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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성가족 (거룩한 친교 ) / 바브리나 알비세 "


제 목 : 성가족(거룩한 친교 : Sacra Conversazione) 작 가 : 비브라니 알비세 : Vivrani Alvise : 1445- 1503) 규 격 : 템페라 목판 : 175 X 196 cm 소 재 지 : 이태리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성 미술은 시대를 더하면서 단순히 교회 장식적 차원이 아닌 교리 교수적인 차원이 더 강해지고 위치나 형상에 있어서도 복음 선포의 차원에 더 신경을 쓰게 되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되는 것이 신자들의 시선 집중이 가장 잘 되는 장소에 작품을 남기는 제단화이다.

제단화의 시작은 1105년 베네치아의 총독 오르델라포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주문한 성 마르코 대성당의 황금제단화(Pala d, oro)인데,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효시로 13세기부터 제단화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는데, 예술에 대한 대단한 심미안에다 풍요가 겹친 베네치아는 성당마다 경쟁하듯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 제단화의 등장인물은 성모자와 함께 그 지역의 수호성인들이 되었으며, 신자들은 성모자와 함께 등장하는 성인들에게 기도함으로서 모든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크리스챤 신앙의 정수를 쉽고 감동적으로 접할 수 있었기에 제단화에 대한 신심은 갈수록 열기를 더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15세기 베네치아 화풍의 대표적인 작품이며,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성가족이란 주제에 이어 “거룩한 친교”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예나 오늘이나 많이 제작되고 있는 성가족을 주제로 한 작품과 달리 크리스챤 성가족의 의미를 폭넓고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가족은 인간 삶의 근간인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가장 결집력이 있는 것으로 중요하나 크리스챤들은 이것을 뛰어 넘어 신앙 안에서의 우정, 즉 형제애를 고귀한 것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통해 모든 사람을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포옹하는 사랑의 관계를 이상적인 가족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이런 관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 예수께서 선교활동을 하고 계실 때 아들을 보고픈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왔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좀 의아하고 매정하게 들리는 표현 “누가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입니까?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내게는 형제요, 어머니입니다.”(마르코 3, 35)라고 하셨다.

이런 성서적인 배경을 바탕에 깔고 있는 이 제단화는 또한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는 자리에서 하늘나라의 성인들을 찬양하고 그들의 전구를 청한다는 차원에서 신자들에게 소중한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 작품은 우선 기하학적인 대칭 관계를 절묘히 설정함으로서 전체적인 균형과 안정감을 더하고 있다. 중앙 옥좌에 앉은 성모자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세 명의 성인들이 성모자를 향해 서 있는데, 왼편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배경으로 각자가 고유한 몸짓으로 성인들을 보면서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이 작품 속에 말려 들어가 성모자를 경배하게 만들고 있다.

6명의 성인들은 고유한 손 모양으로 성모자를 가리키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삼각형 구도를 통해 건축적인 효과를 더하고 있다. 즉 중앙 옥좌에 앉은 성모자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높이를 유지하며 서 있는 성인들은 든든하게 지어진 건축물처럼 관객들에게 안정감과 친근감을 더하고 있다.

바깥 풍경이 보이는 양쪽의 창문을 제외하고 성인들이 서 계신 뒷부분은 짙은 녹색의 커튼으로 차단되면서 서로 다른 자세와 복장으로 서 있는 성인들을 산만하지 않게 한 방에 모인 동료들처럼 조화로운 일체감을 주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6명의 성인들은 왼편으로부터 뚜르의 성 루이 주교,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모님의 부모 되시는 성 안나, 성 요아킴과 함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이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는 성모님의 부모들이며 성모 공경의 연장선에서 성모자의 좌우를 지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뚜르의 성 루이 주교를 제외한 세 명의 성인이 프란치스칸이라는 것은 특별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성인의 모습은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장면인데, 여기서는 성인이 옥좌에 앉아계신 아기 예수님께 시선을 두고 계시며 성모님이 오른손으로 성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친밀감을 표현하고 있다. 성인은 오른손에 백합을 들고 계시는데, 이것은 시각적 효과를 더하기 위한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대단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구약에서 백합은 풍요와 아름다움과 영적 성장을 상징하는데 중세에서는 이것이 정결과 순수함의 상징으로 표현되며, 백합은 성인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성인은 프란치스칸이 되기 전에 기성 수도회였던 아우구스티노 회원으로서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새로 시작된 볼품없는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의 초기 회원들이 사도적인 열정에 불붙어 모로코에 선교를 떠났다가 장렬한 순교 후 귀환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자기 삶의 모든 안정성을 포기하고 더 순수한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극단의 곤경과 어려움 속에서 순회 설교사의 삶을 사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새 생활로 인도하셨다.

그분은 성 프란치스꼬의 허락으로 신학자가 되어 교회 신앙 보존과 회복에 큰 기여를 하셨기에 “복음적 박사(Doctor Evangelicus)"라는 칭호를 받고 계시며 그분에 왼손에 드신 책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로서 교회 박사의 상징이다.




성 프란치스꼬는 다른 형제들과 외모로는 별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서 계시나 그분의 두 손엔 십자가의 흔적이 박혀 있다.

성인이 이승을 하직하시기 전에 라 베르나 산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겪으신 고통의 나눔을 통해서 주님과 일치하고픈 극단의 열정을 표현했기에 그분은 주님의 오상을 받으셨다. 성인의 옆구리에 찢어진 수도복 사이로 보이는 상처와 양손의 못자국은 자기 삶으로 주님의 복음을 너무도 철저히 재현했기에 “제2의 그리스도”로 불리는 성 프란치스꼬의 상징이다.


성 프란치스꼬 곁에 손에 예수 성명의 표적을 들고 계시는 성인은 프란치스꼬회의 큰 개혁자이신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1360- 1444) 이시다.

인생사의 모든 것이 흥망으로 점철되는 역사로 이어지듯, 정신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영적 운동 역시 어느 인간사 못지않게 이완기를 겪어야 하기에, 항상 부패의 나락에서 헤어나기 위해선 개혁자가 필요했다.

성인은 14-15세기에 침체가 시작되는 프란치스칸 개혁에 대단한 역할을 하신 분이며, 순회 설교사로서 그분은 “예수 성명(聖名) 공경 운동”이라는 신심운동을 일으켜 오늘 교회 전례에서도 1월 3일 이 축일을 기억하고 있다.

어느 시대나 다 그렇듯 복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표양이 빈곤한 곳에서는 항상 미신적인 요소가 독버섯처럼 피어나게 마련이며, 성인 당대에도 교회에는 외부의 이단 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 중심의 본질을 망각한 미신적 바탕의 사술(私術)행위가 극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성인은 신앙의 바탕이 허약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이 운동을 일으켰다,


성인이 들고 계신 이 목판엔 십자가를 중심으로 예수님 이름의 희랍어 첫 세글자 " I H S "가 빛나는 태양을 배경으로 쓰여져 있다. 성인이 만든 이 간단한 문장은 성인의 영성적 결실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교회안에서 대단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예수(Jesus)는 히브리말로 “야훼는 우리를 구원하신다.”라는 뜻의 요수아(Josua)에서 유래 했는데, 성인에 의해 이 단순하면서도 신앙의 본질을 극명히 표현하는 이 신심이 퍼져나가면서 신앙의 정화와 쇄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예전이나 오늘에나 유행하고 있는 들을수록 더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신학적 설명이 아닌 깊은 영적체험에서 어우러진 단순한 설명으로 마음속 깊이 와닿는 것이기에 성인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대단한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곤해서 이 시대에 그려진 작품 중에 성인의 행적에 관한 주제가 많은 것은 당시 성인의 영향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제일 왼쪽에 수도복 차림에 목장과 주교관을 쓰고 있는 분은 툴루스의 루도비코 성인(1274- 1297)인데, 이 성인을 등장시킴으로 15세기 유럽에서 긍정적 의미의 프란치스칸 영향력을 보이고자 했다.

성인은 이태리 남부 시칠리아(Sicilia)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 아버지인 왕이 스페인 아라곤(Aragon) 왕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서 다른 두 왕자와 함께 바르셀로나(Barcelona)로 가서 인질 생활을 하던 중 프란치스칸들을 만나게 된다.

신분적인 왕자이기 이전 정신적인 고귀함을 타고난 그는 즉시 복음을 삶 전체로 사는 프란치스칸 영성에 매혹되었고 인질생활에서 석방되자 그의 성덕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제직과 함께 주교로 승품되었다. 그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대단히 영광스러운 주교직을 맡았으나 프란치스칸 삶의 매력을 포기할 수 없어 로마에 와서 형제회에 입회하게 된다.

당시 주교는 종교 지도자이기 전에 지역 군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관계로 복음적인 향기를 풍기기 어려운 처지였으나 성인은 주교이기 이전 프란치스칸이란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해서 모든 점에서 검박하고 철저한 삶을 살았기에 민중들의 대단한 신임을 얻으면서 왕처럼 존경을 받은 성인이기에 주교직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제거하고 복음으로 입힌 성인이시다.

작가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수도복 위에 주교 복장을 입혀 안토니오 성인과 나란히 성모자를 찬송하게 했다.

다른 프란치스칸 성인들과 차이점이라면 주교직의 상징인 목장과 주교관뿐이며 다른 모든 것은 프란치스칸임을 나타내면서 프란치스칸 영성이 교회 지도자들의 쇄신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이고 있다.

한편의 제단화에 네 명의 프란치스칸이 등장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고 프란치스칸 들에게는 대단한 영광이 되는 일이다. 한마디로 당시 교회와 사람들에게 대단한 영적 영향을 주어 대단한 사랑과 신뢰를 받았다는 표현이다.

성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철저한 고행의 삶의 결실인 깡마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깡마른 모습은 동양 수도자처럼 철저한 고행과 극기로 자기 다스림을 수도의 기본으로 여기며 노력했다는 외적 표시이기에, 이들은 입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복음을 전했음의 표식이 된다.

성 프란치스꼬로 시작해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까지 프란치스칸들은 “허물어지는 집을 고쳐라.”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했기에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성인이 될 수 있었다.


아들을 안고 옥좌에 앉아 많은 성인들의 찬송을 받고 계신 성모님의 모습은 수도자들이 저녁 기도 때 마다 바치는 “성모찬송”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성모찬송(루카 1장 46- 56)에서는 구세주의 어머니로 간택되신 성모님이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 내 영혼이 주님을 기리고 내 영이 내 구원자 하느님을 반겨 신명났거니, 정녕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도다. 보라, 이제부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그런데 여기 성모님의 모습은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기쁜 표정이 아닌 약간의 그림자가 드리운 우수에 찬 표정을 짓고 계시는데,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한껏 행복한 예수 아기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으나 이것은 작가의 깊은 신앙체험과 사색의 결실이다.

성모님이 예수 아기를 낳으신 후 팔일 후에 관례에 따라 아들을 봉헌하려 성전에 가셨을 때 예언자 시므온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 두고 보시오. 이 아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며 또 이 아기는 배척당하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혼을 칼이 꿰뚫을 것입니다.“( 루카 2, 34- 36)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새겨 두었다.” (루카 3, 51)

작가는 바로 이 말씀을 명심하며 살아가는 성모님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우수의 표정을 짓고 계시며, 옥좌에 앉아 영광을 받으시는 모습에서도 아들의 수난에 동참하신 어머님의 깊은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가 활동하던 1400년대 베네치아는 새로운 항로의 개발을 따라 국제 무역에 투자한 것이 대박이 터지면서 경제적으로 대단한 호황기를 누리게 되며 이때 베네치아는 당시 유럽 어느 나라도 누릴 수 없는 대단한 부와 사치를 누리게 되었음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여자들의 사치와 멋내기는 대단해서 당시 여자들의 의상은 오늘날에도 감탄할 만큼 대단히 고급스러운 것이 많았음을 역사는 전하고 있다. 베네치아 여성들이 애호하던 옷감으로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만든 비단, 피렌체의 견직물 등 유럽의 고급 물건치고 베네치아에서 구할 수 없는 고급 물품은 없다고 할 만큼 대단한 사치를 누렸다.

작가는 이런 베네치아의 모습을 남기려는 듯 성모님의 무릎 부분에 성모님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당시 베네치아 여성들이 애호하던 고급 비단을 걸쳐 두었다. 대단한 물질적 풍요속에서도 “여러분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오 6:25)는 말씀을 살 수 있는 영적 바탕과 힘을 제공한 것은 우리 프란치스칸 성인들이었다.

한마디로 베네치아가 이룬 고급문화, 물질적 풍요가 타락과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세상의 흐름을 뒤엎고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신앙에 바탕을 둔 참된 고급문화 창출에 프란치스칸 카리스마가 큰 공헌을 했음을 작가는 강조하고자 했다.

이 성인들의 가르침과 표양을 따름으로서 극단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세속에 함몰됨이 없이 하느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을 ” (마태오 6: 24) 삶으로 증거했던 베네치아 사람들의 기품이 돋보인다.

좀 살기가 나아지면서 웰빙이라는 단어가 행복의 문을 열수 있는 열쇠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현실에서, 이 작품은 우리 보다 500년 앞서 유럽에서 가장 웰빙을 누렸던 베네치아 사람들의 웰빙 비방(秘方)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 작은 예수회 이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