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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령과 더불어 성경 읽기 / 호명환 가를로 신부님 ~

CAC 매일묵상

성령과 더불어 성경을 읽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6월 8일 일요일 - 스물네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관상적 독서

 

성령께서는 사랑의 시선으로 성서를 읽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신부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그리고 교회가 오늘 그분의 현존을 기념하고 있는 성령의 동반을 받아 성서를 읽으라고 격려합니다:

예수님은 자그만 것들의 의미까지도 연결하여 특정한 순간이나 개인 혹은 상황들 저 밑에 있는 의식을 넘어서 성경의 문장들이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법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이야기의 더 커다란 윤곽을 볼 줄 아시는데, 그 커다란 윤곽 안에서 하느님은 동정심 가득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분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징벌적이거나 제국주의적인("내 국가가 최고야!") 이야기나 분노적이고 배타적인 말씀들을 인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레위기 18장과 20장에 나타나는 "너희는 하지 말라!"라는 28개의 금지 사항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19,18의 긍정적인 명령을 택하시어 이 말씀이 반향을 울리게끔 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분이 인용하시는 가장 긴 말씀(루카 4,18-19)은 이사야 61,1-2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다음 말씀 - 하느님의 응보의 날 - 은 생략하시고 이 말씀으로 끝을 맺으십니다.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복수를 선포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믿음을 지닌 모든 이에게 가르치시는 바입니다. 즉 성서(그리고 삶의 경험들)를 사랑의 시선으로 읽는 법을 가르치신다는 말입니다. 관상의 실천은 행간과 줄간을 읽을 수 있는 제삼의 눈을 갖게 해 주고 언제나 포용성과 자비, 그리고 정의를 향해 나아가게 해 주는 끈을 찾게 해 줍니다. [1]

성경의 계시는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이는 계시에 관한 것이지 원칙을 연기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기에 우리 스스로 다다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거기에 있을 수만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근본적인 하느님-안에-존재하는 것은 믿기도 너무 어렵고, 그것이 진리라고 하기에도 너무 선해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한 이들만이 그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은총은 우리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긍정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저는 우리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하나의 완전한 책으로 연결시켜 읽을 것을 권고합니다: 즉 시작과 중간과 끝이 다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이야기 문집으로 읽기를 바랍니다. 말하다면 성령께서 이끌어가시는 하나의 책으로 읽어 보시라는 말입니다.

제가 여기서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독자의 의식을 일깨우시는 영감을 받아 성서를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더없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영의 가난함"(마태 5,3)으로 성서를 읽을 때 성경의 문장들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자 역사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설명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격을 지닌 사람으로서 성서를 읽게 되면 불행하게도 우리는 하느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성경의 문장들 안에서 절대 바뀌지 않으시는 분이시지만, 우리는 그럴 수 있습니다. 쓰인 말씀들은 그 말씀들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는 한에서 정확하게 영감이 되는 말씀들이어야 합니다. 저는 inspire(영감을 주다)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합니다. 즉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어 우리를 더 큰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만일 쓰인 말씀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숨을 불어넣어 주어 우리를 더 큰 생명이 되게 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 말씀들은 절대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말씀들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영감을 주는 온갖 말씀들을 믿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지만, 그 말씀들은 어쩌면 생명력이 없는, 즉 아담의 코에 불어넣어 주신 숨(창세 2,7)이 존재하지 않는 말씀들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만 나를 공경한다."(이사 2,13).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와 예수님은 똑같이 이것을 "입술만으로 하는 공경"(이사 29,13; 마태 15,8)이라고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침묵과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균형 있게 실천하는 저의 일상 수양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매일 20분간 고요한 시간을 가지며(물론 저에게 쉽지 않은 시간이지만...) 이 수양을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서 렉시오 디비나를 하고, 그 다음에 CAC의 매일 묵상을 읽습니다. 낮동안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단순하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해 달라고 청하거나 성령의 인도를 청하지만, 대개는 솔직히 불평을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과 저의 상호 관계는 솔직히 제가 너무도 부족하기에 늘 하느님께 인간적으로 매달리며 애정을 청하고 질문을 드리기도 하지만 그저 저를 내맡길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 관계가 적어도 제 마음을 여는 그런 관계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제가 밤이 되어 베개에 머리를 댈 때는 이 하루를 성찰하며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Connie V.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Hierarchy of Truths: Jesus’ Use of Scripture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14).

[2] Adapted from Richard Rohr, Things Hidden: Scripture as Spirituality, rev. ed. (Franciscan Media, 2022), 28, 2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nnie Spratt, untitled (detail), 2018,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의 고요한 증거를 통해 말씀과 이미지가 연결되는 문턱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내면의 눈으로 깊이 바라보고 성령께서 우리 주의를 이끌어 조용하게 꽃을 피우도록 초대해 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