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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41.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뇌

[그리스도의 생애] - 41.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뇌


주님의 생애 가운데서 노래하셨다는 기록이 단 한 번밖에 없는데, 그것은 최후만찬 후 게쎄마니 동산에서 죽음을 맞이하러 나가실 때였다.

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올리브산으로 올라 갔다.(마르코 14, 26)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인들은 낯선 땅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버드나무 위에 하프를 걸어 두었다.
양순한 양은 도살장에 끌려갈 때 입을 열지 않지만, 하느님의 참된 어린 양은 세상의 구원을 생각하며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당신께 대한 사도들 모두의 믿음이 흔들리게 될거라고 엄중히 주의하셨다.
주님께서 가끔 말씀하셨던 "때"가 급속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가 주님을 덮칠 때 그들은 아연실색하며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서 왜 고통을 받으셔야 하나?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오늘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마태오 26, 31)

장차 그들의 믿음의 머릿돌이 되실 분이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기도 하신다고 경고하신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그들의 "착한 목자" 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당신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실 때가 되었다. 수 세기 전의 예언으로 거슬러 올라가 주님은 즈가리야의 예언을 그들에게 들려 주셨다.

칼아, 일어나 나의 일을 돕는다고 하는 목자를 쳐라. 만군의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나의 목자를 쳐서 양떼를 흩뜨려라. 나 또한 손을 돌려 흩어지는 가련한 것들을 치리라.(즈가리야 13, 7)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물이 되셔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한 시간 있다가 사도들은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 수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즉시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을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난 후 너희보다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오 26, 32)

죽은 사람이 삼일 동안 무덤에 있다가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지키겠다고 한 이러한 약속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양들이 목자를 버린다하더라도 목자는 양들을 찾으실 것이다. 아담이 동산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의 유산을 잃어 버렸지만 이제 주님은 동산에서 그 일치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한다. 에덴과 게쎄마니는 인류의 운명이 엇갈리는 두 개의 동산이다. 에덴에서 아담은 죄를 지었고, 게쎄마니에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짐을 떠맡으셨다. 에덴에서는 아담이 하느님을 피해 숨었으며, 게쎄마니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에덴에서는 하느님께서 반역의 죄를 범한 아담을 찾아내셨지만, 게쎄마니에서는 새 아담이 아버지를 찾았으며 아버지께 복종하고 순종하였다. 에덴에서는 칼을 빼서 동산의 출입을 막음으로 악을 불멸하게 만들었으며, 게쎄마니 동산에서는 칼이 칼집에 꽂힐 것이다.

이 정원은 게쎄마니라고 불렸는데 올리브를 압축하는 압축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 동산에 오신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예수와 제자들이 가끔 거기에 모이곤 했었기 때문에 예수를 잡아줄 유다도 그 곳을 알고 있었다.(요한 18, 2)

더욱이  이곳에서 밤을 새신 적도 더러 있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면 올리브산에 올라 가셔서 밤을 지내셨다.(루가 21, 37)

유다는 배신이라는 추악한 일을 하러 이미 나가고 없었다. 사도 여덟명은 게쎄마니 입구 근처에 남겨두었고, 나머지 세 명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는데, 이들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을 때도 주님과 함께 있었으며, 거룩한 변모가 이뤄진 산 위에서 주님의 얼굴이 태양처럼 빛났을 때도 주님과 같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그들을 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그것은 어둠의 골짜기에서 마지막 시험을 당하실 때 주님의 인간적인 마음은 당신을 가장 사랑하던 자들이 옆에 있기를 원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도들로서는 더 더욱 주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거룩한 변모 때 주님의 영광의 모습을 미리 보았기 때문이었다. 동산에 들어서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게쎄마니라는 곳에 가셨다. 거기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어라." 하시고(마태오 26, 36)

실망과 고뇌"에 빠지기 시작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세명의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근심과 번민에 싸여 그들에게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마태오 26, 38)

이사야는 우리 모두의 악이 주님 위에 지워지리라고 예언하였다. 이러한 예언을 실현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죄인양 죄를 짊어지시고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을 맛보셨다. 두 가지 요소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즉 죄를 짊어짐과 죄없이 복종하는 그것이다. 땅에 엎드려 주님은 천상 아버지께 기도를 올리셨다.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마태오 26, 39)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가지 본성이 이 기도에 관련되어 있다. 주님과 아버지는 한 분이시다. 이 기도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추호도 의심이 없었지만, 주님의 인성은 죄의 벌인 죽음을 보고 뒤로 움칫 물러섰다. 인간적인 영혼은 죄로 인해 받게 될 벌을 보고 당연히 움추러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에 신적인 복종을 하였다. 수난의 잔에 대한 "거부"는 인간적인 것이며, 신적인 의지에 대한 "승복"은 구원을 위한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죄를 보상하는 인간적인 고통의 쓴 잔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하는 몇 방울의 말씀으로 그 쓴 잔을 달콤하게 만든 것은, 곧 인간의 이름으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인간이시자 하느님이시기에 그 고통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신 분의 표지이다.

이 장면은 인간의 정신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일격이 가해지기도 전에 주님을 누르고 있는 두려움과 걱정과 슬픔이라는 점진적인 심리학적 공포의 단계를 누구나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때보다는 예정된 공격 개시 시간 전에 훨씬 많이 느낀다고들 한다. 적극적인 투쟁은 가만히 죽음을 생각할 때 갖는 두려움을 앗아가 버린다. 다가올 투쟁을 조용히 기대하는 것 외에 주님의 정신적인 고통을 더해 주는 것이 있었다. 동산에서의 고뇌가 십자가형의 신체적인 고통보다 주님께 훨씬 더 많은 고통을 주었을 것이며 수난의 그 어느 순간보다도 주님의 영혼이 더 깊은 어둠의 세계에 빠졌을 것이다. 한 순간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상으로써 그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외치셨다.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 (마태오 27, 46)

주님의 정신적인 고통은 단순한 인간의 고통과는 전혀 달랐다. 주님은 인간적인 지능만이 아니라 신적인 지능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님은 어떤 인간의 유기체보다도 더 완벽한 신체적 유기체를 갖고 계셨다. 따라서 거친 감정과 악한 체험으로 무뎌진 우리의 인간 본성보다 주님은 훨씬 고통에 민감하셨을 것이다.

피조물들의 갖가지 수준에 따라 느끼는 고통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러한 고뇌를 다소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흔히 동물의 고통을 과장해서 인간들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물들이 인간들처럼 예리하게 고통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지성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의 고통의 맥박은 각기 차이가 있고 다르며 각각의 고통은 서로 연관이 없다. 그러나 인간이 고통을 당할 때는 지적인 기억력과 더불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과거의 고통을 몽땅 스스로 떠맡으므로 "삼주째 번민하고 있다." 고 하거나 "칠 년째 고통을 당하고 있다." 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전의 모든 고통들을 요약함으로써 백번째의 타격을 받을 때는 그 안에 이전의 아흔 아홉번의 강도가 배가 된 것으로 느낀다. 동물은 이렇게 하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은 동물보다 더 고통을 느낀다.

그 밖에도 인간의 정신은 현재와 관련을 짓기 위해 과거를 끄집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와 관련을 맺기 위해 미래를 바라보거나 끄집어 낼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번민을 칠 년 동안 해왔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칠 년은 더 고생할 것 같다" 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의 정신은 무한정한 미래에까지 내뻗치며 아직 앞에 놓여있는 상상적인 모든 고통을 끌어들여 현재의 고통에 첨가한다. 과거로부터 계속된 많은 고통을 떠맡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상상적인 많은 고통을 떠맡을 수도 있는 이러한 인간능력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인간은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스스로 겪는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병자에게 고통을 완화시켜줄 때 보통 그들의 마음을 딴 데로 전환시킬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계속적인 고통을 차단하고 정신을 이완시킴으로써 고통이 더 첨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와 다른 점은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도덕적 악이요, 죄였다. 주님은 인성을 가지고 계셨기에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셨을 것이나, 주님의 주된 고통은 그러한 저속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보다 훨씬 통렬한 것이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세상의 죄의 신비의 짐이었다. 둘째, 경험하면서 성장한 인간적인 지성 외에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같이 들여다보는 하느님의 무한한 지성을 갖고 계신다.

가엾은 인간들은 죄에 너무 익숙해져서 죄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무죄한 자는 죄많은 자보다 죄의 두려움을 훨씬 잘 이해한다.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전혀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한가지는 죄를 짓는 것이다. 죄인은 죄로 물들어 죄가 자신의 일부처럼 되었기에, 열이 약간 있는 사람이 자신을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도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죄없는 사람만이 죄의 흐름에서 벗어나 의사가 병을 바라보듯 악을 바라볼 수 있으며 죄의 공포를 완전히 이해한다.

이런 고뇌의 와중에 주님께서 생각하신 것은 병사들의 희롱이나 반대의 기둥에 손과 발이 못박히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세상의 죄의 짐이었으며 세상이 당신, 곧 하느님의 아들을 거부함으로써 당신 아버지를 거부하리라는 사실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의 의지를 거슬러 자기 의지를 들어올리고, 스스로 자기의 하느님이 되고자 열망하고, 하느님의 지혜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자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님께서 십자가라는 딱딱한 침대 때문에 몸을 사리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서로 동조하여 십자가를 만들었기 때문에 몸을 사리신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식들이 지은 죄 가운데 가장 추악한 죄를 - 최상의 선과 진리와 사랑을 죽인 것 - 세상이 범하지 않기를 바라셨다.

위대한 인물과 위대한 영혼들은 폭풍을 끌어들이는 산과 같다. 산꼭대기에 천둥이 울리고, 산 정상 주위에 번개가 번쩍이고, 그것은 마치 하느님의 진노처럼 보인다.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가운데 이 순간 가장 고독하고 슬픈 인간은 주님 자신이시다. 모든 사람들보다 더 높은 주님의 머리 주위에서 험악한 악을 쳐부수는 것 같다. 여기 한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갈등을 벌이는 전체적인 세상의 역사가 요약되어 있다. 인간의 반발의사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느끼셨을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으로서 그러한 느낌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설득과 사랑과 희망을 저 버리고 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반항하는 자녀들의 이해가 안가는 고집불통을 체험할 때일 것이다. 너무도 강한 힘이 너무도 나약한 육체와 너무도 유치한 정신 속에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죄를 범했을 때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영혼에 있어서 죄란 마치 하느님이 안계신 것처럼 생각하며 자신의 목적을 해결해 가는 별개의 지혜의 원리와 행복의 원천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반(反) 그리스도란 전혀 통제를 받지 않고 자라난 자의지(自意志)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여 세상의 모든 악을 스스로 짊어지시고 죄를 짊어진 자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죄를 부인하거나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온갖 고뇌와 고통을 겪으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빚진 것을 아버지의 정의에 따라 갚을 것이며 죄인으로 취급받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는데도 죄인으로 내리침을 받으셨다.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 어떤 고뇌보다도 더 큰 고뇌를 주님께서 겪으신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과거도 생각하고 미래도 생각하듯이, 구세주께서도 과거를 보시며 지금까지 사람들이 범한 죄를 보셨다. 주님께서는 미래도 보시며 세상 종말까지 사람들이 범하게 될 모든 죄를 보셨다. 주님께서 현재 떠올리는 것은 지나간 고통의 아픔들이 아니라 공공연한 모든 악한 행동과 드러나지 않을 모든 수치스러운 생각들이었다. 인류의 머리로서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은총의 유산을 잃어 버린 아담의 죄를 보셨고, 동생의 피로 물든 진홍색 천을 걸치고 있는 카인을 보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의 혐오스러운 죄들을 보셨으며, 당신을 잊어 버리고 가짜 신앞에 무릎을 꿇은 당신 백성의 죄를 보셨으며, 자연법에 거슬러 반기를 든 이교도들의 음탕한 죄들을 보셨으며, 모든 죄들을 보셨다. 모든 자연을 낯붉히게 만드는 시골에서 사람들이 범한 죄와, 도시의 추한 죄의 분위기 속에서 저질러진 죄와,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찌른 젊은이들의 죄와 이미 죄를 짓는 나이를 넘어섰어야 될 노인들이 범한 죄, 하느님도 보시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어둠속에서 범한 죄, 사악한 자들 까지도 치를 떨 게 만드는 백주에 범한 죄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죄들, 너무도 가증스러워 이름 조차도 댈 수 없는 죄들, 죄! 죄! 죄! 이 모든 죄들을 보셨다.

일단 순수하고 죄없으신 구세주의 마음이 이 모든 과거의 죄악들을 자신의 죄인양 마음 속에 떠올리시자, 이제는 미래를 들여다보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느님을 훨씬 더 증오하는 사람들을 보셨다. 주님께서는 미래 유다와 같은 자들의 배반을 보셨으며,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몰아내지는 못하지만 땅에서는 하느님의 대사들을 몰아내는 공산주의자들의 죄와, 파기된 결혼서약과 거짓말과, 중상과, 간음과 살인과 배교를 보셨으며, 이 모든 죄들이 마치 당신이 범하신 것처럼 당신 손 안에 밀려든다. 사악한 욕망들이 마치 당신이 창조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 가슴에 쌓여 있으며, 거짓말과 분열이 마치 당신이 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의 머리 속에 남아 있으며, 불경스러운 말들이 마치 주님께서 그런 말씀들을 하신 것처럼 당신 입에 오르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음험한 죄의 독기가 홍수처럼 주님께 덮쳐들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죄인인양 양 팔을 위까지 쭉 뻗치시고 세상의 모든 죄를 당신에게 끌어 모으시어 우리 이름으로 빚을 갚으시고 우리가 다시 아버지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셨다. 주님께서는 정신적으로 큰 희생을 치를 준비를 하시며 세상의 죄의 짐을 죄없는 당신 영혼이 떠맡으신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죄의 짐이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주님에게는 사람들이 아주 우습게 보는 미소한 죄라도 너무도 심각한 고통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 죄인양 당신 영혼 위에 지신 과거의 죄들과 주님으로 하여금 당신 죽음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 Quae Utilitas in Sauguine Meo (내 피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 의심하게 만드는 미래의 죄 가운데 현재의 공포가 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이 세 번째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어둠의 세력과 싸울 걱정을 하는 사람들은 잠을 잘 수 없건만 이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온 세기의 축적된 죄가 역병처럼 당신한테 달라붙을 때 주님의 육체적 본성이 견디지 못한 것도 당연하였다. 고통을 겪는 아버지가 망나니같은 아들의 빚을 갚는 것처럼, 주님도 당신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게 할 정도로 죄를 느끼신다. 게쎄마니 동산의 올리브 나무 뿌리 위에 진홍구슬처럼 떨어지는 피가 최초의 구원의 묵주가 되었다. 영혼의 고통을 낳는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다. 하느님께 반항하는데 대한 철저한 슬픔은 육체적 고통을 낳는다. 옛부터 베지 않은 나무에서 흘러 나오는 고무야말로 최상이라고들 하였다. 여기서는 채찍질도 없고 못질도 없으며 상처도 없건만 최상의 향료가 흘러나온다. 창은 없지만 고통을 받고자하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자발성에 의해 거룩한 피가 아낌없이 흘러나왔다.

죄는 피 속에 있다. 의사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지나가는 행인들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 술취한 것은 눈과 부어오른 뺨을 보면 알 수 있으며, 탐욕은 손과 입에 씌여 있고, 육욕은 눈에 씌어 있다. 어떤 난봉꾼이나 범죄자, 옹고집장이, 변태자도 그의 미움이나 시기심이 자기 몸 구석구석에, 드러나지 않은 혈관 곳곳에, 그리고 모든 뇌세포 속에 써 있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죄가 피 속에 들어 있기에 그 피를 쏟아내야만 한다. 주님께서 염소와 동물의 피흘림이 당신 속죄의 예표가 되기를 바라셨듯이, 죄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전쟁이나 미움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구원을 위해 흘리신 당신의 고귀한 성혈만을 간구하기를 바라셨다. 모든 죄는 배상이 필요하기에, 현대인은 용서로써 그리스도의 피를 부탁하는 대신에 전쟁이라는 불의한 일을 통해 자기 형제들의 피를 흘리고 있다.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이 모든 일은 죄를 철저히 의식한 인간이 평화와 용서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구속 성혈을 간구하기 시작할 때에 비로서 멈출 것이다.

누구나 달밤에 게쎄마니 동산에서 일어난 투쟁의 본질을 최소한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해 약간은 알고 있다. 이십 대가 된 사람들은 누구나 - 사십 대나 오십 대, 육십 대, 칠십 대는 말할 것도 없이 - 어느 정도 심각하게 자기 자신이나 주변의 세계에 대해 반성해 보았을 것이며, 죄로 인해 영혼 속에서 일어난 엄청난 긴장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잘못과 어리석은 행위들은 기억력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수면제로도 그것을 잠재울 수 없으며, 심리분석가도 설명을 통해서 그것을 해소시킬 수 없다. 청소년 시절은 활기에 넘치기에 이러한 잘못들이 별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조용한 시간들이 닥칠 때 - 병석에 있거나 잠안오는 밤, 막막한 대해, 적막한 순간, 어린이의 얼굴에 나타난 순진무구함 같은 - 이러한 죄들이 유령처럼 우리 양심에 가차없이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한 순간들이 열정의 순간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양심은 시간을 전해놓고 언젠가 아디에선가 엄격하고 단호하게 그 죄를 증거할 것이며 영혼에 두려움을 일으켜 다시 영혼을 하느님께 돌아가게 한다. 개인의 고뇌와 고통이 아무리 크다하더라도 그러한 고통들은 구세주께서 게쎄마니 동산에서 당신의 죄인양 느끼셨던 인류의 죄에 비하면 너무도 하찮은 것이다.

사도들이 세 번째 잠들어 있는 것을 보시고 구세주께서는 당신과 함께 한 시간을 깨어있지 못하느냐고 다시 묻지 않으셨다. 잠을 자도 된다고 의미있게 허락해주신 것은 어떤 꾸지람보다도 더 무서울 것이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돌아 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자, 때가 왔다. 사람의 아들이 죄인들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마태오 26, 45)

지쳐빠진 제자들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잠을 자도록 허락해주셨다. 그들의 동정이 더 이상 필요없다. 주님의 친구들이 잠을 자는 동안 주님의 적들은 음모를 꾸몄다. 주님께서 그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신 것과 유다와 병사들이 접근하던 때는 다소 시간상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 시간동안 제자들은 계속 잠을 잘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손꼽아 기다리시던 때가 가까이 왔다. 로마 병정들의 질서정연한 행군소리와 배반자를 앞세운 폭도들과 성전지도자들의 불규칙적이며 서두르는 발자국 소리들이 멀리서 들린다.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마태오 26, 46)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41. 게쎄마니 동산에서의 고뇌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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