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4주일은 ‘장미주일(기쁨주일)’이라고 불립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사순절이 지향하고 있는 부활의 희망과 기쁨을 전해줍니다.
오늘 <입당송>에서는 노래합니다.
“즐거워하여라.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참조)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기쁨의 파스카 축제를 지냈고, 그 다음 날에는 만나가 멈추고 그 땅에서 난 음식을 먹었음을 전해줍니다(여호 5,10-12 참조). 이는 부활과 함께 먹게 될 생명의 양식을, 나아가서 하느님과 함께 벌어질 천상의 식탁을 미리 암시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게 된 기쁨을 전해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기쁨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밝혀줍니다. 흔히, 이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혹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로 불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두 탕자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에서,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차이는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어제 <복음>인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 18,9-14)와 흡사합니다. 곧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루카 18,9) 바리사이와 ‘큰 아들’이, 그리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세리와 ‘작은 아들’이 비교되며, 대조를 이룹니다.
이들은 ‘보는 눈’이 서로 다릅니다. 곧 큰 아들은 자신을 의인으로, 작은 아들은 자신을 죄인으로 바라보며, 큰 아들은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며, 작은 아들은 다른 이들을 존중하며, 큰 아들은 바라보는 곳이 자기 자신이지만, 작은 아들은 하느님과 아버지입니다.
<첫째 이야기>는 ‘돌아온 탕자 작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0,18)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성공해서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러 가는 것이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지었음에 대해 뉘우치고 통탄해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곧 ‘뉘우친 바를 행동으로 고백하는 일’에 일입니다.
바로 이 일을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을 요청합니다. 예컨대, 베드로와 가리옷 유다가 다 같이 스승을 배반하고 통탄해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돌아와 구원의 길을 갔고, 유다는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파멸의 길을 간 것과 같습니다.
<둘째 이야기>는 ‘죄도 모르고 돌아오지도 않은 탕자 큰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동생이 유산을 챙기는 바람에 함께 유산을 받았을 것입니다. 유다 법에 따르면, 큰 아들은 다른 아들의 두 배를 받으니 동생의 두 배를, 곧 3분의 2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머지 재산이 모두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으로서 섬겼습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 맞아들이지도 않으며, 그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처신에도 화내며,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며, 잔치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몰랐기에, 회개하지도 돌아오지도 않은 탕자였습니다.
<셋째 이야기>는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르하밈)와 신실하심(헤세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나는 아들을 떠나보내는 아버지는 그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그에게서 결코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처럼,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우리는 바로 이 아름다운 장면의 주인공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저희가 이 자리에 이렇게 있을 수 있음은 바로 당신께서 저희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온갖 죄와 허물과 탓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저도, 결코 저희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단지 죄를 용서하신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죄를 덮어주고 가려주고 보호해 주신 까닭입니다. 결코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결코 희망을 거두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이는 우리도 그렇게 용서하라는 뜻이요, 단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켜주고 보살펴주라는 뜻입니다. 그에게서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하시듯이 우리도 형제들을 신뢰하고 자비로워라는 말입니다. 형제에게서 결코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일이요, 희망을 놓지 않는 일이며, 결코 사랑을 거두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돌아가서
아버지께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최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품으시는
그 사랑에 안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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