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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잠자는 삼왕을 깨우는 천사 ~

 



작 가 : 기스레벨뚜스( Gislebertus )
제 목 : 잠자는 삼왕을 깨우고 있는 천사
소재지 : 프랑스 부르군디(Burgundy) 오탱 (Autun)대성당

초세기부터 교회 건축에 있어 신경을 쓴 것이 바로 성인들의 유해를 모시는 것이었으며

 시대를 흐르면서 그 열기는 대단해서 ,그 대성당에 모셔진 성인의 등급이 바로

 그 도시의 위상을 증거하는 듯 여겨 성유물 모시기에 대단한 열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박해 시절 지하교회에서 성찬례를 하면서

 성인들의 무덤을 제대삼아 미사를 봉헌했던 전통을 계승하고픈 갈망에서 시작된 것이다.

교회의 수도인 로마는 당연히 예수님의 직계 제자의 유해를 모셨다는데서 중요 순례지가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사도 베드로 바울로 사도 요한, 사도 안드래아를 위시해서 웬만한 중요 성인의 유해를 모신 대성당이

로마에 있었기에 로마의 위상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여기는 교황좌가 있어서만이 아니라

 중요한 사도들 성인들의 유해를 모신 성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열심한 신자들에게 대단한 매력을 지니게 되었다.

다른 도시들도 성인들의 성해가 자기 도시의 위상을 키우는 것이라

여겨 온갖 정성을 다해 성해를 모시는 경쟁이 생기게 되었다.

피렌체 공국은 세례자 성 요한의 성해를 모시고 그 아름다운 "꽃의 성모 대성당( Santi Maria del Fiori) 를 .

베네치아 공국은 이집트에 있던 성 마르코의 유해를 탈취해다(?) 모실 만큼

 성해 공경에 대한 열정은 중세기 신심의 특징이 되었다.

이것은 현대적 관점으로 .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내용은 동일하지만 표현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할수 있다는 면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런 신심은 당시 유럽의 크리스챤들의 신앙 표현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있는 오탱 (Autun) 대성당은 요한 복음 11장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이 부활시킨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중세기 그 지역의 인기있는 순례지였다.

이 성당에는 중세기 어느 성당이 다 그렇듯 서쪽 중앙문 박공 부분( Tympanum)에 최후 심판에 대한 부조가 있는데,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강조 보다는 지옥벌과 심판에 대한 것을 강조함으로서

최후심판의 부조는 교회 건축의 필수 주제가 되었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벌과 심판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당시 교회의 태도가

신자들에게 영혼의 자유로움을 주기보다 지나치게 죄의식의 강조는

신자들의 삶을 위축시킨 부작용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역시 여느 성당처럼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을 빈틈없이 조각해서

성당 전체가 한편의 펼쳐진 성서로 보였기에 당시 대부분 문맹이었던

신자들에게 더 없이 좋은 종교 교육 자료가 될 수 있었다.

이 대성당에 많은 작품을 제작한 기스레벨뚜스(Gislebertus)는 이 라자로의 성유물을 구해다

 이 대성당에 모신 귀족의 후손으로 알려 져 있으니

 성해 공경에 있어 혈통적 당위성이 제시되면서 순례자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었다.



이 성당에 있는 수많은 부조 중에 이 작품은 특히 그 따뜻하면서도 동화처럼

 낭만적인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내용은 마태오 복음 2장 7- 12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내용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틀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한 것을 알아 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던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 없이 기뻐하였다.

그들은 헤로데로 부터 아기 나실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고,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고

 별을 따라 가서 아기를 찾아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오늘 날 성탄 말구유 장식은 대부분 예수 성탄과 삼왕의 조배를 연결시키고 있으나

 성서에는 예수 성탄과 삼왕의 경배가 분리된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화처럼 따뜻하고 정감있는 이 내용처럼 천사는

곤히 잠들어 있는 세명의 박사를 조심스럽게 깨우고 있다.

성서에서는 이들이 박사라고 되어 있으나 10세부터 교회 전승에서는

이들의 고귀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왕으로 표현했기에 이들은 왕관을 쓴 채 곤히 잠자고 있다.

아쉬움이 없는 처지의 왕인 이들이 오직 구세주를 찾기 위해 천신만고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베틀레험으로 가는 길에 고귀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모습으로 한 베게를 베고 잠에 떨어져 있다.



천사의 옷자락에 이어져 이들이 덥고 있는 반원형의 이불은 빛을 찾아

 긴 여정을 떠난 이들을 기다리는 빛의 상징인듯 파장을 이루면서 이들을 덮고 있다.

세 왕이 서로 다르면서 한 빛의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는 것은

 오직 빛이신 구세주를 찾기 위해 순례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의 몸과 정신, 영혼이 하나임을 표현하고 있다.

천사는 이들을 깨우고 싶으나 이들이 너무도 곤히 잠든 모습이 안스럽게 보여

오른쪽에 있는 왕의 손가락을 가볍게 터치하고 있다.

시험 공부에 몰두하다 곤히 잠든 아들을 깨울 때가 되었는데,

 그 자는 모습이 너무 안스러워서 깨우기 어려워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 천사의 몸짓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인간들의 삶의 공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깊은 사랑과 연민의 모습이다.




천사는 오른 손가락으로 왕을 깨우면서 왼손으로 별을 가르키고 있다.
구세주가 계실 곳을 안내할 별을 바라보라는 뜻이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처럼 조심스럽게 자기 손가락에 닿은 천사의 조심스러운 사랑에

 잠이 깬 왕은 눈을 반쯤뜨고 구세주를 만나기 위해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천사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천사의 도움으로 눈을 뜬 왕은 곤히 잠든 다른 두 명의 왕을 깨워

 베틀레험으로 가서 말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경배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예수 성탄에 이어지는 동방박사의 경배 이야기는 보통 말구유와 함께 만들어지고 있으나

 작가는 이것을 분리해서 천사와 삼왕들의 교감을 너무도 인간적으로 표현해서

 관객들에게 더 따스한 감동을 주고 있다.

에파르트 샤퍼라는 작가는 러시아 민담을 바탕으로 "넷째왕의 전설"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동방 박사의 이야기를 동화의 차원이 아닌 복음의 핵심에 접근하는 방향으로

 승화시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왔다

여기에 의하면 동방 박사는 세명이 아니라 러시아의 왕도 끼어 있었는데,

그는 대단히 유능하고 수려한 젊은이어서 세상 왕의 신분으로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행복의 주인인 구세주를 찾아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는 구세주에게 선물할 많은 보화를 가지고 출발했으나

가는 길에서 만난 많은 불쌍한 사람을 도우는 과정에서 알거지가 되고 ,

종래는 노예로 팔려가는 어떤 부모의 아들을 대신해서

 노예선을 타게 되면서 극도의 고통응 겪게 된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의 와중에서도 그는 구세주를 찾고픈 희망을 잊지 않고

 살아가면서 별의 인도를 받게 된다.


참으로 기적적인 인연으로 삼십년 간의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육지로 올라 왔을 때
언덕 십자가에 달리 젊은이를 발견하고 되고

그가 바로 자기가 일생의 고통을 겪으며 찾았던 구세주임을 알고 더 없는 감격에 젖게 된다.

그러나 그동안 가진 모든 것을 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에게 주어버린

 넷째 왕에게는 그 구세주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 분 앞에 엎드려 당신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에게는 이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소서!"

그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 옵니다.



“네가 네 이웃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대에 따듯하게 맞아 드렸다.

또 내게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 36-37)

이 작품은 성탄 이야기를 훈훈하게 만드는 동화적인 차원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넷째왕의 전설" 작가의 내용을 생각하게 만드는 복음의 핵심으로

관람객들을 인도하면서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