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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5주간 토요일 / 오상선 신부님 ~

 

 

우리는 육을 지닌 약한 존재들이라 쉽게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비정상은 아니겠지요. 문제는 유혹에 빠진 것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자신을 합리화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하느님께 딱 걸린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 보면 좀 불쌍하기도 합니다. 

 

아담도 그렇지요. “그깐 열매 하나 따 먹었기로서니 그게 뭐 그토록 큰 죄인가요. 하와가 따 주니 안 먹을 수도 없고 그래서 먹었기로서니.” 하와도 마찬가지지요. “뱀이 따 먹어도 된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먹었을 뿐이라구요.”(창세 3,9 이하 참조) 

우리도 이렇게 핑계를 대며 항변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유혹에 빠질 수 있되, 핑계는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실 때, 그저 겸손하게 “예, 주님, 제가 그랬습니다. 저의 잘못입니다. 다른 사람은 잘못이 없습니다. 저를 벌하여 주세요.”라고 고백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 어떤 죄와 허물도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비와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우리를 사랑으로 따뜻이 안아주시고 위로해 주실 그런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우리는 모시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사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과는 조금 다르게 나오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상황은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유받으려는 군중들이 수없이 몰려옵니다. 밥도 먹지 않고 굶어가며 주님의 가르침을 듣는데 열중합니다. 사흘 동안이나 머문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적인 가르침에 굶주려 목자 없는 양같은 이들에게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라도 먹여 보내야겠다는 마음은 가진 것 없는 제자들에겐 황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사렙다의 과부 이야기처럼, 우리 먹을 것도 모자라는데 이 많은 사람들을 먹여 보내라니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제자들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경제논리를 내세워 각자 해결하도록 돌려 보내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죠.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테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논리는 달랐습니다. "사랑은 기적을 만든다. 나눔은 나눔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상황에도 대입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진 것을 조금씩 나누기 시작하자, 50~100명씩 무리진 이들 안에서도 자기 주머니를 열기 시작했을 겁니다.

 

모두 너무도 작아서 내어놓기가 부끄러워 나눌 엄두도 못내고 있었는데, 작은 것도 감사드리고 축복하여 나누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에 용기를 내어 여기저기서 나눔판이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그 장면을 그려보니 괜시리 흐뭇해 집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콩 한쪽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하시던 말씀이 바로 이 뜻이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창세기에서 보았듯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에덴동산도 만들어 주시고 온갖 먹을 것을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늘 먹고도 남아 흘러 넘치게 풍족하게 주십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사실 온 세계의 먹거리는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을 정도로 항상 넉넉합니다.

 

그런데도 나눌 줄 모르고 많이 가진 사람이 나머지 하나마저도 다 가지고 먹으려는 그 욕심 때문에 항상 부족하게 보일 뿐입니다. 나누기만 하면 이렇게 모두가 풍족하게 먹고도 12광주리나 또 7광주리가 남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빵의 기적을 두 번이나 목격한 제자들마저도 먹을 것이 문제가 생기면 걱정부터합니다. 이것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8, 21)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누기만 하면 된다는 것.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에 직접 나누어주도록 하신 것은 그래야 확실히 체험적으로 알게 될테니까 양성적 차원의 배려였을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내가 가진 것이 적다고 실망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맙시다. 사실, 많이 가진 부자들이 많이 나눌 것 같지만 천만에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부자들은 자기 위신을 세울 때만 남이 보라는 듯이 나눕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칭찬하셨던 그 가난한 과부처럼, 적게 가진 사람들이 나눔에 있어서는 대부분 훨씬 뛰어납니다.

 

왜냐하면 가진 자들은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나눌 여유를 못가지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콩 한쪽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풍요로운 물질문명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삶이 더 팍팍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바로 나눌 줄 아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가난하게 이 세상에 오셨고 가난하게 사셨으며 가난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분을 우리의 주님이요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바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 스승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고 싶었던 분이시죠.

우리가 가진 것이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이 좀 많다하여도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항상 있고, 내가 가진 것이 적다하여도 나보다 더 적게 가진 사람들도 항상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고, 내가 스스로 잘 나누도록 그분은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그것이 내가 참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멋진 아들딸로 사는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