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사람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과연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후반부 말씀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사람이, 내가 문제입니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뿐 문제아問題兒요 살아 있는 생물生物의 나는 나도 모릅니다. 정치 역시 생물이라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결국 하느님 중심의 삶에로 귀결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끊임없는 기도의 삶이,회개의 삶이 답입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요, 역시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가 좋은 깨달음을 줍니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면 설사 세상이 나를 돕지 않아도 하늘이 나를 돕는다.”<다산>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임했으니 두 마음을 품지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시경>
정말 이런 믿음으로 사는 자가 하느님 중심의 올곧은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갈림없는 순수한 한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두 삶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과연 나는 어느쪽입니까? 하느님을 떠난 무지한 나 중심의 삶을 사는 자에 대한 묘사요, 이사야를 통해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 떠나 있다.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이런 내면의 삶이라면 아무리 좋은 외적 환경이라도 내면은 지옥일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삶을 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없는, 하느님을 내내 잊거나 잃은, 생각이 없는, 영혼이 없는, 의식이 없는 순전히 무지한 자기 중심의 욕망 추구의 육적 삶을 사는 이들이 그러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가 그러합니다. 부자의 내면이 이러할 것입니다만 그는 이것도 모를 것입니다. 모르는 이는 알려줘도 모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의 지혜에 이르기는 참 가깝고도 한없이 먼 길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림같은 선명한 대조가 우리의 생각을 묻습니다. 어떤 부자는 익명인데 가난한 거지는 라자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라자로 이름 뜻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를 뜻하며 ‘가난한 이’에게는 잘 들어맞습니다.
정말 어떤 부자가 사람이었다면 그에게 구원의 표징과도 같은 라자로와 나눴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상실한 괴물같은 어떤 부자에게 라자로는 그냥 하나의 사물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이런 가난한 이웃들과 무관한 익명의 괴물같은 내면이 황폐된 부자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하느님 중심의 구원의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린 사람이 진짜 행복하고 자유로운, 내적 부요의 살아 있는 참 사람입니다. 이런 뿌리없이, 중심없이 표류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세상입니다. 삶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이런 믿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어떤 부자가 이러했을 것이며, 반면 외관상 가난했던 문앞의 라자로는 역설적으로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린 가난한 부자요, 내적 자유와 평화를 누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사후 이들의 처지는 완전히 바뀝니다. 불길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어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호소합니다. 아브라함 곁에는 라자로가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요 회개요 사랑의 실천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으니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형성된 단절과 불통의 구렁입니다.
어떤 부자는 다급하게 라자로를 자신 집에 보내어 다섯 형제가 고통스러운 이곳으로 오지 않도록 경고하게 해 달라고, 그리하여 그들이 회개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지극히 냉철합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회개가 어려운 무지로 굳어진 완고한 마음들인지 오늘날 불신의 사람들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연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 나는 누구인지 거듭 묻게 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와 배움을 통한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줍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순 제 2주간 금요일 / 송영진 신부님 ~ (0) | 2025.03.21 |
---|---|
~ 사순 제 2주간 목요일 / 한창현 신부님 ~ (0) | 2025.03.20 |
~ 사순 제 2주간 목요일 / 이영근 신부님 ~ (0) | 2025.03.20 |
~ 사순 제 2 주간 목요일 / 조재형 신부님 ~ (0) | 2025.03.20 |
~ 성 요셉 대축일 / 한창현 신부님 ~ (0) | 2025.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