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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42. 고통을 준 입맞춤

[그리스도의 생애] - 42. 고통을 준 입맞춤


동산에서의 체포

라자로를 죽음에서 풀어주셨던 주님께서 이제 죽음을 감수하신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대사제들이 파견한 관리들을 앞장세웠으며 그들은 호롱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과 이교도들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체포하였다. 비록 보름달이었지만 유다는 로마 병정들이 주님을 알아보도록 신호를 해주어야 했다. 그가 준 신호는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횃불이 세상의 빛을 찾아내기 전에, 착한 목자께서는 그들을 만나러 나가셨다.

유다는 주님께서 기도를 바치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고 오셨던 이 동산에 주님과 함께 몇 번 온 적이 있었기에, 주님이 계시는 곳을 알고 있었다. 가장 고약한 배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스러운 친교 속에서 보호를 받던 자들이다. 그들만이 어두운 후에도 그리스도가 계신 곳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밤 그 동산에 있으면서 모든 사태를 목격했던 성 요한은 주님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신상에 닥쳐 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18, 4)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하느님을 피해 숨었으나, 이제 하느님께서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아담의 아들을 찾고 계신다. 자신을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예언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철저히 의식하고 죄를 보속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자발적으로 봉헌하고 있음을 아시면서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넘겨 주시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셨다. 칼과 돌로 무장하고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압도적인 위엄을 지니시고 말씀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들이 찾는 자의 이름을 대라고 명하신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자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잡아 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요한 18, 5)

그들은 "당신이요" 라든지, "당신이 바로 우리가 찾는 사람이요"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보름달인데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서 유다와 미리 신호를 - 입맞춤 - 정했다. 이상스럽게도, 악에 탐닉한 자들은 신성이 자기들 앞에 서계신데도 알아보지를 못한다. 빛이 어두운 곳을 비출 수 있지만 어두움은 그 빛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의 빛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호롱불이나 보름달로는 부족하다. 성 바오로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리워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Ⅱ고린토 4, 3-4)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나자렛의 예수다" 고 말씀하셨다. 사지를 마비시키는 두려움이 그들 모두를 덮치자 그들은 뒤로 넘어졌다. 십자가와 부활이 전혀 분리되지 않았듯이 주님의 인성과 신성도 분리된 적이 한번도 없다. 바로 조금 전에 주님은 고통을 겪으셨지만, 이제 엄위로운 주님의 신성이 빛을 발한다. 전에 한번은 주님을 체포하러 왔던 병사들이 주님의 말씀에 매혹된 적이 있었다. 주님을 잡으려던 자들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무도 당신 목숨을 빼앗을 수 없고, 주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신 것이기 때문이다. 천년 전에 시편작가는 이러한 사건을 미리 예언하였는데 이러한 일이 다윗에게 상징적으로 일어났다.

야훼여, 샅샅이 캐어 보고 알아 보소서. 속속들이 내 마음 뒤집어 보소서. (시편 26, 2)

이사야가 하느님의 어렴풋한 빛을 보았을 때 그는 "죽었다" 고 생각했으며, 모세는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제 곧 죽음을 당하게 될 인간의 육체 속에 거하시는 하느님께서 빛을 발하시자 병사들과 폭도들은 갈팡질팡 어쩔 줄을 몰랐다. 굴욕이 있을 때마다 영광의 암시를 볼 수 있다. 주님께서 겸손하게 천한 여인에게 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께서 지치시어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실 때 일어나시어 바람과 파도에게 명령하셨다. 이제 사람들 손에 당신을 넘겨 주실 때, 당신의 영광이 빛을 발하신다. 병사들과 주님의 적들이 땅에 넘어졌을 때 주님께서는 자유롭게 걸어서 피하실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랑이 인간을 풀어 주기 위해 스스로를 속박하는 "때"이다.

자아 희생은 복수할 길을 찾지 않는다. 유다와 다른 사람들은 주님께서 당신을 그들 손에 넘겨주시지 않으면 그분을 체포할 능력이 없었다. 적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을 때,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유일한 관심은 당신 양들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 버려 두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요한 18, 8)

주님께서는 홀로 희생을 당하러 가셔야만 한다. 구약성서는 대사제가 희생제물을 봉헌할 때는 혼자 바쳐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그가 성소에 들어 가 예식을 올리고 나올 때까지 아무도 만남의 장막 안에 있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그는 자기와 자기 집안과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벗기는 예식을 올려야 한다.(레위기 16, 17)

지금은 주님의 때이지 사도들의 때가 아니다. 사도들은 나중에 주님의 이름으로 고통을 당하고 죽을 것이지만, 성령의 비추임을 받고 나서야 비로서 구속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홀로 포도주통을 밟으실 것이다. 사도들은 아직 주님과 함께 죽을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잠시 후에는 그들 모두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먼저 고통을 당하시고 나서야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구속적 죽음의 전체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람들은 가게 놔두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게쎄마니 동산에 들어 가실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깨어 기도하라" 고 하셨다. 베드로는 이제 기도대신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차고 있던 두 칼중에 한 자루를 뽑아 대사제의 종인 말코스를 쳤다. 홧김에 칼을 잡은 베드로는 착한 어부였기 때문에 고작 말코스의 귀를 잘랐을 뿐이다. 베드로의 열의는 정직하고 선의에서 나온 것이며 충동적이긴 하지만 수단을 잘못 선택했다. 주님께서는 말코스의 귀를 만져 고쳐주시고 베드로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 칼을 도로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8, 11)

여기서는 칼과 잔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칼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이기지만, 잔은 복종함으로써 이긴다. 난폭한 자들의 성급함이 아니라 성자(聖子)의 인내심이 주님께서 영혼을 구하는 방법이다. 주님께서는 요한과 야고보에게 당신 수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와 같이 "잔"이라는 비유를 통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종종 말씀하셨다. 이제 주님께서는 유다나 최고 의회나 유대인이나 빌라도나 헤로데로부터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게 될 잔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잔은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그들을 다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당신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을 담고 있는 잔이다. 주님께서는 수난을 받도록 선고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다고 하신다. "이 잔을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그 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건방지고 뻔뻔스럽게 폭력에 의존하는 자들은 폭력 자체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복수는 스스로 벌을 자초한다. 육체는 칼로 정복될지 모르지만, 칼은 그 칼을 휘두르는 자를 배신할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요한 26, 52)

이 말은 역사에 의해 증명된 인간적인 교훈일 뿐이다. 베드로는 너무도 약하게 보이는 주님의 참된 하느님이심을 배워야 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면 지상의 어떤 군대보다도 강력한 군대를 응원군으로 부르실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만 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 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마태오 26, 53)

주님께서는 로마 용어인 "군단" 이란 단어를 사용하셨다. 주님께서는 군단의 십분의 일 병력인 1대대에 의해 체포되셨다. (1군단의 숫자는 육천명이었다).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셨다면 당신을 적의 손에서 빼내달라고 육천명의 열 두 배나 되는 지원 병력을 부탁하실 수도 있었다. 만약 군대의 힘에 의존한다면 대사령관 밑의 천상 군대와 비교해 볼 때 베드로의 작은 칼은 너무도 하찮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천사를 부르시지 않은 것은 마지못해 운명에 복종하거나 자신의 정화를 위해 고통을 참아받고자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권리를 잠잠히 포기하신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우월한 힘을 스스로 자제하신 것이요, 완벽한 능력을 지니신 자유로운 신분이 사라진 것이며,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를 포기하신 것 - 이것은 백열상태의 희생이다 - 이다.

피에 굶구린 군중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무리를 둘러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전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을 때에는 나를 잡지 않다가 지금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잡으러 왔으니 내가 강도란 말이냐?" (마태오 26, 55)

그러나 예언자들은 어떤 예언을 하였을까? 예언을 하나만 인용해본다면, 이사야는 주님께서는 적들에 의해 죄인 취급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곳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이사야 53, 12)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깍이는 어미 양처럼 (이사야 53, 7)

빌라도와 안나, 로마인들과 유대인들과 같은 부차적인 원인들을 초월해서, 주님께서는 적들이 칼로써가 아니라 당신 아버지께서 봉헌하시는 잔으로 정복될 것을 알고 계셨다. 사랑이 당신 희생의 동기이자 원천임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 16)

죄는 보속과 보상을 요구한다. 주님은 사람이시기에 인간의 이름으로 행동하실 수 있었으며, 또한 하느님이시기에 죄에 대한 당신의 구속은 무한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주님은 인성으로 고통과 죽음을 당하실 수 있으므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봉헌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죄가 없으셔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 자신이 구원을 필요로 하실 것이다.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어린 양은 "흠이 없어야" 했다. 어린 양의 사랑은 자유로와야만 했다. 하느님의 어린양에게 강제로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은 최고의 불의가 될 것이다. 이제 능력을 인정하였기에 주님은 자신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다. 하느님의 허락은 하느님의 명령과 똑같이 하느님의 뜻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죽음에 당신 적들이 간여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으셨기에, 즉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잔으로 생각을 돌리셨다. 비록 현재의 잔이 쓰긴 하지만 이 잔에서 선(善)이 나올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러한 사랑을 믿었다. 주님께서 그들의 손에 자신을 넘겨주실 때 사도들에 대해 예언하신 바가 그대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이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마태오 26, 56)

칼을 빼서 잔을 방어하던 베드로는 도망가고 안보였다. 나중에 그는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아무도 모르게 뒤를 따랐다. 요한도 군중들 뒤에서 안전하게 따르다가, 후에 대사제 집에 나타났다. 그러나 유다는 남아있다가 스승께서 가나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는 "때"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매일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는 잡지 않더니 이제는 너희의 때가 되었고 암흑이 판을 치는 때가 왔구나" 하셨다.(루가 22, 53)

여러 차례 주님께서는 당신 적들과 헤로데에게 당신 "때"가 오기 전에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주님은 그때를 선언하신다. 이제 악이 세상의 빛을 몰아낼 수 있는 때가 왔다. 악은 그 때가 있고 하느님은 당신 날이 있으시다. 베들레헴에서 인성을 취하셨을 때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계시던 주님께서 지금은 밧줄로 묶여 십자가 위에 뉘신다. 일전에 적들이 주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주님은 당신 말씀의 힘으로 사로잡으셨으나, 이제는 때가 왔기에 주님은 혼쾌히 체포되신다. 쨍그렁 거리는 쇠사슬소리와 번득이는 칼을 본 사도들은 메시아의 영광은 몽땅 잊어 버리고 주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대사제께서는 혼자서 희생제사를 올리셔야만 한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42. 고통을 준 입맞춤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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