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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성인의 꿈과희망

[스크랩] 첼라노의 프란치스코 전기 (1) 책머리에

 

첼라노의 프란치스코 전기 (1) 책머리에

 
1. 저자, 토마스 첼라노(Thomas Celano) 
아씨시 성 프란치스꼬의  최초의  전기 작가인  토마스 형제는  중부 이태리의 조그마한 도시 첼라노(Celano)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를 
언제나 토마스 첼라노라고 부른다. 그의 출생년도는 확실치가 않다. 바티칸에서 발간되고 있는 월간지「교회」(Eccelesia, 1960년)에서 
한 작가는 토마스 첼라노의 출생년도를 1185년으로 잡고 있다. 이것이 비록 확실한 것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비교적 근사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생애를 여러 면으로 고려해 볼 때 12세기 말경에 출생했음이 확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토마스 형제가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한 시기는 대개 1213년에서 1216년 사이로 추정되고 있으며, 아마도 1215년이 아닐까 보고 있다.
이러한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제1생애 56번과 57번에서 자기의 입회 시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그는 프란치
스꼬의 모로코 선교여행의 실패를 이야기하고, 이어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에 따라 새로운 입회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프란치스꼬의 선교계획과 순교에 대한 열망을 꺾으셨다는 해석을 넌지시 비치고 있다 : “그러나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염두에 두기로 하신 선하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프란치스꼬가 멀리 스페인까지 여행 했을 때 그에게 
정면으로 맞서 더는 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발병(發病)케 하시어, 그가 떠났던 여행에서 다시 불러 오셨기 때문이다.” 이어서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꼬가 금방 뽀르찌웅꿀라에 도착하였고, 얼마 안 있어, “교육도 받았고, 고매한 인품을 지닌 사람들이” 그에게 
합세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대부분 학자들은 토마스 형제가 이들 중의 하나였다고 보고 있다. 프란치스꼬 가 스페인에서 뽀르찌웅꿀라
로 돌아온 시기는 1214년 초(初)일 것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토마스는 교육을 많이 받은 귀족
들과 함께 수도원에 들어온 것이다. 어떤 이는 그가 입회하기 전에 이미 신품을 받았으리라 보고 있다.
그가 프란치스꼬회 회원이 된 몇 년간의 이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그의 생애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에 관한 소개 자료는 
지아노의 요르단 형제 연대기뿐이다. 요르단 형제는 거기에서 1221년에 독일에 형제회를 설립할 때에 그 설립 요원으로 선발된 형제들 
중에 후에 “성 프란치스꼬의 제1 전기와 제2 전기를 쓴 토마스 첼라노”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설립 요원들은 1221년 아씨시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선발되고 나서 약 3개월 후인 1221년 9월에 독일로 떠났다. 그들은 10월 16일에 독일의 아우그스부르그에 도착하였고, 
인솔자는 스페이어의 체사르 형제로서 총회에서 독일 관구의 초대 봉사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이듬해 1222년에 체사르 형제는 관구 
총회를 보름즈에서 개최했고, 이 총회에서 토마스 첼라노 형제가 마인쯔와 보름즈와 쾰른, 그리고 스페이어의 보호자 형제로 임명되었다. 
1223년에 체사르 형제는 자기가 아씨시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올 동안 독일 관구 봉사자 대리로 토마스 형제를 임명하였다. 
이 총회는 체사르 형제를 봉사자 임무에서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삐사의 알베르또 형제를 임명하였다. 
토마스 형제는 1223년 9월 8일까지 독일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이유를 요르단 형제는 그가 9월 8일에 스페이어에서 열린 관구 총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에 그가 보호자 직책에서 물러난 듯하다. 요르단 형제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에 독일 관구는 
네 명의 보호자를 두게 되었다고 한다. 토마스는 이때 임명을 받지 못하였다. 아마도 토마스 형제는 이때에 곧바로 독일을 떠나 이태리로 
귀국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더 이상 그의 이름은 독일 관구와 관계되는 일에서 오르내리지 않고 있다. 그의 이름이 이태리에 
다시 나타나는 것은 조금 지난 후이다. 
토마스 형제는 성인의 마지막 2년간의 생활과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그가 성인의 마지막 몇 년간 특히 1224년에서 
1226년간의 생활을 소상하게 적고 있는 것은 자기 경험도 약간은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 다른 형제들에게서 성인
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얻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228년 7월 16일에 있었던 성 프란치스꼬의 시성식 장면을 묘사한 것을 보면 너무도 
세밀하여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고 보면 시성식이 있기 전에 이미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성인의 생애
를 집필하라는 위임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1230년에 토마스 형제는 아씨시에 살았다. 지아노의 요르단 형제가 라인(Rhine) 관구 봉사자 오또(Otto)를 대신하여 총봉사자 빠렌띠
(Parenti)와 함께 토마스 형제를 방문한 것이 이때이다. 이때에 토마스 형제가 성인의 유물 몇 점을 독일로 가지고 가도록 요르단 형제
에게 주었다. 프란치스꼬의 유해를 아씨시의 성 지오르지오 성당에서 새로 건립된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으로 이장할 때에 그 예식에 
토마스 형제가 참석했던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후 14년 동안 토마스 형제가 어떻게 지냈는지는 프란치스꼬회 초기 역사자료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는 1224년 제노아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제씨의 끄레쉔찌우스 총봉사자(1244-1247)로부터 성 프란치스꼬의 제2 생애를 저술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리하여 총봉사자는 성 프란치스꼬와 관계되는 모든 자료나 기적들을 모아서 자기에게 보내 달라는 협조를 모든 형제들에게 요청했다. 
이에 대한 형제들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다. 토마스 형제는 성 프란치스꼬의 제2 생애를 저술하는 데에 바로 이 자료들을 사용하였다. 
몇 년이 흐른 뒤, 1250년 가까이 이르러 토마스 형제는 당시에 새 총장이 된 빠르마의 요한 형제(1247-1257)로부터 성 프란치스꼬에 대한 
저술을 또 하나 요청받았다. 이때에 저술된 책이「복되신 프란치스꼬의 기적 모음집」(Tractatus de Miraculis B. Francisci)이다. 
저술 시기는 1250년에서 1253년 사이가 된다. 아마 이때에도 토마스 형제는 제2 생애를 저술할 때와 마찬가지로 아씨시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성녀 글라라 전기를 쓴 시기인 1255년과 1256년에도 그는 틀림없이 아씨시에 있었다. 성녀 글라라의 생애는 교황 
알렉산델 4세(1254-1261)의 주문에 의한 저술이었다. 
토마스 형제는 성녀 글라라의 생애를 저술하기 위해 아씨시에서 보낸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말년을 마르키아 관구의 따글리아꼬쪼에서 
보낸 것 같다. 아마도 여기서 그는 바로(Varro)의 성 요한 수도원 글라라회 자매들을 지도했던 듯하다. 그는 1260년에 죽었고, 그 후라도 
해도 1260년 근처이다. 그리고 그 수녀원에 묻혔다. 그러나 글라라회 자매들은 이 수녀원을 1476년에 폐쇄하였고, 1506년에 교황 율리아노 
2세의 명에 의하여 이 수녀원은 꼰벤뚜알 형제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1561년에 토마스 형제의 시신은 꼰벤뚜알 형제들의 성당 중앙제대 
뒤에 안치되었고, 18세기 초에 꼰벤뚜알 형제들의 수도복이 입혀졌으며, 이어서 따글리아꼬쪼 성당의 중앙제대 밑에 안치되었다. 
묘지에는 다음과 같은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B. THOMAS DE CELANO S.F.D. 
SCRIPTOR CRONICAR ET SEQUENTIAE MORTUOR 
(성 프란치스꼬의 제자이며, 전기작가요 
장례미사의 연송(連頌)을 쓴 첼라노의 복된 토마스) 
사랑과 사랑과 평화의샘 http://cafe.daum.net/lcg420
출처 : 첼라노의 프란치스코 전기 (1) 책머리에
글쓴이 : jeosah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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