고

바오로도 성실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까지도 바쳤던 것입니다.

주님과 말씀에 대한 ‘증인(마르튀리온 μαρτύριον)’을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바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소명의 정신을 받들어 우리 자신도 그들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말씀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열정과 성실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정인준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