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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및 세계교회현황

[스크랩] 절두산 성지




절두산 성지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로서 현재 서울 양화대교의 북단쪽에 있다. 한강변에 우뚝 선 절두산 기념 성당은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되었다.

 

 

 


절두산 성지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 정책을 버티어 나가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만 무려 1만여 명의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되지만 그 수가 맞는지 틀리는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선참 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 "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잠두봉 또는 용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손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楊花津)을 끼고 있어 더욱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병인년인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해 오자 대원군은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 물을 서학(西學)의 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며 광기 어린 박해의 칼을 휘두른다. 당시 대원군은 일부러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에서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 근처, 곧 절두산을 택함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다.

 


절두산 성당

 

1868년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의 사건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됐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

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절두산에서의 기록에 있는 맨 처음 순교자는 이의송

일가족을, 그 해 10월 22일 부인 김억분, 아들 이붕익과 함께 함수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가를 비롯한 30명 남짓 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1996년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을 떨구었던 바로 그

자리에 순교 기념관이 섰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준다.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전통적으로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는 갓을, 구멍을 갖고 지붕 위에서 내 있는 수직의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절두산 성당 내부

 

성당 제대

 

성당 제대

 

순교 성인 28위의 지하 성해실

 

"성당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성인들의 유해" 웅장하게 세워진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 전시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선구 실학자 이벽, 이가환, 정약용 등의 유물과 순교자들의 유품, 순교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쓰였던

형구(刑具)를 비롯해 갖가지 진귀한 순교 자료들이 소장돼있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일대기 31점과 유중철 요한.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일대기 27점은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기념관

광장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 오타 줄리아의 묘, 박순집의 묘,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사적비 등이

마련돼 있기도하다. 특히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하다 .  

 

순교 성인 28위의 지하 성해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순교 성인 28위의 지하 성해실 

 


부활의 집(납골당)

 

 야외 전시장, 박해시대의 형구

 


박해시대 형구틀

 


절두산

 


마리아 상

 

1858년 성모님이 프랑스 루르드 동굴(마사비엘)에서 발현하신 것을 기념하여 세계

각국에 마사비엘을 본딴 동굴이 만들어졌다. 절두산의 성모동굴은 1978년 만들어졌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 한국 방문 기념상

 


순교자 기념상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처

김예쁜(마리아), 아들 봉익을 형상화한 듯한 이 순교자상은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몸통 위에 받쳐놓은 모습으로 처절한 순교광경을 연상시키고

있다. 1972년 최종태 교수가 제작하였다.

좌대 1.7m, 본상 2.2m

 


십자가의 길 묵상비(제 1처)

 

2001년 11월 1일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이

십자가의 길에는 교회에서 통용되는 기도문의 첫부분을 새겨넣었으며,

이곳에서 순교한 신앙의 선조들이 바쳤던 옛 기도문 '셩노션공'의

머리부분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절두산 순교성지

 

오성바위

 

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김대건 신부 정원

 

김대건 신부 동상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주년 맞아 기념 제작된 것으로, '애국선열조상 건립위원회‘가

건립한 것으로 홍익대 전뢰진 교수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1972년 김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상은 뒤에 가톨릭 대학교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

지금의 동상이 자리하게 되었다. 좌대 높이 5.8m, 본상 높이 4.35m

 

순교성지 안내판

 

순교자 기념탑

 

순교자 기념탑은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확인되는 이의송 가족을 비롯한 28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2000년 9월 20일 세워졌다. 순교기념비 주탑에는 형틀을

상징하는 조형물 아래 16명의 순교자들 모습이 새겨져 있고, 우측탑에는 절두된 머리가 올려져

있어 절두산의 지명을 암시하며, 주탑과 함께 33명의 순교자 모습이 새겨져 있다. 좌측탑은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절두산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순교자 기념탑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순교자 기념탑 

 

순교자 기념탑 

 

 순교자 기념탑

 

순교자 기념탑  

 

 

형구 돌

 

1976년 연풍 성지를 개발할 때 두 개가 발굴되어 하나는 그 자리에 두고 다른 하나는 절두산

순교성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그 후에 또 하나가 발굴되어 현재 연풍 성지에 형구돌이

두 개가 보존되어 있다. 이곳 절두산에 있는 형구돌의 크기는 둘레3m, 앞구멍 지름 30Cm,

뒷구멍 지름 6Cm, 구멍의 앞뒤 거리 30Cm로 원추형이다. 형구돌은 교수형을 집행했던 형구로

가운데 구멍으로 밧줄 올가미를 만들어 넣어 죄인의 머리에 올가미를 씌우고 반대편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머리가 돌에 부딪쳐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곳에서는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았는데, 이곳 연풍에서는 형구돌을 사용해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은언군 묘비


정조의 이복형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은언군이 강화도로 귀양가 있는 동안

강완숙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왕족이면서 사학에 빠졌으며 주신부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순교하였다(1801년 3월).

이후 신자가 아닌 은언군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송마리아의 손자가 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사면되었고, 은언군의 묘비도 세워졌다.

 

박순집 성인 묘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현양비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로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범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자기 문중 산인 관악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바오로는 10월 17일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을

이어 부친 일가족 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고개에 안장, 순교자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후 박해가 잦아들자 선교에 앞장서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부친 순교자 박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박순집에 의해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중앙성당이 세워져 있다.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진 비석 앞에서 가슴 뭉클하다

 

성 남종삼 동상

 

남상교는 남종삼 성인의 부친으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진사에

급제하여, 현풍현감, 충청 목사를 역임하고 퇴관 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남종삼은

남상교의 아들로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영향아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해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지속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프랑스인 성직자를 통해

막아보려 하였으나 대원군이 급선회함에 따라 병인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남종삼 순교사적비

 

해운당대사의 징지비(주어사)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천진암 주어사를 순례하던 중 발견-1960년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프란치스코)에 의해 발견됨-한 주어사 터 표지 비석으로, 海雲堂大師義澄之碑

(해운당대사의징지비)라 새겨져 있다. 이 비가 새워진 연대는 1698년이며, 비신 높이는

91cm, 폭은 33cm이다.

 

 

척화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이후 대원군은 1871년 4월 서울의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척화비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현재 절두산에 있는

것은 모조품이다.

 

척화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박물관  전시실 내부

 

박물관 입구 모자익

 

제 1전시실


1구역 ..... 천주교 수용과 자생적 신앙공동체 (1602~1801년)

외국 선교사들은 16세기부터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하였지만, 조선에는 아직 신앙이 전해지지 않았다.

17세기에 들어와 중국을 왕래했던 조선의 사신들이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서양 종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조선에서는 남인계열의 유학자들이 서양 학문과

서양 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이 싹터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자생적 교회로 출발하였다.

2구역 ..... 천주교 박해와 교회의 발전 (1801~1866년)

천주교가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종교로 발전하자 조선의 정치.사회.사상적으로 마찰을 빚으며

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 신자들은 교회 재건과 사제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고, 김대건 신부가 조선인 최초로 사제로 서품되면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3구역 ..... 한국의 성인.순교자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여 년 동안 끊임없는 박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흘렀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이 땅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보이지 않는 씨앗이

되어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천주실의

 

중국 명나라 때인 1593- 96년에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 리치가 편찬한 한문으로 된 책으로 중국과

서양학자가 질문 대답하는 대화체 양식으로 기술된 천주교 교리서이다. 1603년 북경에서 간행된

후에 전 한문 문화권으로 전파되어 갔고 한국 초기 교회 창설 과정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천주실의

 

마태오 리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 교회의 창설자이다. 그가 저술한 "천주실의"를 비롯한 서적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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