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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장미창 /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 '


제 목 : 장미창(Rose Windows) 소 재 지 : 프랑스 샤르트르 (Chartres) 대성당 제작연도 : 1216년 크 기 : 지름 13.36m

우리의 마음을 산뜻하게 만드는 소식은 새로운 조명 시설로 서울의 야경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청 광장을 중심으로 시작된 루미나리에(Luminarie)라는 조명인데, 이것은 16세기 이태리에서 성인 축제를 지내기 위해 시작된 것이며, 이제 우리에게 도입되어 서울의 중심부를 밝히면서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감회로 마음이 무겁기 쉬운 연말을 화사하게 해주고 있다.

어느 종교이건 어둠을 밝히는 빛의 의미는 심원하기에 불교에서도 대웅전의 이름을 대광보전(大光寶殿)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힌두교의 어떤 수행(修行)은 하루 종일 빛의 원천인 태양을 바라보는 수행도 있는데, 이것은 영적 삶과 빛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표현하셨기에 빛과 어둠은 우리의 영성 표현에 중요한 주제이며, 이것이 성서 전체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데,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하느님 최초의 창조행위는 빛과 어둠을 가르는 것이었으며(창세기 1, 3-4), 종말에 오실 하느님은 당신이 빛으로 오실 것으로 약속하셨기에 수도자들은 주일 끝기도 때마다 이것을 반추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 곳에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록 21, 23)

신약에 와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행위와 말씀으로 당신이 세상의 빛이시요, 빛을 주시는 분이심을 제시하시며, 특히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실로암 연못에서의 소경 치유사화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 5)라고 하시며 크리스챤 영성에 있어 빛의 의미를 강조하셨다.

사도 요한은 자기 복음서의 머리글에서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오심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 9)고 할 만큼 빛의 영성적 의미를 강조했으며, 그는 자기 복음서에서 빛이란 단어를 23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다른 세 복음서를 통틀어 15번 인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요한이 얼마나 빛의 영성에 심취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장미창은 바로 이런 요한의 빛의 신학을 더 없이 매력적인 형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통해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표현하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갖은 노력과 정성을 다한 중세인들이 이 빛의 영성을 건축으로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고딕(Gothic) 양식이다.

고딕 예술은 12세기 후반부터 15세기까지 서유럽에서 유행했던 건축과 예술 양식으로 이 명칭은 로마 문명의 찬란한 유산을 물려받은 이탈리아인들이 자기들의 전통안에서 영글은 로마 양식과는 다른 이 양식을 못마땅하게 여겨 야만인들인 고트족이 만든 조잡하고 천박한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하였다.

11세기가 되면서 이것이 서유럽 예술의 중요한 양식으로 정착하면서 로마의 건축 양식이 표현하지 못했던 빛의 미학을 너무나도 아름답고 강렬하게 표현했다

또한 고딕 양식은 중세인들이 믿은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느님께 대한 종교적 신념을 완벽히 표현하고 있는데, 성당 안에 들어갔을 때 전나무 숲처럼 하늘을 향해 선 기둥들의 장엄함은 백팔번뇌의 고뇌 속에 살아야 하는 중생들이 이승을 하직한 후 도착할 천국 영광과 그리움을 애틋하도록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미사 감사송 서문에 나오는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라는 기도를 통해 바치는 하늘나라에의 염원을 완벽히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으며, 어떤 이는 로만 양식의 안온함이 아빠스를 중심으로 한 가정적 성격을 표현하는 베네딕도 영성을 표현한다면, 하늘을 향한 끝없는 염원의 표시인 고틱 양식은 하늘나라를 향한 끝없는 순회의 삶을 갈망하는 프란치스칸 영성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일리가 있는 견해이다.

고딕 양식의 진원지는 프랑스의 생 드니(St.-Denis) 수도원이었으며 이 수도원을 건축한 쉬제(Suger, +1144) 대원장은 하느님을 <초월적이며 본질적인> 분으로 해석하여 성당 구조에 이 빛의 영향을 최고로 발휘하는 양식으로서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를 도입해서, 성당을 찾는 신자들이 색, 빛, 선, 공간 등에서 볼 수 있는 시각적으로 풍부한 아름다움을 통해 물질적인 영광에서 비물질적인 천상 영광에로 승화되는 체험을 하게 만들어 귀양살이의 땅에서 천상 영광 광휘에 그리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천상 영광을 표현한 고딕 건축에 대한 예찬은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이어 지고 있는데, 샤르트르 대성당을 본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작가인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는 “보는 것만으로도 순간은 영원이 된다”라는 예찬을 남겼다.

여기에 작품을 소개하는 샤르트르 대성당(1194-1220)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85㎞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 있는데, 우뚝 솟아 있는 언덕 위에 30층 높이로 지어져 보는 이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이 대성당은 876년 서 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샤를 2세가 성모님이 입으셨다는 옷을 봉헌함으로서 이 성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어떻게 이 작은 마을에 이토록 웅장하고 보석 상자처럼 아름다운 대성당이 지어진 것인가에 대해서는 중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초월적 삶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서유럽 건축가들은 하느님의 한량 없는 은혜에 보답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크고, 가장 높고,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짓고자 했다. 고딕 양식이야말로 그들의 염원을 완벽히 충족시켜주는 것이었기에, 서유럽 사회 전체가 성당 건축에 매진했으며 이들은 기하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조화와 균형을 통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런 면에서 이 작품들은 걸작에 속한다.

또한 이 대성당은 지난 세기 프랑스 시인으로서 오랜 정신적 방황을 끝내고 신앙에 회심한 샤를르 페기(Charles Peguy: 1873-1914)가 당시 공산주의, 유물론 등 오만 가지 오염된 사상에 찌들려 있던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이 줄 수 있는 신선한 가치를 심어 주기 위해 시작해서 오늘 까지 이어지고 있는 “샤르트르 대행진”의 목표점이 되어 오늘도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 성당 순례 행진을 통해 크리스챤적인 건강한 인생관을 살 수 있는 힘을 주고 있는 살아있는 성지이다.

이 대성당에 들어서는 사람은 누구나 유리창을 통해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빛의 홍수에 휩쓸려 잠시 현실을 벗어난 충격과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이 고딕 대성당에 빛의 미학(美學)을 완벽히 표현한 것이 바로 스테인드 글라스이며, 성서의 풍부한 내용을 담아 중세기 대종이었던 문맹 크리스챤들을 위한 교리 교육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으며, 신구약 성서의 펼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성서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백미는 두 탑 사이에 있는 장미창이다.





이 대성당의 내부를 황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형형색색의 빛이며, 이 색이 얼마나 청아하고 순수하던지 년 전 코닥(Kodak) 카메라에서 새로운 사진기를 만들어 성능을 시험할 때 이 성당의 색유리를 찍었을 만큼 아름답기 이전 신기(神氣)를 느끼게 만드는 걸작들이다.

북쪽의 이 장미창은 푸른 빛깔이 주조를 이루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이 푸른 색깔은 중세기에 와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12세기부터 이 색깔은 장미창에서 다른 색깔을 누르고 <거룩하게> 빛을 여과시킬 수 있는 중요한 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기에 이 색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기의 장미는 막연한 아름다움의 상징이 아니라 지혜와 성모님의 상징이었으며 고딕 대성당의 둥근 창을 장미창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장미가 지혜의 꽃이며, 거룩하신 성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성모님께 대단한 신심과 사랑을 지녔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St. Bernard Clairvaux, 1090-1153) 성인은 투명한 유리로 투사되는 빛을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즐겨 사용했다.

즉 “태양의 빛살이 창문의 유리를 통과할 때, 빛살의 부드러움은 단단한 유리를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게 되고, 빛이 통과한 그 유리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 것처럼 구세주를 세상에 모셔온 성모님 역시 조금도 동정성을 손상치 않고 어머니가 되셨다.”고 성모님의 동정성을 찬양했듯이 이 장미창에서 쏟아지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하고 화려한 빛의 세례를 받으면서 크리스챤들은 동정녀로서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통해 평범한 피조물을 이토록 아름답게 끌어올린 하느님을 찬양하게 된다.

장미창은 수레바퀴처럼 둥글다. 장미창의 한 복판, 바퀴의 중심축에는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님이 앉아 계시며 성모님 위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있는데, 성령을 상징하는 이 비둘기는 넷으로 보이나, 실제로 넷이 아니고 한 비둘기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성모님을 향하고 있기에 성령이 가득하신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를 상징한다.

그 아래에 여덟 천사가 있으며 그 밖으로 12개의 사각형 형태에는 마태오 복음서 1장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조상인 다윗 왕을 위시하여 이스라엘 12지파의 형상이 있다.

가장 바깥의 반원 형상에는 이스라엘 구세사에 나타나고 있는 열 두 예언자들이 있으며, 열둘은 성서에서 완전수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데, 열둘로 이어지는 예언자, 왕, 천사, 비둘기들은 중앙에 앉아계신 성모님의 품에 안긴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향함으로서 모든 것이 다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두도록 배려되어 있다.

장미창은 수레바퀴 형상인데, 수레바퀴가 그런 것처럼 바퀴가 돌아가는 동안 바퀴 축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상태에서 바퀴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는데, 장미창의 이 형태를 통해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不動因), 세상 모든 것에 영향을 주는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을 표현하고 있다.

장미창에서 움직이지 않는 중심과, 움직이는 주위의 질서는 창조주와 피조물,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를 너무도 정확하고 조화롭게 표현하고 있다. 즉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우주와 인간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제일원인(Primus Motor)로서의 하느님을 표현하며, 우주를 뜻하는 단어인 Universum은 <하나로 향한다, Uni-Vesrum>의 뜻이고 보면 장미창은 모든 만물이 하느님을 향해 정향된 크리스챤적인 우주론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인간이 작은 우주라면 장미창의 중간에 있는 예수님은 우주의 중심으로서 무한한 사랑의 궁극적인 표상이 되는 셈이다



장미창은 다른 어떤 재료로서도 표현할 수 없는 밝고 순수한 빛을 선사하면서, 항상 굴절 없이 직선으로 투사하면서도 보름달처럼 한 군데도 모난 곳이 없는 둥근 모양이다.

이 바퀴 형상은 두 말할 나위 없이 태양을 상징하며, 이 상징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궁극적 상징으로 귀결된다. 이 장미창이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강한 상징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많은 고딕 성당에서는 이 장미창의 바깥 부분에 황금을 입히거나 노란색을 사용해서 태양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상징이 되도록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중세인들이 장미창에서 그리스도를 태양에 비유했던 것은 중세의 긴 역사 안에서 영글어진 것이다. 스페인 세빌리아의 성 이시도로(Isidore Seville. +656)의 신학을 12세기에 부활시킨 성 빅토르의 위고(Hugh of Saint Victor. +1141)는 하느님께로의 끝없는 상승의 삶을 살기 위해서 신비적 관상을 통한 지복직관(Visio Beatifica)를 강조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초월성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중세인들의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열망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모든 광채의 근원인 태양에 비유하게 되면서 장미창은 무한한 사랑의 궁극적 표상이며,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

빛은 성 보나벤투라에게도 영성 생활의 중요요소로 제시되고 있다. 그는 <설교 Sermones 4>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영원한 태양의 빛이 영광에 찬 영혼들을 비추게 될 때 그 광휘는 한없이 눈부시리라 ...... 그 광휘는 기쁨과 환희로 터져 나오고 하늘의 왕국에 갈 사람들을 위해 노래하며 한없는 기쁨, 숨길 수 없으리라.”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의 실체인 빛(Lux)이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장미창을 통과하면, 단순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모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진리를 제시하고 진리에의 갈망을 일으키는 광원(光源, Lumen)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오욕칠정의 늪 같은 사바세계에서 끌어올려 천상 하느님을 향하고픈 갈망을 일으키는데 성 보나벤투라는 빛의 미학이 지니고 있는 우주적이고 황홀한 측면을 강조했다.

이 창은 북쪽의 푸른 색과는 달리 빨강, 파랑, 노란색을 주로 사용함으로서 따뜻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영광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중심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왼손에는 최후 만찬 때 사용하신 성작을 드시고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내리시며 계신다. 이것은 성 보나벤투라의 아름다움에 관한 글들, 가장 아름다운 부분으로 평가되는 축복의 광경과 하늘의 영광을 묘사한 것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천지의 창조주이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찬을 통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완전히 주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성찬의 삶을 살아갈 때, 장미창에 등장하고 있는 많은 천사들, 사도들, 이스라엘 성조들처럼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신화(Divinization)의 삶을 살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최고의 선이며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는 천국의 마지막 하늘에서 사랑하는 연인 베아트리체가 펼쳐 보인 장미꽃처럼 둥근 빛의 형태를 응시한다. 단테의 신곡 천국편 마지막에서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그가 일생을 통해 찬미하고 공경했던 성모님께 진리를 찾기 위해 고심하는 단테에게 하느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주시라고 간청하자, 성모님은 이 간청을 들어 주셔서 단테는 혼신의 노력을 다해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관상의 열정이 더 커짐을 느끼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된다.

즉 단테는 하느님과의 일치, 만남의 체험을 태양과 달을 통해 드러나는 빛이란 매력적인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신곡 전편은 모두 "별들"이란 단어(Stelle)로 끝맺고 있는데, 지옥편에선 <별들을 다시 보려, a revedere le stelle>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고통과 괴로움의 세계를 벗어나고픈 열망의 표현이고, 연옥편에선 <별들에게라도 솟아 올라갈, a salire alle stelle>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 안에서만 완전한 희망이 가능함을 표현하는 것이며, 천국편에서 <해와 달을 움직이시는 사랑, Lamor che move il sole e l altre stelle>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느님의 무한하고 뜨거운 사랑을 말하기에 빛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사랑은 시작이며 마침이고 우주의 정점임을 말하고 있다.

단테는 혼신의 노력을 다해 진실한 사랑을 구했으나 항상 좌절해야 했고, 나중에 빛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응시했을 때, 그가 원하는 완전한 사랑을 찾았다는 고백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나의 눈은 그 안에 송두리째 들어 있었다.
원(圓)을 측량하기 위해 온통 고심하는
기하학자가 궁리를 해보았지만 그가 필요로 하는
원리를 찾아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새로운 광경에 나도 그러했기에
나는 그 모습이 원에 들어가는지
또 거기 어떻게 자리를 잡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의 소망을 제안에 끌어 들였던
한 가닥 빛이 내 마음을 후려치지 않는 한
나 자신의 날개는 그에 미칠 수 없었다.
지존하신 환상 앞에 나는 힘을 잃었다.
그러나 이미 나의 열망과 의지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퀴와 같이
해와 별들을 움직이시는 사랑이 돌리고 있다.“
<신곡 천국편 33장 133>
크리스챤 역사가 일천한 우리들에겐 중세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많은데, 그중에 가장 큰 것이 중세기를 <암흑시기>로 매도하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볼 때 중세는 현대적인 조명기구가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현대 보다 어두운 환경에서 산 것은 사실이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현대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빛의 삶을 살았기에 중세 예술과 문학 작품 안에선 현대에서 보기 힘든 생기 있는 광휘로 가득 찬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며, 그 중에 최고가 바로 장미창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빛의 의미성을 완벽히 표현했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불리고 있다.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더 없이 주관적인 것이니, 각자는 자기 취향에 따른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양할 수 있으나, <장미창을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찬사를 보내는데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을 만큼, 장미창은 최고의 아름다움이신 하느님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에게는 두 개의 상반되는 속성, 즉 우리와 너무 가까이 계시며 성 아우구스티노의 표현대로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내재적 존재(Immanens)로서의 하느님과 함께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로 우리가 도저히 전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초월적 존재로서 (Transcendens) 하늘에 계시는 분,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는 분(1디모 6, 16)임을 알게 되며 우리는 미사 때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는 기도를 통해 초월적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우리 가까이 계신 하느님에게 일방적으로 몰두하면서 자기중심과 자기 취향의 하느님 안에 안주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에 중세인들이 장미창을 통해 그렸던 초월적 하느님을 바라본다면 신앙에 균형을 찾게 됨으로 현세 삶의 질도 많이 달라질 것이며 이런 관점에서 장미창은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초월자로서의 하느님 체험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교회 역사가 상대적으로 젊은 우리나라에는 명동 대성당과 대구의 계산동 주교좌 성당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고딕 성당이 없는데다, 명동 성당은 종탑을 가운데 세운 건축 구조상 장미창이 없지만 아쉬운 대로 장미창의 형식을 볼 수 있는 곳은 계산동 성당이며 쌍탑 사이에 있는 성가대 석에 소박한 수준의 장미창이 있다.

살기가 좀 나아지면서 새로운 성당을 지을 때 유리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스테인드 글라스는 아니더라도 비닐 종이라도 발라 나름대로의 빛의 미학을 표현하고자 여러 시도를 하고 있으나, 담당자들의 의식부족으로 유치찬란한 졸작을 양산해서 전례 참여에 분심은 물론 민망함을 느낄 때가 많다.

이런 답답한 현실에서 부산 남천동 주교좌 성당에 인천 가톨릭 대학교 종교 미술학과 부장으로 있는 조광호 (엘리지오) 신부님이 만든 수작(秀作)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제 우리 교회에도 우리 작가들의 능력으로 수준급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뿌듯한 자부심을 확인케 하며, 이것은 지붕까지 포함해서 성당 전체를 감싸고 있는 유럽에서도 보기 드문 대작(大作)이기에 꼭 한번 마음먹고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대단한 기대를 걸었던 어떤 과학자의 연구 발표의 실상과 허상이 드러나자, 많은 사람들이 망연자실의 허탈감에 빠지면서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린 당사자들에 대한 마녀 사냥을 연상케 하는 추적이 시작되어 온갖 실망스러운 소문이 꼬리를 물며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초월적인 하느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챤들은 그 장본인들을 원망하기 이전 그 장본인들을 부추긴 전체 국민정서에 대해서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 삶이 전부인양 건강과 무병장수를 통해 안락과 편리와 쾌락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목적 정서가 사회 전체에 너무나 강했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시도가 가능했다는 점을 반성하면,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지상적인 삶의 허구성을 꿰뚫으며, 하늘나라에 대한 끝없는 감미로움과 그리움을 장미창을 통해 표현했던 중세인들에게서 병든 현대를 치료할 수 있는 묘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허탈한 와중에서 새해를 맞으면서 바라보는 장미창은 우리에게 삶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북극성이요 나침반으로 볼 수 있다.





< 작은 예수회 이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