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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주님 부활 대축일 / 반영억 신부님 ~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마르16,1-7)


복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7
1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2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3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4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5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6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7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서로 축하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에, 온 세상에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승리요,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감수한 수난과 십자가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선포하고 행동하신 모든 것이 옳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믿음을 지탱하는 기둥이며, 모든 희망을 받치고 있는 머릿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스승을 잃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슬픔을 거두어 주었습니다. 온갖 조롱과 모욕을 받으면서도 한마디 변명도 없이 침묵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의로운 행위였다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또한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 고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부활로 동안에 보여주었던 여러 표징들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신을 몸소 생명의 빵으로 소개하며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하고 영적인 양식으로 내어주셨는데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신 간절함이 아버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의탁한 기도가 열매 맺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파멸이 아니라 사랑의 승리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또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당신 친히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새 삶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여자들이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는데 무덤의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데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마르16,6). 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시체를 만지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 금하였는데도 여인들은 상관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존경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충성스럽게 지켜봤던 사람,


그 죽음에 대해 가장 큰 슬픔과 미련을 품고 있던 사람, 계산 없이 아낌없이 값비싼 향료를 마련하여 동트기만을 기다렸던 사람,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달려간 여인에게 부활의 첫 소식이 전해진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힘도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도,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주님의 부활을 막진 못하였습니다. 우리도 무덤의 삶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둡고 침침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맑고 밝은 긍정적인 생각과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나와서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신 영원한 천상 행복의 미래를 보고 오늘을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예수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 (성 아우구스티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해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 시기, 질투, 이기심에 죽고 절제와 겸손, 온유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천한 ‘나쁜 습관 빼기, 은총을 쌓기’의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못하는데 어찌 훗날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의 닮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서 뵙게될 것입니다”(마르16,7). 하신 말씀입니다. 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공적활동을 시작하신 곳이고, 제자들을 부르고 양성하신 곳입니다. 바로 여기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시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하신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가운데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몸과 마음을 바쳐 활동하시던 예수님의 그 모습 그대로 삶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손희송).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오롯한 마음으로 섬기면서 세상에 전하고, 그분처럼 사랑으로 이웃을 아끼고 돌보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도 살아계신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지금 삶의 자리입니다. 삶의 터를 더 큰 사랑으로 빛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거듭 태어나는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다시 한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반영억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