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명연신부님의 글

~ 사순 제 2주간 목요일 / 조명연 신부님 ~

2025년 3월 20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019년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5년마다 발표되기에 올해 2024년 생활시간조사가 발표될 것입니다)를 보면 수면과 노동시간을 제외하고 1인 가구 청년(19~34세)의 경우 하루에 3.9시간을 혼자 있지만, 노년(65세 이상)이 되면 7.6시간을 혼자 보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중장년을 거쳐 노년으로 갈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의 경제적 빈곤 못지 않게 관계 빈곤이 이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된다고 말합니다.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관계의 부재로 외톨이가 되는 것은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게 합니다. 실제로 우울증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따라서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할 수도 있지만, 길게 바라보면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이 잘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의 이 말이 와닿습니다.

 

“나는 이 세계에 소속되어 있어요. 필요한 만큼, 그리고 분리돼 있어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김희경, ‘에이징솔로’ 중에서)

‘홀로’와 ‘함께’. 모두 각자에게 중요한 가치가 됩니다. 홀로 하느님과의 만남도 중요하고, 또 함께 하느님과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상처받았다고, 바쁘다고 ‘홀로’ 그 자체에 머물면서 스스로 힘든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함께’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고,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인생 역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곁으로 가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는 것은 부자의 모습입니다.

 

부자가 악인 같습니까? 죄와 엄청나게 친한 사람이었고, 착한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생전에 잔치를 많이 벌인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 거지인 라자로를 냄새나고 더럽다고 쫓아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승에 가서도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악인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저승에서 고통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외되는 ‘함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과의 ‘함께’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소외되는 ‘라자로’를 개들이 종기를 핥고 있을 정도로 무시하는 데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함께’를 다시 재조정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함께’가 될 수 있도록 더 신경 써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위한 ‘홀로’는 절대 안 됩니다. 모두와 사랑을 나누는 ‘함께’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호프 자런).

 

사진설명: 부자와 라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