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삼왕의 경배 (Ladorazione dei Magi: 1753)
작 가 : 쟌 바티스타 티에뽈로 (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
크 기 : 405X 211cm 켄버스 유채화
소 재 지 : 독일 뮌헨 고대 미술관 (Alte Pinakothek)
인간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은 풍요는 항상 몰락이나 붕괴로 이어지는 전초과정이라는 것이다. 어떤 나라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풍요사회로 진입하게 되면 도덕적인 퇴폐와 함께 이완현상이 시작되면서 붕괴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예외가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이라 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도시”인 베네치아는 9세기 초 프랑크 족이 침략했을 때 육지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갯벌에 정착함으로서 이룬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수상도시인데, 아드리아(Adria) 바다 밑 점토에 박힌 수백만개의 떡갈나무 말뚝이 기층이 되어 118개의 섬과 177개의 운하와 400개의 다리로 연결된 수상도시이다.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성벽이 없으면서도 천년 이상 한 번도 외적의 침략을 받지 않는 도시여서 모든 문화가 고스란히 보존된 도시이며, 총독관저가 도시의 중심이 아닌 바닷가, 즉 가장 위험에 노출된 곳에 최고 지도자가 거주하면서 역대 총독 중 한 사람 외에 모두 국가적 차원에서는 청렴하고 최선을 다한 자랑스러운 지도자를 배출한 도시이다.
자기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외국에 나가 전쟁을 치른 경험은 많지만 자국에서는 한 번도 전쟁이 없었기에 도시 전체가 화려하고 생기에 차 있으면서도 더 없이 조용한 느낌을 주며, 베네치아의 또 다른 이름인 <가장 조용한 공화국: La Serenissima>이라는 느낌이 피부로 느껴지는 곳이다.
“하느님은 자연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도시는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처럼 한 독재자의 권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의 합심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들의 몰락은 내부적인 부패에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힘보다 더 강했던 외부 힘에의 굴복이었기에 몰락의 과정에서도 자신의 자유만은 지켜 나갈 수 있었으며, 어느 나라가 그렇듯 외국의 침략을 받아 몰락과정에서 볼 수 있는 비참함과 비굴함이 베네치아에서는 없었고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는 항상 건강하고 명석한 상태에 있었기에 몰락의 과정에서도 베네치아는 대견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았음을 몰락의 시기에 활동했던 여러 작가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먼저 25번으로 소개된 <성 십자가의 발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작품은 풍요로운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경쾌함과 화려함을 특징으로 하며 언제나 동적인 역동성을 한껏 느끼게 한다. 밝은 투명색을 사용하면서 명암을 경쾌히 대비시켜 장식적인 환상세계를 구성한 것이 특징인데 이 작품의 주제는 종교화이면서도 축제성을 띄고 있기에 작가의 특성을 한껏 발휘한 작품이다.
먼저 이 작품은 남독일 바이에른에 있는 어떤 수도원의 제단화였는데 베네치아에서 시작한 그의 활동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담대한 호화로움의 표현으로 대단한 호응을 받으면서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왕실로부터 초청을 받게 되고 독일 뷔르츠부르크 (Wurburg)왕궁 벽화 제작을 위해 초대를 받게 되는데, 이 작품은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그려진 것이며 이런 면에서 작가의 전성 시기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명암의 대조법을 사용해서 색채의 대비를 통해 전체적 구도를 잡으면서 작품성을 완벽히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먼저 극장식 정서를 도입해서 관객들에게 더 정확한 메시지 전달의 감동을 주고 있는데, 극장식이란 여러 명의 주인공들을 서로 다른 위치에 배치하여 등장시키면서 전체적 조화 속에서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며 그의 작품은 18세기 베네치아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18세기 베네치아는 회화 뿐만 아니라 음악, 건축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유럽의 선두주자로의 위치를 확보하여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현실이었으며, 음악적으로 볼 때에도 성 마르코 대성당을 중심으로 과거 상상도 못했던 격조 높은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유럽 음악을 주도하던 플랑드르 음악자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aert)가 성 마르코 대성당 음악 감독으로 초빙되면서 <분리된 합창 : cori spezzati>이라는 새로운 음향효과를 시도해서 금빛 모자이크으로 장식된 화려한 비잔틴 양식의 성당에서만 가능한 음악을 개발했고 이 음악을 듣노라면 음 하나가 금빛으로 울리고 다른 음 하나가 은빛으로 대답하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만드는 베네치아 음악이 시작되었다.
모짜르트와 함께 온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는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를 정점으로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 알비니오니(Tomaso Albinoni: 1671-1750), 마르첼로(Marcello) 등을 배출하면서 서유럽 음악의 중심지가 되어 오늘까지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베네치아 고딕 창문과 로지아(Loggia)로 어우러진 과거 귀족 저택을 개조한 음악당에서 꿈처럼 아늑하고 황홀한 베네치안 실내악을 즐길 수 있다.
비발디는 머리털이 유난히 붉어 “빨간 머리의 신부”란 별명이 붙었으며 25세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나 사제 직분을 2년 정도 한 후 자칭 천식 때문에 미사를 집전하지 않았으니 사제생활은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것은 꾀병이었단 평가를 받고 있다. 미사 집전 때는 재채기가 나지만 작곡이나 연주 지휘를 할 때는 말짱해서 사제로서는 <골돌이>였지만 음악가로서는 대단히 정열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활동한 작가는 한마디로 베네치아 풍요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의 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우선 이 배경은 전혀 다른 성격의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성모자가 앉아 있는 대리석 계단과 그 뒤편에 있는 나무로 허름하게 지어진 오두막인데, 이 허름한 오두막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인간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오신 그분의 가난을 드러내며, 앞의 대리석 계단은 고귀한 신분의 상징인 삼왕의 조배를 받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위엄과 영광을 표시하고 있다. 즉 한 장면에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장면을 배치함으로서 성탄의 상반된 성격 구세주가 취하신 인간적 가난과 하느님 아들로서의 영광을 대조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마치 필립비서 2장에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찬가>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세상을 비출 왕으로 오셨는데, 먼저 멀리서 온 삼왕이 무릎을 꿇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충분히 나이가 든 왕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모습이 더 없이 경건하고 아름답기에 이 왕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도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고귀한 인품의 사람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 왕은 다른 두 사람의 왕보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더 밝은 모습으로 변모되어 있다. 시편에 나타나고 있는 “생명의 샘이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본다”는 말씀을 드러내고 있다.
그 다음 성모님의 뒤편에 어두운 색깔의 복장을 한 일군의 무리가 달려오고 있는데, 이들은 복장으로나 표정으로나 삼왕과는 전혀 다른 신분, 즉 목동들의 전달을 듣고 달려온 민초(民草)들임을 알 수 있는데, 작가는 먼 이방인인 삼왕의 방문만이 아니라 주위의 민초(民草)들까지 등장시킴으로서 구원은 어떤 특정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에 구세주의 성탄 소식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부대중(事部大衆)에게 전파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다음 마지막의 감동은 등을 보이며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붉은 터번을 두르고 화려한 복장을 보아 그는 무어(Moors)족의 왕인데, 무어족은 711년에 오늘의 스페인인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해서 이슬람교를 믿으며 스페인을 지배하다가 14세기 후반 이사벨라 여황에게 쫓겨 오늘 북아프리카로 쫓겨간 민족으로 이슬람 교도의 상징이다.
중세기에 우리 교회와 이슬람교는 대단한 적대관계에 있었고 크리스챤의 시각으로 보면 이단이고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악마의 집단이기에 십자군을 일으킬 때 회교도의 박멸에 전대사를 부여할 만큼 이슬람은 원수의 대명사였다. 작가는 여기에서 주님의 가없는 사랑은 이슬람 교도도 하느님의 아들이며 크리스챤의 형제이며 주님의 구원 대상임을 강조하기 위해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방문한 이슬람 왕을 등장시켰는데 이것은 대단히 신선하고 충격적인 일이며 종교간의 대화나 일치의 차원에서 자랑할 만한 사건이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 시각으로서는 별것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우리 교회의 처지 역시 폐쇄적이기 짝이 없어 크리스챤으로서 이슬람 교도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파문의 대상이 되던 시대였으나, 작가는 베네치아라는 국제 교역을 하는 도시에 살았기에 교회의 이런 편협성과 폐쇄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악마의 자식으로 취급하던 이슬람 교도들의 인간적인 따스함과 선성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이런 파격적인 표현을 할 수 있었는데, 열린 집단이나 사회에서 만이 열린 사고와 열린 태도가 나오게 됨을 증거 하는 좋은 교훈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생명감 있는 색채 처리 기교를 한껏 발휘한 작품으로 평가되는데, 작품의 중심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이며, 눈부시게 밝은 색의 성모자와 그 주위의 어둠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세상에 희망의 빛이 비치게 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즉 공현(Epiphania)의 의미,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구세주로서 자신을 드러내심의 상징을 이방인인 동방 박사로 했는데,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즈가리야의 노래에 나타나는 것처럼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 (루카 1,79)임을 강조하기 위해 빛에 쌓인 분이기 이전에, 빛을 발산하시는 분으로서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주님은 세상에 빛을 던지시는 분으로 오셨기에 주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어둠의 세력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으나 주님은 당신의 빛으로 그들을 빛의 자녀로 변화시키셨다. 주님은 빛임과 동시에 어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빛을 발하시는 분”임을 작가는 강조하기에 성모자의 빛은 너무도 투명하고 반사하는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진리를 찾기 위해 한생을 다 보내며 고귀한 인품을 다듬은 삼왕은 주위 사람들의 신뢰 속에 높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으나 성모님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의 인생은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왕도 아니요, 현자도 아니요, 오직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으로서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마치 왕을 대하듯 정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게 되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왕은 늙고 생기 없는 그 얼굴에 주님 생명의 빛이 감돌면서 고귀한 영적 기품의 향기가 돌게 된다.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내장산 백양사, 가야산 해인사의 단풍을 꼽는데 해인사의 단풍에 매료된 어떤 시인은 해인사 단풍길을 걷다보면 쏟아지듯 퍼지는 단풍 색에 백발노인도 홍안(紅顔)소년으로 변한다고 했는데, 삼왕의 표정에서 바로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으로 변모된 영적 생기에 찬 아름다운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주님께 가까이 갈 때 모든 사람이 다 새로운 인생, 영혼의 청춘을 즐길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너무도 경쾌하고 화려한 이 그림의 백미를 나는 무심히 흘리기 쉬운 이 부분에서 보고 싶다.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구세주를 만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아기 예수님의 고사리 같이 앙증스러운 손을 잡고 기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삼왕은 한마디로 예수님과 깊은 친교의 지복직관(至福直觀)에 머물고 있는 반면, 이것을 약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무어왕은 주님을 경배하러 오긴 했으나 선뜻 내키지 않는 망설이는 모습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맞은편에 왕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 시동(侍童)은 엉겁결인지 진심인지 모르지만 계단에 무릎을 꿇고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왕과 순박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시동은 어떤 때 우리 안에 공존하는 두 개의 상반된 신앙인의 모습이다. 전폭적으로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함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면 다른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많은 것을 놓친다는 아쉬움이 있기에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지도 않으면서 양다리를 걸친 인생을 살아가는 마음의 표현이 무어왕의 태도라면 시동의 태도는 순박한 마음으로 무조건 충실히 따름으로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지고 철부지 어린이에게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한 참된 신앙인의 모델이다.
당신이 이 작품을 깊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도저히 거부하거나 피하기 어려운 강한 초대를 느끼게 될 것이다. 즉 시동이 무릎을 꿇고 주님을 경배하고 무어왕이 약간 의아해 하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그 계단에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왕이신 주님 앞에 왕관을 쓰고 경배하는 것이 너무 외람되다고 여겨 벗어둔 삼왕의 왕관이 있으며 그 옆에 한 사람이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작가는 당신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다.
“자 어서 무릎을 꿇고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해, 여기가 바로 네 자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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