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사순 제 3주간 토요일 / 정인준 신부님 ~

3월 29일 (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6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자신을 낮추는 이는 ”


우리는 흔히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썩 달가와하지 않는 말 중에서
‘고통은 인간을 성숙시킨다.’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고통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장 싫고 피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고통은
지내놓고 보면 나를 성숙시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지만 때로는 매서운 매로 나를 치시지요.
아무리 작은 고통이라도 겪을 동안에는 힘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만 그 고통 중에 있는 것 같아 입에서는 불평이 나오기 쉽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호세 6,1)

예언자는 이어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2절)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이 완전하고 신심 깊은 사람으로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기야 일 주일에 두 번 단식하거나 십일조를 낸다면 그는 보통 신심이 깊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자신을 사람들에게 더군다나

하느님 앞에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하나의 인간의
의무와 윤리로만 따지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고 다 율법 중심으로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따뜻하고 숨쉬는 인간의 모습, 하느님과의 사랑의 모습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철저하게 조절되는 법 조항이 있을 뿐입니다.

세리는 이와 반대로 사람이나 하느님에게 드러낼 것도 내세울 것도 없지만 그에게는
하느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리사이와 세리에게서 다른 것이 있다면 바리사이는 자만심과 교만이 있고
세리에게는 겸손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봉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드러내고 싶거나 내가 ‘이런 사람이다.’라는 사람은 인간적으로는 내세울 것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이마저도 사실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드러내면 끝인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누가 알아주던 말던
조용히 자기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봉사고 공동체에 보탬이 되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더 사랑하시겠어요? 사람의 성숙이 덜 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듣고 보면 ‘자기 자랑하는 사람’을 보면 걱정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사실 진정한 봉사자이고 하느님은 물론이지겠지만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죄인까지 포용하시는 주님이시지만 바리사이들의 자만과 독선에 대해서는
엄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기로 끝나지 않으시고 바로 소외된 이들을 업신 여길 뿐 아니라
자기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릇된 성서해석으로 백성들을 잘못으로
몰아 넣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정인준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