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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2주간 월요일 / 반영억 신부님 ~

1월 20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 히브리서 5,1-10
● 마르코 복음 2,18-22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5,1-10
1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2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4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10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신랑이 혼인 잔치 손님들과 함께 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8-22
그때에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1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반 영억 라파엘 신부의 복음 묵상 (다해)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 중요하다」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요즘 여야의 정치 논리를 보며 잇속 챙기기에 바쁜 많은 정치인이 거짓말을 밥을 먹듯이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공정한 원칙과 신뢰는 사라지고 자기 이득만 앞세웁니다. 그들을 백성을 위하는 대변자로 뽑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듭니다. 그 백성에 그 지도자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어느 세월에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가져올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할망정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정신을 망각한 과거에로의 회귀는 퇴보이기 때문입니다.

 

단식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새 가르침을 주시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의식을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 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그리고 이웃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내용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