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마태 5,38-42)
제1독서
<우리를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6,1-10
형제 여러분,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이 직분이 흠잡히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6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9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10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다른 뺨마저”
우리는 매일 생활하면서 좋은 일도 있지만 때로는 참기 힘든 일도 겪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모욕일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데, 오해를 받아야 하고 억울한 일을
겪으면서도 해명할 기회도 없을 때 우리는 끝없는 분노가 치몰고 거르지 않는 감정에 사로 잡 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용하고 마음을 추스르는 안정된 분위기가 되어 십자가의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면 그제야 제 정신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 모욕이 크다해도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주님 모습과 비교가 되겠어요?
매 맞으시고 모욕을 당하시는 그리고 골고타의 십자가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신 주님의
혹독한 모습을 뵈오면 지금 나의 고통과 수모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어렵고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을 하십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전형적인 법인 탈리오 법,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구약율법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을 근거로 ‘새로운 법’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라는 말씀은 이해하기조차 어렵거니와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해코지한 것을 그대로 갚아주는 ‘복수동태법’이 오히려 논리적이고
알아 듣기가 더 쉽습니다.
주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대사제 한나스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대사제에게 대답하시는 것이 불손하다고 주님의 뺨을 때립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18,23)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런 것을 미루어보아 주님께서 무조건, 비겁하게 뺨을 돌려대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른 것, 다시 말해 정의를 바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뺨마저 돌려 대시지는 않았지만 결국 한나스에게 그리고 빌라도에게
심문과 모욕을 받으시고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에게 다른 뺨의 의미는
고통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조건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신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을,’ 또 ‘천 걸음을
강요하는 자에게는 이 천 걸음을 가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마지 못해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라고 말씀하신 것과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위에서 말씀 뿐 아니라 손수 그 모든 것을 실행하시며
마감하신 것이지요.
우리도 인색하게 살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사랑의 마음으로 넉넉한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삽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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