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전한 사랑, 거룩한 사랑, 건강한 사랑
“주님 ‘사랑의 샘’이 되십시오”
‘완전한’ 보다는 ‘온전한’이 좋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요 건강한 사랑입니다. 온전함(wholness)과 거룩함(holiness)은 영어 발음도 같습니다. 사랑을 살아서 사람입니다. 사랑-삶-사람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사랑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 배워야 하는 사랑이요, 그래서 사랑에는 영원히, 여전히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며칠전 한 자매가 수도원을 방문하고 떠나면서 배밭에서 찍어보낸 크기가 다른 메꽃 세송이가 참 청초한 사랑을 상징하는 듯 하여 많이 나눴습니다. 이에 대한 두분의 답글을 나눕니다.
“연분홍 메꽃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야생화입니다. 항상 수줍은 듯 곱게 피어나는 메꽃을 보면 늘 고향같은 기분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5-6세)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길을 가는데 너무 예뻐서 아버지께 물으니 ‘메꽃’이란다 하시며 웃으셨던 모습이 이 나이에도 아련히 추억속에 남아 있습니다. 사진속에 메꽃이 정말 반갑고 예쁘네요!”
부녀간의 사랑이 참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화(詩畫)같은 장면의 귀한 답글 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부녀간의 사랑이 있을까 싶습니다. 또 한분의 메꽃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병든 사랑, 병든 세태에 대한 탄식의 답글도 전적으로 공감하여 읽었습니다. 이 두분들 다 제 나이 또래의 자매들입니다.
“희망의 메꽃 세송이 가슴에 달았습니다. 역시 희망은 밝고 곱게 피어나는 웃음꽃이네요. 신부님, 걱정입니다.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아이들은 안지 않고 강아지를 안고 다녀요. 자식들 품에 안아서 뽀뽀하지 않고 강아지를 부비부비 어르고 입맞추고요.
자녀들과 대화 않고 강아지에게 자신이 엄마라며 쉬지 않는 대화로 소통도 사랑도 자식보다 사람보다 몇배나 더 느낀대요. 기가 막혀 헛웃음 짓는데 이젠 챗gpt가 날아다녀요.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설레발 판치면서 우상숭배까지 하네요.”
병든 사랑, 병든 세태를 반영한다 싶습니다. 강남동네는 거대한 ‘정신병동’이라는 혹자의 책이름도 생각납니다. 챗gpt 인공지능이 대세인 듯 하나 경계심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흡사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환호하는 마음 보다는 웬지 인류문명의 종말이 가까워지지 않았나 하는 불길한 의구심까지 듭니다. 도대체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깨어 있는 참사랑’을 촉구합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을 경계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다산>
“남용이 <백규> 구절을 날마다 세 번씩 외우자, 공자가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논어>
참사랑을 할수록 자존감 높은 정체성 또렷한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메꽃하면 오래 전 자작시도 잊지 못합니다.
“이 가지 저 가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늘 가는 여정의 다리로 삼아
분홍색 소박하게
하늘 사랑 꽃 피어내며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메꽃!”<1997.8.27.>
28년전 메꽃이 해마다 계속되고 어김없이 올해 여름철 3개월도 계속될 것입니다. 내친 김에 또 하나의 오래전 자작시 소개합니다.
“임오시면
달맞이꽃
청초한 연노랑 저고리에
메꽃
소박한 연분홍 치마
달개비꽃
은은한 연보라 고무신
해드리고 싶네
임오시면”<2000.7.16.>
누구나의 영혼 깊이에는 끊임없이 연분홍 청초한 사랑 메꽃들이 피어납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병든 사랑이 아니라 온전하고 건강한 참사랑입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이요, 만병통치약이 사랑이요 만병의 근원은 사랑 결핍에서 시작됩니다.
사랑중의 사랑이 하느님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하지 않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이기적 끈적거리는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 깨끗한 사랑입니다. 세상의 소금같은 사랑, 세상의 빛같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로 전 대당명제의 최종 결론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느님 눈높이의 사랑을 하라는, 이처럼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수준이 높습니다. 예수님 눈높이, 하느님 눈높이로 업그레이드된 사랑을 명하시는 주님입니다. 내 눈에 원수와 박해자이지 하느님 눈엔 다를 수 있습니다. 또 원수와 박해자들 뭔지 모를 까닭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상처받은 사랑, 결핍된 사랑일수도 있고, 내탓없이 타고난 무의식적 잠재한 내적 성향도 있을 것이나 그 원인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존재 자체에 대해 연민과 존중과 배려의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하느님 아버지를 롤모델로 멘토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유유상종의 사랑은, 자기 친한 형제동료들에게만 인사하는 사랑은 누구나 합니다. 이런 사랑이라면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는지요? 오늘 복음의 최종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사람들에 대한 신뢰의 기대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오늘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바오로의 둘째 서간에서도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배웁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모교회 예루살렘을 도운 마케도니아의 코린토교회를 극찬하며 더욱 사랑에 분발할 것을 촉구합니다.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온갖 열상에서, 또 우리의 사랑을 받는 일에서도 뛰어나므로, 이 은혜로운 일에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아가페 사랑의 영원한 롤모델은 예수님입니다.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그 가난으로 우리는 부유하게 되었고, 이 부유한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내 사랑인 듯 하나 실은 예수님의 사랑,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사랑의 샘이 되어,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연중 제 11주간 목요일 / 송영진 신부님 ~ (0) | 2025.06.19 |
---|---|
~ 연중 제 11주간 목요일 / 정인준 신부님 ~ (0) | 2025.06.19 |
~ 연중 제 11 주간 화요일 / 이영근 신부님 ~ (0) | 2025.06.17 |
~ 연중 제 11주간 화요일 / 조재형 신부님 ~ (0) | 2025.06.17 |
~ 연중 제 11주간 화요일 / 전삼용 신부님 ~ (0) | 2025.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