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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6주간 수요일 / 이영근 신부님 ~

연중 제 6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눈먼 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먼 이’란 어떤 사람일까?

 

눈이 감겨 보지 못하는 이뿐만 아니라, 눈이 열려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곧 어둠에 덮여 빛을 보지 못하는 이를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서 가시로 찔러 상처를 주는 것으로 알며, 불이 주변을 환히 밝혀줌을 보지 못하고서 태워 상처 입히는 것으로만 아는 것과 같습니다. 곧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온 구원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 1,5), 자신의 어둠에 갇혀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곧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바로 ‘눈먼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포함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 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깊어가면서 ‘영의 눈’이 밝아져갑니다. 이는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 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당신의 침’을 바르십니다. 이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마르 7,31-37)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혀에 대신 것처럼(마르 7,34), ‘영의 도유’를 통해, 치유된 눈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당신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겉 형상의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볼 줄 알게 하소서. 나아가, 그 사람 안에 구원을 펼치시는 당신의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풀 한 포기에서도 당신의 능력을 보게 하시고, 베푸신 자비를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제 행복은 오직 당신을 뵙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 뵙겠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