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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 호명환 가를로 신부님 ~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왜 관상 안에 머물러야 하는가?

 

하느님의 숨

2025.03.23. 21:27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23일 일요일 (호명환 번역) 열세 번째 주간: 향심(centering)과 침묵(silence), 고요(stillness)

 

관상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들의 진리를 온전하게 바라보게 해 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관상의 수양이 지니는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관상은 보는 것이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는 바라봄입니다. 왜냐하면 이 바라봄은 인식하는 것과 그 가치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감사함)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관상적 정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말해 주지 않고 우리가 주시하는 것을 제대로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관상은 존재들의 진리를 온전한 상태로 바라보게 해 줍니다. 이것은 정신의 훈련이며 우리의 습관적인 생각의 중독에서, 그리고 통제하려는 생각을 좋아하는 정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이 훈련은 심지어 우리의 신경 계통에도 영향을 주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훈련을 통해 우리의 자그만 이분법적 정신을 믿지 않게 되고(이 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선택으로 좁혀 그 중 하나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고임), 현실을 보는 그 제한된 방식의 부적절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사실상, 이분법적 정신은 어리석게 느껴지지는 않더라도 피상적인 사고를 불러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오직 관상적인 정신 혹은 깊이 직관하는 정신만이 훨씬 더 넓고 더 멀리 펼쳐지는 지평으로 우리를 이끌고 모험을 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상상은 지식보다 더 중요합니다.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은 세상을 넓혀 줍니다." [1]

 

 

그러나 우리는 이런 관상적 정신, 즉 더 깊고 신비롭게 현실을 바라봄으로써 생명을 선물로 받게 해 주는 이 존재 방식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그리고 왜 그런 정신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실제로 그런 정신은 위대한 사랑과 커다란 고통 속에서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긴 하지만, 그렇게 넓은 시야를 갖는 순간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신은 곧바로 다시 이원론적 분석에 빠지게 되고 통제력을 다시 쥐기 위해 우리의 판단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기도의 수행 - 관상의 수양 - 은 위대한 사랑과 커다란 고통의 열매를 장시간에 걸쳐 다양한 상황 속에서 유지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많은 수양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이런 수양은 우리 삶 전체에 걸쳐 계속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매 순간을 직면하는 습관적인 방식을 잘 지켜보아야 합니다. 대개 우리는 우리의 이런 습관적인 방식을 관찰하면서 굴욕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우리가 주로 몇 가지 예상 가능한 반응으로 모든 것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반응들 중 아주 소수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순수하고 선천적이며 신선하게 바라보며 자연스러운 존경심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지닙니다. 새로운 순간에 대해 우리 인간이 하는 반응들 대부분은 불신과 냉소주의, 두려움, 조건 반사, 무시, 그리고 과도한 판단이 주를 이룹니다. 이런 반응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통제하는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이 순간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뭔가를 가르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에고가 이런 순간들을 거부하고 주어진 정보를 통제하게 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라는 사실을 보려는 용기를 우리가 가질 수 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아주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이런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존재해 합니다! 이때 우리는 참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간이 우리를 가르치도록 우리 마음을 열기 위해 우리는 조금이라도 그 순간에 놀라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순간이 우리를 경이로움의 미묘한 경험을 향해 내면 깊이 그리고 우리를 넘어서서 더 높이 올라서게 할 때까지는 말입니다. 새로 시작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거저 주어지는 이 경이로움의 순간이 하나라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모든 종교적 직감과 그 여정을 위한 견고하고도 유일한 토대가 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눈물을 끌어안기(embracing tears)라는 주제는 저로 하여금 제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들어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건강 문제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제 젊은 두 아들이 저를 간호하기 위해 병원에 함께 있게 되면서 저의 건강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 아들 둘이 자기들 직장과 가정에서 떨어져 저를 보살피기 위해 보내야 했던 시간에 대해 생각하면서 저는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 느낌인지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저는 전에 없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우리 나라가 다 함께 울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Leanne H.

 

​[1] “What Life Means to Einstein: An Interview by George Sylvester Viereck,” The Saturday Evening Post, October 26, 1929, 117.

 

Adapted from Richard Rohr, Just This (CAC Publishing, 2017), 7–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xisbati, Untitled (detail), 2021,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침묵은 풀밭 위에 뻗져진 저 손처럼 지금 여기에서 살갗을 스치는 풀잎 하나하나를 단순하고 깊이 의식하듯이 현재의 순간에 깊이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