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역사적 가치
지난 90년 동안 이 작품의 역사적 가치성에 관하여 토론이 수없이 많았다. 의견들이 분분했으나 가장 극렬한 혹평은 폴 사바띠에르와
그에 동조하는 자들의 평가였다. 사바띠에르는 제일 먼저 토마스 첼라노가 제1 생애에서 총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고 있고, 또한
로마 교황청의 특권을 바라는 형제들을 프란치스꼬가 반대했다는 사실도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사바띠에르가 결론하는 것은
토마스가 당시에 엘리아 형제 밑에 있었고, 따라서 엘리아로부터 호감을 사려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빼버렸다는 것이다.
시에 엘리아가 총봉사직을 맡고 있었고, 또 그는 총회를 소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공사중이던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을 위하여
교황에게 특전을 요청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이것들이 내용에서 빠진 이유를 교황과의 관계로 본다. 즉, 첼라노는 당시에
교황 그레고리오 밑에서 지배를 받고 있었고, 따라서 교황이 전기의 내용으로 넣을 것과 뺄 것을 그에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평가는 확실한 것이 못되며, 그 증거를 제1 생애에서나 그 당시의 어떤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첼라노의 의도는 성인
이신 프란치스꼬의 모습을 형제회를 초월하여 일반 독자들에게 나타내 보이려는 것이었지, 결코 형제회의 역사를 서술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누락된 부분들도 성인의 모습과 관계있는 것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토마스에 대한 또 하나의 비난거리는 그의 말에 앞뒤가 맞지 않아서, 역사가나 전기작가로서 그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비난거리는 그가 제1 생애에서 다루는 엘리아에 대한 관점과 제2 생애에서 다루는 엘리아에 대한 관점이 판이하게 다른 데서 연유한다.
사실 그 상황은 이렇다. 실제로 엘리아가 언급되는 것은 제1 생애에서 6개 항목이다. 언급될 때마다 매번 엘리아에 대한 좋은 느낌이란
배경 안에서 토마스는 기록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프란치스꼬가 죽기 6개월 전 시에나에 머물고 있을 때 많은 치료가 필요
했었다. “엘리아 형제는 급히 서둘러 먼 곳에서 달려왔다.” 그가 도착하자 거룩하신 사부님이 많이 좋아져 그와 함께 시에나를 떠나 꼬르
또나 근방의 셀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프란치스꼬가 엘리아 형제에게 아씨시로 데려다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 다음 토마스는 이렇게 적는다 : “이 착한 아들은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 일을 서술하는 데에 있어서 토마스는
시종일관 엘리아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다. 제1 생애에서 언급되는 엘리아는 어디나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제2 생애에서는 이와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없다. 프란치스꼬의 총대리로서 두 번 등장하
지만 한 번은 누구인지 희미하게 드러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단순히 “또 다른 형제 하나가” 라고 언급할 뿐이다. 이어서 토마스 엘리아가
프란치스꼬의 오상을 보려는 호기심을 채우려고 얼마나 기회를 노렸는지 모른다고 서술하면서, 그가 프란치스꼬가 살아 있을 때에 성인
의 옆구리 상처를 본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마지막에 첨가한다. 그러나 토마스는 제1 생애에서 한 가지 사건을 놓고 첨가하는 마지막
논평이 너무도 차이가 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그 상처를 보기에 합당했던 엘리아는 행복하였다.” 제2 생애 전반에 걸쳐 흐르는 엘리아
에 대한 느낌이나 어조가 차갑고, 그를 얕보는 듯하다.
그가 엘리아를 보는 태도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달라졌는지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가 제1 생애를 집필할 당시에 엘리아는 형제들과
좋은 사이였고, 교회와도 좋은 사이였다. 그는 프란치스꼬를 대신하여 총대리직을 능력있게 효율적으로 수행하였다. 사실로 말해서 그는
프란치스꼬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존재였고, 그도 프란치스꼬를 존경하였다. 프란치스꼬는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엘리아에게 많이 의지하
였고, 반대로 엘리아도 프란치스꼬글 깊이 존경하였으며,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제1 생애에서 이것은 너무도 뚜렷하다.
그러나 프란치스꼬가 죽은 다음 엘리아는 성인을 기념하는 대성당을 건축하는 책임을 교황으로부터 맡게 되었고, 이일은 교황그레고리오
9세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건축자금을 각 관구에서 형제들이 부담해야 한다고 고집함으로써 엘리아는 다른 형제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일만 해도 형제들은 엘리아를 이해해 줄 수 있었고, 또 이해하였다. 건축자금을 마련하는 일을 형제들은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에게 심각한 반응을 일으킨 것은 총장으로서의 엘리아의 사생활이었다. 그는 사치스러웠고, 개인용으로 저택을 두 채나
가지고 있었으며, 말을 탔고, 자기 입맛에 맞추려고 개인 요리사를 두었으며, 형제들과는 거의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 등 말썽이 많았다.
더구나 그는 누가 보아도 확실할 정도로 총회를 개최하기를 꺼려하였다. 결국 알렉산더 헤일스, 요한 로쉘르, 하이모 화베르샴 등을 중심
으로 형제들이 그를 반대하고 일어나, 1239년 그를 총장자리에서 해임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뒤이어 엘리아는 교황청으로부터 이미
파문당한 프레데릭 2세에 동조함으로써 그 역시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하였다. 1244년 제노아에서 있었던 총회에 출두하여 해명을 하면
파문을 철회하겠다는 교황청의 성의를 묵살하고 그는 출두 명령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재차 파문당하였다.
엘리아의 이러한 생활을 볼 때, 그에 대한 토마스 첼라노의 태도 변화도 전혀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토마스가 제1 생애를 집필할
당시에 엘리아는 아주 좋은 사람이었고, 성 프란치스꼬의 좋은 친구이자 신임을 얻는 제자였으며, 6년 동안 프란치스꼬의 총대리였고,
프란치스꼬에 대한 그의 친절과 관심은 그의 행정수완만큼이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년이란 시간이흘러 토마스첼라노가 제2 생애를
집필하게 되었을 때, 엘리아는 벌써 형제들의 지지를 잃었고, 폭력적인 통치자였으며, 형제회를 저버렸고, 이어서 파문까지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마스가 엘리아에 대하여 변치 않고, 호감을 가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엘리아에 대한 토마스의 가장 적합하다
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제2 생애에서 보여준 그의 태도이다. 사실 제2 생애에서 엘리아와 프란치스꼬와의 관계 묘사는 약화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안되었던 것은 모든 형제들이 알고 있듯이 이미 엘리아는 나락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제1 생애에서
엘리아를 묘사한 것과 같이 제2 생애에서도 묘사했다면 이는 전 형제들에게 큰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다. 특별히 차이점이 보이는 것은
임종시에 프란치스꼬가 엘리아에게 내린 축복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토마스 첼라노를 비난한다든가 그의 정직성을 의심한다든가, 아니면 역사가로서의 그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려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상황의 변화에 충실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꼬리를 무는 불미스러운 일들과 파문으로 엘리아는 이미 자신과
프란치스꼬와의 관계에 먹칠을 하였으므로, 프란치스꼬를 주제로 하고 있는 제2 생애에서 엘리아를 재등장시켜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엘리아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그의 글에 들어갔다 해서 그것이 역사가로서의 그의 이름을 실추시킬 정도는 아니다. 비평가들의 말에
따른 선입견 없이 이 전기를 읽는 독자들은 오히려 이러한 사실적이고도 정확한 기록 안에서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와 초기 형제들의 생활
에 관한 토마스의 설명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꼬의 전기작가로서, 그리고 형제회의 역사가로서 없어서
는 안 될 필요불가결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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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첼라노의 프란치스코 전기 (4) 책머리에
글쓴이 : jeosah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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