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간 금요일 강론>(2025. 1. 24. 금)(마르 3,13-19)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의 복음강론 1) 묵시록을 보면 ‘새 예루살렘’을, 즉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2-14).” 묵시록의 묘사를 근거로 해서,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일은, ‘새 예루살렘’을, 즉 ‘종말의 하느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바오로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즉 모든 신앙인이 하느님 나라의 ‘한 시민’이며 ‘한 가족’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남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덜 중요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중요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물론 각자 맡은 직책과 직분의 차이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중요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1코린 12,12.18-20.26-27.29.)” 그러므로 자신이 맡은 직책과 직분을 내세우면서 우쭐거리면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맡은 직책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져도 안 됩니다. 3)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도 그렇고, 사도들을 교회의 ‘주춧돌’로 삼으신 일은,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3-17).” 주춧돌이 건물의 가장 아래쪽에서 건물을 떠받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사도들은 교회 공동체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공동체 전체를 섬기는 이들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고위 지도자의 자리가 ‘높은 자리’로 보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그런 것이고,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낮은 자리’입니다.> 4) ‘낮춤, 섬김, 사랑’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고, 교회 밖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일이고, 세상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말씀은 ‘섬기는 사랑’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신앙을 증언하라는 명령인데, 사실상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입니다. -송영진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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