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수요일 강론>(2025. 2. 19. 수)(마르 8,22-26)
복음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의 복음강론 『되돌아가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한 번에 고쳐 주시지 않고 단계적으로 고쳐 주신 것은, 우리의 신앙이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눈먼 이를 고쳐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마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 마을에 무슨 문제가 있었다고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는 말은, ‘안수’를 해 달라고(고쳐 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병자나 장애자든지 간에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또는 예수님께서 손을 대기만 하시면, 다 낫게 된다는 소문을(마르 6,56)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신 것이고, 보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은, “병을 잘 고치는 의사”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동작으로 고쳐 주신 것은, 믿음이 없는 그에게 믿음을 심어 주기 위한 배려라고 해석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라는 말씀은, ‘보는 일’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고쳐 주시는 것까지만 해 주시고, 보는 것은 각자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보여 주시고, 그 길로 인도해 주시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마라.”, 즉 “이제부터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이고,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입니다. <그가 죄 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고, 모르고 있었으니까 안 믿고 있었고, 복음을 들을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1-24).”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예수님을 만나서 ‘새 인생’을 살게 되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서 아무것도 안 하면,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생명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멈추어 서는 것은 사실상 뒤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 같은 말을 하지만, “예수님은 걸레를 깨끗이 빨아서 새 옷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걸레’로 되돌아갈지, ‘새 옷’으로 살아갈지, 그것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3) 복음서의 다른 이야기들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와 비슷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0-11)”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요한 8,4) 예수님께서는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자를 용서하시긴 했는데, 그 용서는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입니다. 만일에 그 여자가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때는 ‘가중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있는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4-16).” ‘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박해자들에게 예수님을 신고했습니다. 그것은 받은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입니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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