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재학시절(1936)
-맨 뒷줄 오른쪽 추기경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재학 시절(1936)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추기경.
"초등학교 3학년 때이던가 4학년 때이던가, 어머니는 처음으로 손위 형님(동한)과 내게 '신부가 되라'는 말씀을 꺼냈다. 형님은 즉석에서 쾌히 응락했으나 나는 그러질 못했다. 아무튼 대구로 이사한 뒤, 나는 천주교 대구대목구 유스티노 신학교 부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말만 초등학교였지 초등학교 5~6학년 정도의 수업을 하면서 신부가 되는 기초 코스를 가르치는 특별 교육 기관이었다. 물론 형님과 함께 어머니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중앙일보> 1981.9.22)
일본 죠치(上智)대학 유학 시절 (1941~1943)
- 왼쪽은 동창인 박철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1941.11.8)
-앞줄 끝이 추기경
일본 유학중인 한국인 신부.신학생 모임 (1943.11.20)
-앞쭐 왼쪽 안경 쓴 이가 김정진, 그 옆이 최석우, 뒷줄 가운데 안경 쓴 이가 추기경, 그 왼쪽이 최익철(이상 신학생), 맨 오른쪽은 한공렬 신부
가족사진 (1944.1)
-앞줄 가운데 추기경의 이모님과 어머니(안경 쓰신 분), 뒷줄 왼쪽 부터 셋째 형님(필수) 내외, 추기경, 넷째 형님(동한, 당시 신학생), 큰 누님, 작은누님
"우리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일학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별로 많지 않은데,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셨다. 우리 어머니는 본시 성품이 곧으신 분이셨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었다. 특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비 없는 자식' 이라는 말을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그만큼 자식들 교육에 엄격하셨다. …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낳은 여덟 명의 아들 딸 중 막내였다. 위의 형이나 누이들은 가난과 잦은 이사 때문에 공부를 시키지 못하셨는데 내 바로 위의 형과 나만은 그런 궁핍 속에서도 공부를 꼭 시키고 싶으셨던 것 같다. …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에는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처럼 먹이고 입히셨다. 그 대신 사치란 있을 수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같은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
(<샘이 깊은 물>, 1984.11)
역경의 시절, 학병
-앉은 이는 전석재 신부
군종 신부로 입대하는 형님 김동한 신부와 (대구 주교관 앞, 1951)
"우리는 세 살 터울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형님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신학교에 갈 때까지는 떨어져 본 일이 없다 싶을 만큼 형제요 동무였다. 나도 형님따라 2년 후에 신학교에 갔다. 그 후로 학교에서는 먼발치에서 보았고, 방학 때는 언제나 함께 지냈다.… 형님은 6·25전쟁 동안 해군 군종신부로 입대하여 5~6년 봉사하고 중령으로 제대하셨다"
(<고 김동한 신부 추모 문집>, 1993.8.5)
사제 서품을 받고 어머니와 함께 (1951.9.15)
1951년 9월 15일. 이날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세상에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겠노라'는 결정적인 대답을 한 것이다. … 그 해 69세이셨던 어머니는 '자식이 신부가 되는 게 소원' 이었던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지켜보고 계셨다. 식순에 따라 나는 두 손을 모아 이마를 받친 자세로 마루에 엎드렸다. 성가대와 선배 신부들이 불러 주는 성인 열품 도문(성인 호칭 기도)의 성스러운 메아리가 성당을 맴돌 때,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자리할실 수 있도록 나는 내 마음을 비워 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중앙일보> 1981.9.22)
대구 대목구장 비서 시절(1953.6.19)
-메리놀 외방전교회 출판부장이 대구 대목구를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 앞줄 왼쪽부터 케롤 몬시뇰, 최덕홍 주교, 메리놀 외방전교회 출판부장
어머니 서중하 여사
"어머니는 나를 낳고 기르셨을 뿐 아니라 공부를 시키고 내가 성직의 길로 가게한 분이시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때 한 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수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 내 마음에 새겨진 우리 어머니의 영상은 늙으신 모습이다. 이마에 주름이 잡혀있고 70여 년의 풍상을 겪으신 그런 모습이다. 남편과 자식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신 분. 그러나 근엄하면서도 미소도 지으시는 모습이 떠오른다. … 우리 어머니는 연세가 많아지실수록 얼굴이 더 밝아지고 미소가 많아지셨던 것 같다. 차츰차츰 삶을 믿음 속에 받아들이고 초탈해지셨기 때문일까? 혹은 당신이 원하신 대로 아들 둘을 신부로 만드시고 뜻을 다 이루셨기 때문일까? 또는 귀여운 손자 손녀들 때문이었을까? 우리 어머니는 충분히 그 자질을 갖추셨으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셨던 분, 자식들을 피어나게 하기 위해 당신은 밑거름이 되신 분이었던 것 같다. … 우리 어머니는 당신이 원하시던 대로 아들 둘이 신부 되는 것을 보시고 4년 가까이 신부인 나를 위해 함께 사시며 기도로써 도와 주시다가 1955년 3월에 향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샘이 깊은 물> 1984.11)
첫영성체 기념 (김천 성당, 1955.11.1)
교황 칙서 원본
교황 칙서(팸플릿)
주교 문장 및 표어 설명
착좌식장 전경
"저는 완월동 성지학교 마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습니다. 저의 마산교구장 재임은 2년에 불과하였고, 아무것도 업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교구를 사랑하였고, 나름대로 힘써 정성을 바쳤습니다. 저는 또 본래 외가가 마산에 있었던 관계로 마산을 소년 시절부터 자주 왔었고, 여기가 가곡 <가고파>의 본고장이라 이 고장을 좋아했습니다. 때문에 제가 마산 주교로 임명되어 왔을 때, 저는 참으로 살고 싶었던 고장에 온 느낌이었습니다"
(CBS 1982.12.5 인터뷰)
입장행렬
퇴장행렬
진해 성당 방문
착좌식이 거행된 명동 성당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명동 성당, 1968.5.29)
"당시 매스컴이나 사회의 관심은 한 개인에 대한 기대라기보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어려운 고비 때마다 '교회만은' 하는 바람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다고 봅니다. 연륜도 짧고 주교로서도 가장 막내인 제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은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그때 서울대교구는 재정을 비롯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누군가는 져야 할 짐' 이라는 생각에 임명을 수락했습니다"
(<가톨릭 신문> 1993.4.25 대담)
교황 칙서 원본
기념 상본(앞,뒤)
교구장좌 착좌
"교회는 주일만의 교회가 아니라 생활 속에 교회와 신앙을 뿌리박고 교회 안에 사회를 심어 주고 성직자는 교회 안에 교회를 심어 주어야 합니다. 현재까지 우리 나라 천주교는 신앙을 구하러 교회에 찾아오는 방식이었으나 앞으로는 사회속으로 찾아가는 자세로 교회를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경향신문> 1968.4.29)
축하식
주교단 및 내빈과 함께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 경축 미사(남산 야외 음악당, 1968.10.13)
서임식
"추기경 서임(로마 베드로 대성전, 1969.4.30 ~5.1)
"(추기경 임명 소식을 처음 들은 곳은) 일본 후지산 기슭에 있는 '작은 자매회' 수련원에서였지요. 죠치대학 재학 시절의 은사였던 게페르트 신부님께서 전화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 때 제가 처음으로 한 말은 '임파서블' (불가능하다)이라는 한마디였습니다. 교회 일로 로마에 들렀다가 일본을 거쳐서 귀국하는 길에 공항에 나가기 위해 택시에 오르기 직전이었습니다. 택시 속에서도 반신반의하면서 1킬로미터 아래쪽에 위치한 성신학교 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신자들이 꽃다발을 안겨 주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실감으로 느껴졌습니다."
(<주간조선> 1969.4.6 인터뷰)
추기경 반지 수여
추기경 서임 축하 미사(성신중·고등학교, 1969.5.20)
추기경의 박정희 대통령 방문(청와대, 1969.7.1)
박정희 대통령의 큰딸 근혜와 악수하는 추기경
김대건 신부 동상 제막식(절두산, 1972.5.14)
7.4 남북 공동 성명과 8.3 긴급 조치에 대한 메시지 발표(CCK, 1972.8.9) "본인은 7.4 남북 공동 성명과 8.3 긴급 재정 명령 등으로 소연한 현 시국에 즈음하여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여 국민의 각오와 시국에 대처할 태세 정비를 촉구하는 뜻에서 다음과 같은 소신을 밝히는 바이다.
-1. 우리는 7.4 공동 성명이 영구히 전쟁 수단을 포기하고 대화로써 조국의 통일을 달성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남북의 정치가들이 이 약속을 성실히 지키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이것을 평화를 위장한 전쟁 준비의 수단이나 권력 정치의 기만 전술로 이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민족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
-2. 최근에 실시된 8.3 긴급재정명령으로 야기된 현실 앞에서, 정부의 보호와 특혜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제를 이 지경에까지 몰아붙인 책임 있는 기업인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문책함과 동시에,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한 정부가 국가를 파산지경에 이르도록 무책임하게 영도해 온 데 대하여 피를 바쳐 나라를 지키고 땀을 바쳐 봉사해 온 모든 애국 시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항의하고 맹성을 촉구한다.
-3. 국민이 개인으로나 단체로서 국가 생활과 국가 통치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끔, 언론.출판.집회.결사.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명한 선거와 균등한 기회와 안정된 환경을 확보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만이 남북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담보임을 우리는 굳게 믿는다"
(<현 시국에 관한 메시지>, 1972.8.15)
지학순 주교와 함께(1974.7.23)
" '이분의 삶을 지배하였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사랑, 나라와 겨레에 대한 애국 애족심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 지 주교님이 유신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선 동기는 남달리 강하게 지니셨던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분은 고통받는 이가 누구이든지, 신자 비신자 관계없이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며 그들을 위하여 무언가를 해주지 않고서는 마음이 편치 못한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특히 가난과 고통이 본인의 탓이라기보다 억압 정치와 구조 악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때 이에 대한 지 주교님의 의분은 불과 같았고 정의를 위해 개혁을 위해 결연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학순 주교 장례 미사 강론, 1993.3.16)
-긴급조치 1호.4호 위반 혐의로 7월6일 구속되었다가 풀려 난 지학순 주교는 이날 '양심선언'을 하였고, 8월에 다시 투옥되었다.
목동 재개발 지역 방문(1975.5)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1975년 4월 목동의 무허가 동네에 '협조의 집'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나는 서울에 온 뒤에도 예수의 작은 자매들이 사는 곳에서 수녀님들을 자주 뵈었습니다. … 나는 이 수도회를 찾을 때마다 다른 수도회와 다른, 매우 소박하고 아주 진정 어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뤼자 아우구스타 수녀님께 보낸 서한, 1998.6.18)
사제 수품 금경축 · 은경축 합동 미사(절두산 성당, 1975.7.2)
79위 순교 복자 시복 50주년 현양대회(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1975.9.28)
"순교자들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증거자입니다. 순교는 사랑의 증거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증거입니다.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 (마태 16,25) 하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으로 우리에게 십자가위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순교자들처럼 비록 죽음을 통한 사랑의 증거는 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제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처지에서 최대로 사랑의 증거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79위 시복 50주년과 화홰의 성년을 지내면서 이 사랑의 실천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화해나 쇄신을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순교 복자들을 모범으로 삼고 외부 행사보다는 우리 자신의 내부의 쇄신에 중점을 두고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이 더욱 빛나도록 날로 더욱 정화되고 쇄신되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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