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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29주간 월요일 강론모음 ~

 

 

 


 
                2013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루가 12,13-21)

 

 You fool, this night your life

will be demanded of you;
and the things you have prepared,

to whom will they belong?’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사례를 들며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게 된다고 강조한다. 자식 없이 늙어 가며 나그네살이를 하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은 사실상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시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는 많은 소출을 거두어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삶이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욕심 많고 쾌락적인 한 사람이 죽어서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그야말로 그가 살기에는 참으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온갖 하인들이 그를 섬기고, 주위에는 무엇이든지 풍부했습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만족해하며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아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천국에 보내 주셨구나.’
그런데 이러한 생활도 하루 이틀이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쉬울 게 없다 보니 처음에는 좋았던 것들도 하나하나 싫어졌습니다. 더 이상 희망할 무언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인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나 참! 이상하네. 천국에 왔으면 행복해야 하는데, 지루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네. 이 어찌 된 일인가?” 그러자 하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지금 이곳을 천국으로 아셨단 말입니까?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이곳은 지옥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것이 풍족하거나 넘친다 해도 희망할 것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곳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들만 있지,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결국 한계를 드러내어 지루함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코헬렛은 이렇게 말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1,2)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진정 어리석은 이유는 하느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 나오는 행복이란 없습니다. 일시적인 만족이나 안정은 있을지언정 그것은 결국 허무함과 지루함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참된 행복을 보장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까?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뚱뚱한 사람이 더 오래 산다.’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비만이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라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따라서 비만이 오히려 생명의 연장에 손해를 줄 것 같은데, 사실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어 보니 조금은 공감이 갑니다.

마른 사람들은 운동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굳이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운동하지 않는 마른 사람은 병에 대한 면역력이 줄어들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뚱뚱한 사람들은 열심히 운동합니다. 살을 빼기 위해서 라는 목적으로라도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그 결과 운동의 효과를 보게 되어 각종 질환을 예방하고 따라서 장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물론 이미 병에 걸려 있는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우리 모두 누구나 다 열심히 운동을 해서 건강해야 합니다. 하지만 부와 명예를 얻어야 한다는 이유로 건강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또한 자신이 지금 건강하다는 이유로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경우도 우리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과연 하느님께서 주신 이 육체를 제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 삶의 풍요를 위해서 건강까지 해치면서 그렇게 애를 쓰지만,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동안 애를 쓰며 모은 풍요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산은 자기를 위하여 모으지 말고 하느님을 위해 모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재물에 무관심해질 수 없지요. 재물은 이 세상을 살기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재물은 살기 위한 수단이지 삶의 목적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만 필요한 재물을 쌓아 놓으려고만 애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을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결코 순간적인 만족을 위한 것을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재산을 모은다는 것은 결국 이웃을 위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을 위하며 어렵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산의 축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는 마음, 그래서 내 이웃들에게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과연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사랑 같은 우정은 따뜻하다. 우정 같은 사랑은 한결같다(토머스 모어).

 

 


 어리석은 부자   

- 이연수-

 

부자는 큰 창고를 지어 평생 먹고도 남을 재산을 쌓아 두고,
쉬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재산 증식과 안락한 생활만을 생각하는,
아주 약삭빠른 사람입니다. 남들보다 가진 게 많은데도, 남들에게 눈을
돌리기는커녕 자신의 배만 불리는 데 머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 하루 품삯이나마 벌어 보려고, 가족의 주린 배라도
채우려고, 이른 아침부터 일용시장에 나와 있는 아비의 퀭한 눈을 본 적이
있을까요?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을 겁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제 재산을 기꺼이 나누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을 테니까요. 그에게는
자신의 안위를 지탱해 줄 든든한 재물만이 있을 뿐 헐벗고
가난한 이의 얼굴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재물이 하느님인 셈이죠.
한마디로 하느님께 마음을 쓰지 않는, 하느님을 잊은 사람입니다. 오늘 당장
하느님께서 제 목숨을 되찾아 가실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 나를 둘러싼
사회는 보지 못하고, 먼 미래의 안락함만 꿈꾸는 어리석은 부자이지요.
참된 부자는 재물을 탐욕스럽게 긁어모으기보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웃에게 제 재산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이입니다.
그냥 부자가 아니라 하느님을 잊지 않는 참된 부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걱정으로 고갈된 생명
-오일환-

 

누구나 바라는 것을 마음껏 가질 수는 없지만, 뭔가를 적게 가지는 것과 결핍감으로 시달리는 것은 다른 듯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부자는 더 큰 곳간을 지어 더 ‘탄탄한’ 미래를 준비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과정의 탐욕과 갈증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때론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어떤 것을 얻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고 목말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얻으면 행복해지는 것은 잠시뿐, 다음엔 또 다른 부족한 것을 ‘찾아내서’ 다시 자신을 채근합니다.
놀랍게도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불안감이 ‘스스로 만들어낸’ 걱정으로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영적 안식이 고갈되어 가는 것입니다. 비단 재물뿐 아니라 생활의 일터에서도 그 일이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 잘못됐을 때 받을 비난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일 자체에 드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단지 ‘걱정’하는 데 쓰기도 합니다.
이런 ‘걱정’에 가득 찬 인생에 대해 예수님은 어리석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처럼 들에 핀 꽃처럼 살라고 하십니다. 꽃들은 쉬지 않고 땅의 물을 빨고 있고, 새들은 새벽부터 쉬지 않고 먹이를 구하러 날아다닙니다. 그러나 우리와 한 가지 다른 게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갈 뿐, 스스로 만들어낸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시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살아가는 것과 쫓기면서 사는 삶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위한 고단함인가    


-김귀웅 신부-

 

농촌은 1년 내내 바쁩니다. 옛날에는 농번기와 농한기가 있었지만 요즘은
1년 내내 농번기입니다. 비닐하우스를 짓게 되고, 겨울에도 난방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생겼습니다. 겨울철에도 자랄 수 있는 품종을 개발하면서 땅은
쉴 틈이 없습니다. 이곳 제주에서 한겨울에 노지에서 자라는 푸른 채소들을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신기함 뒤에는
농민들의 피곤함이 가득합니다. 장마가 계속되는 20여 일이 유일한
농한기입니다. 물론 틀림없이 30-40년 전보다 더 부요하고 풍요롭게 살게
되었지만,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스콧트
니어링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신자들에게 종종 들려드렸습니다. 교수 생활을
접고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스콧트 니어링은 생계를 위한 노동
네 시간, 지적 활동 네 시간, 좋은 사람들과 친교하며 보내는 시간 네 시간이면
완벽한 하루가 된다며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하루 네 시간만 일했고, 아무리
물건에 대한 주문이 많아도 자신들이 정한 양 이상은 생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조화로운 삶이라 표현합니다. 그러나 해도 뜨기 전에
밭에 나가서 해가 져야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신자들을 보면 애달파집니다. 저녁에 그 피곤한 몸으로 성당에 와서
기도하고 레지오 모임을 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분들입니다.

 


 


행복의 제1요소

- 김지영-

 

돈이 얼마나 좋습니까? 행복을 가져다주는 물건입니다. 요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중 행복의 제1요소로 돈을 꼽는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항상 좋기만 한 물건, 항상 좋기만 한 일 이런 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지요.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모두가 잘 쓰면 약이지만 못 쓰면 독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날마다 돈 때문에 가족이건 친구건 낯선 사람이건 죽이는 일이 허다합니다. 실상 따지고 보면 예수께서 사시던 2천 년 전 또는 훨씬 그 이전이나 지금이나 돈은 인간 역사에서 행복이자 불행이었고 빛이며 그림자요 천국이자 지옥이었습니다. 오늘 예수께서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라고 강조하신 이유도 역설적으로 현실이 그만큼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사람보다 돈을 우선하는 풍조가 극심해지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문적 성찰이 피폐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죽고 나면 모두 소용없는 일, (거룩한 희생은 또 다른 경우입니다만) 뭐니뭐니 해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교황의 서재에는 미국 시인 맥스 어먼(1872­-1945)의 <진정 바라는 것(Desiderata)>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고 하는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더라도 내가 하는 일에 온 마음을 쏟는 것/그것이야말로 변할 수밖에 없는 시간의 운명 안에서 진실로 소유할 수 있는 것….’
우리의 생명이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어먼의 시는 ‘앉은 자리가 꽃자리’ 또는 ‘여기가 천국’이라는 말의 동의어입니다. 천국은 죽어서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보다 돈을 우선으로 앉힌다면, 곧 왜 사는지도 모른다면 천국은 살아서 갈 수 없고 죽어서도 갈 수 없는 곳이 되겠지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 이윤벽 신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형태를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유형태의 삶과 존재형태의 삶으로 나눌 수 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달리 첫 번째 “소유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어느 학교 졸업장을 가졌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의 평수가 어떻다’, ‘유명한 사람과 친분이 있다’..... 라는 식으로 자기가 소유한 양에 따라 삶의 성공여부를 결정짓습니다. 이러한 소유형태의 사람은 절대 무엇을 남에게 내어놓지 않게 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소유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형제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기가 사랑해야 할 가족이나 형제들을 제한하고, 감금하고, 통제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자기식대로 상대방을 숨을 못 쉬게 질식시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라고 합리화 시켜 버립니다.

요즈음 65세 이상의 황혼이혼이 급격히 는다고 하는데 소유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두 번째로 “존재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것을 남에게 베풀 때 기쁨을 느끼고, 있는 그대로 존재형태의 삶을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즉, 나의 있는 그대로의 지금 모습이 좋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어느 화가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화가의 집에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짐을 다 내리고, 새댁이 안고 있는 아기를 보았는데, 그 아기의 한쪽 눈이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지 사고로 그랬는지 그 이쁜 얼굴에 한쪽 눈이 흉측하게 감겨져있는 겁니다. 며칠이 지나고 화가가 우편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계단위에서 새댁이 한손에는 아기를 안고, 한쪽 눈을 감고 쩔룩거리며 내려오고 있는 겁니다. 그 화가는 마음속으로 ‘참 이상한 여자도 다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또 며칠이 흘렀습니다.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새댁이 한손에는 아기를, 한손에는 사진을 들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진은 잘못된 한쪽 눈을 감출수가 없지요. 아기엄마는 자기 안방에 이쁜 아기 초상화를 달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잘못된 한쪽 눈도 이쁘게 그려 달라고 지극정성으로 화가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화가는 다른 그림과는 달리 아기의 초상화를 몇 날 몇 일을 정성껏 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아기 눈의 눈동자를 손을 떨면서 그려 넣고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아기 엄마에게 가져다주니 그 엄마는 너무나 좋아하며 화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아기가 조금 더 크면 저의 한쪽 눈을 아기에게 이식해주기로 했답니다. 그 생각만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지금부터 길을 갈 때나, 밥을 지을 때나, 빨래할 때나 한쪽 눈을 감고 살아가는 연습을 한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준다는 것에서,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푼다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때 산수를 배웠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그런데 이 중에서 무엇을 제일 먼저 배울까요? 맞아요. 더하기를 제일 먼저 배우지요. 그리고 나누기는 제일 나중에 배웠고, 이것이 가장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더하기와 곱하기에 집중하고 있을 뿐, 나누기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즉, 자기 자신의 물질적인 재산 증가에만 관심을 두고 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데에는 인색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인 재산의 더하기와 곱하기의 끝은 과연 어딜까요?

얼마 전, 신문기사에서 요즘 사람들이 느끼는 부자의 기준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30억은 있어야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그마치 44%인 것입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1억만 있어도 부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렇다면 10년 만에 물가가 30배 뛰었을까요? 아니지요. 우리들의 욕심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심은 더하기와 곱하기를 계속하면서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더하기와 곱하기가 우리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나누기를 통해 더 큰 기쁨을 얻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나누기는 자신의 재산의 줄어듦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재산과 함께 욕심도 줄기 때문에,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눔을 통해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내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탐욕입니다. 끝없는 더하기와 곱하기. 바로 이것이 나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나를 지켜주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나눔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오늘 복음을 통해 비유로 말씀하신 창고에 가득 쌓아진 물건에 모든 것을 맡기고서 안심을 하는 부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대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래서 주님처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신앙인인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더하기와 곱하기의 삶만을 추구했을까요? 아니면 빼기와 나누기의 삶을 추구했을까요?

 

 

충동구매를 하지 맙시다. 이것도 욕심입니다.


 빠다킹신부

 

 

 영혼의 소망, 예수님의 양식, 아버지의 뜻과 일    

-이성우-

 

 우리 영혼은 무엇을 먹고 살아갑니까? 이 부자는 영혼을 위해 밀과 재물을 쌓아두었습니다. 그 밀과 재물이 이 부자의 영혼 구원에 도움이 되었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다른 것을 원합니다.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을 찾아 하는 것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길이고, 그것은 또한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 4장 32절에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야 하는 길을 모범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양식으로 삼으셨는지 살펴보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기도와 성경묵상을 통해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아갈수록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게 되고 내 삶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럴 때 아버지의 일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가장 바라는 것은, 내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디에 쌓아둘 것인가?

-최명숙 목사-

 

 도시에서 자란 내가 전원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다 신기했습니다. 도심지의 인위적 공간이 아닌 자연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생명이었습니다.
벽에 붙은 작은 종이조각을 떼내려 손을 댔다가 호로롱 날아갈 때야 깜짝 놀라 그것이 나비였음을 알게 되었고, 옷에 묻어 있는 먼지까지도 풀벌레였던 경험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눈에 보이는 어떤 점 하나라도 모두가 움직이는 것만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새벽 산책길에 점점이 깔린 수많은 새끼 달팽이들을 미처 못 보고 휠체어로 지나갔다가 후에 그것들이 다 죽은 것을 알았을 때 소름이 끼쳤습니다. 또 새벽에 기도하러 예배당에 올라갈 때면 밤새 쳐놓은 거미줄이 내 몸에 덧없이 무너지는 것을 느낍니다. 미물이지만 그들의 삶이 소리 없이 부서지는 것을 느끼면서 끊임없는 교통사고, 갖가지 산업재해, 천재지변을 비롯해 예측할 수 없는 사고에 노출된 우리 역시 언제 어떻게 무너져 우주의 기운 속에 용해되어 버릴지 모르는 존재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계획으로 미래의 삶을 보장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현실적인 보장과 계획에 매일수록 그것은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처럼 더 크게 짓고, 더 많이 쌓아두고 싶을 때 한 번쯤 쌓아둘 장소를 선별해 볼 일입니다. 어디에 쌓아두어야 할지 현명하게 선택할 일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천국을 지향하는 가치관과 인생관이 현실 속에 세워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실을 초월해 천국의 보화를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영적 삶을 살 때 우리가 언젠가 가게 될 그 궁극적인 천국을 이 땅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마태 6,19-­20).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 이윤벽 신부-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형태를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유형태의 삶과 존재형태의 삶으로 나눌 수 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달리 첫 번째 “소유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어느 학교 졸업장을 가졌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의 평수가 어떻다’,  ‘유명한 사람과 친분이 있다’..... 라는 식으로 자기가 소유한 양에 따라 삶의 성공여부를 결정짓습니다. 이러한 소유형태의 사람은 절대 무엇을 남에게 내어놓지 않게 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소유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형제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기가 사랑해야 할 가족이나 형제들을 제한하고, 감금하고, 통제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자기식대로 상대방을 숨을 못 쉬게 질식시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라고 합리화 시켜 버립니다.
  요즈음 65세 이상의 황혼이혼이 급격히 는다고 하는데 소유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두 번째로 “존재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것을 남에게 베풀 때 기쁨을 느끼고, 있는 그대로 존재형태의 삶을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즉, 나의 있는 그대로의 지금 모습이 좋고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어느 화가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화가의 집에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짐을 다 내리고, 새댁이 안고 있는 아기를 보았는데, 그 아기의 한쪽 눈이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지 사고로 그랬는지 그 이쁜 얼굴에 한쪽 눈이 흉측하게 감겨져있는 겁니다.  며칠이 지나고 화가가 우편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계단위에서 새댁이 한손에는 아기를 안고, 한쪽 눈을 감고 쩔룩거리며 내려오고 있는 겁니다. 그 화가는 마음속으로 ‘참 이상한 여자도 다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또 며칠이 흘렀습니다. 
 초인종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새댁이 한손에는 아기를, 한손에는 사진을 들고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진은 잘못된 한쪽 눈을 감출수가 없지요. 아기엄마는 자기 안방에 이쁜 아기 초상화를 달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잘못된 한쪽 눈도 이쁘게 그려 달라고 지극정성으로 화가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화가는 다른 그림과는 달리 아기의 초상화를 몇 날 몇 일을 정성껏 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아기 눈의 눈동자를 손을 떨면서 그려 넣고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완성된 그림을 아기 엄마에게 가져다주니 그 엄마는 너무나 좋아하며 화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아기가 조금 더 크면 저의 한쪽 눈을 아기에게 이식해주기로 했답니다. 그 생각만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지금부터 길을 갈 때나, 밥을 지을 때나, 빨래할 때나 한쪽 눈을 감고 살아가는 연습을 한답니다.”
 
  형제 자매여러분
  준다는 것에서,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푼다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양승국신부-

 

 

<매일 저녁 되풀이해야할 고민 한 가지>

 


직장인들을 상대로 한 거짓말 조사 결과 이런 거짓말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출근하지 못할 것 같아요.”

 


“거래처 좀 다녀올게요.”

 


“차가 너무 막혀 출근이 늦었어요.”

 


“집에 일이 있어 일찍 퇴근해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에 갔다 오느라 늦었습니다.”

 


“난 거짓말 같은 것 할 줄 몰라요.”

 


며느님들이 시어머님께 주로 하는 거짓말 Best 5도 있더군요.

 


5위: 저도 어머님 같은 시어머니가 될래요.

 


4위: 전화 드렸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3위: 어머님이 한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2위: 용돈 적게 드려 항상 죄송해요.

 


1위: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 한 며칠 더 계시다 가세요.

 


어르신들은 이런 거짓말을 많이 하신답니다.

 


“내가 얼른 죽어야지!”

 


말은 그렇게들 하시지만 정말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과제가 죽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녕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에, 또한 가장 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죽음을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죽음처럼 공평한 것이 또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부자건 거지건, 최고 권력자건 평민이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피하고 싶더라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손님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매일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잘 있으라는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한 채 순식간에 이 세상을 떠나가지만, 그 죽음이 적어도 내게는 아직 멀었으려니, 내게는 해당되지 않으려니,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때로 죽음이 내가 매일 출입하는 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생각하지도, 준비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내 죽음이 올해 연말이라면, 이번 달 말까지라면, 아니면 오늘까지라면, 우리들 삶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불안, 공포, 초조에 떨기도 하겠지만, 남아있는 생을 마무리하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도 할 것입니다. 내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기도 할 것입니다. 이웃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나? 아직 화해가 안 된 사람은 누구인가 돌아보기도 할 것입니다. 너무도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지난날을 가슴 치며, 남아있는 시간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것입니다.

 


사실 성화(聖化)의 비결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을 내 생의 마지막으로 여기고, 매일 저녁 위와 같은 고민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

-이기양 신부-

형제 사이를 갈라놓고 심지어 부모 자식 간의 왕래마저 끊게 만드는 사건의 내막에는 대부분 재산 다툼이라는 어두운 면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재물 때문에, 그것도 부모가 일생 고생하며 모아 놓은 재산을 놓고 형제들끼리 싸우고, 불화가 생기면 부모를 찾아뵙지도 않는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요즈음 너무나도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부모의 유산을 놓고 형제끼리 다툼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동생이 억울하다며 예수님을 찾아와서 도와 달라는 청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형제들에게 과연 어떠한 가르침을 주시는지 우리는 관심있게 살펴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재산 문제로 생기는 많은 불행의 원인들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지혜롭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함께 묵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재산에 대해 불공평한 자기 형에 대해서 예수님께 이르고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 비유에서 나오는 부자는 창고를 늘려서 많은 곡식들을 쌓으며 이제 몇 년은 걱정할 것이 없으니 실컷 마시고 즐기자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몰랐지요. 바로 그 날 밤에 그의 영혼은 그에게서 떠나갑니다. 그러면 부자가 애써서 지어놓은 이 재물 창고는 누구의 것이 되는 걸까요? 참으로 허무한 일입니다. 욕심만 부리고 제대로 잘 쓰지도 못한 채 인색하게 살다가 부자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쌓아놓은 것을 그대로 다 놔두고 갈 수밖에 없었지요. 모아 놓은 재물을 싸가지고 가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큰 부자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살아생전에 선행을 한 것이 있어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앞장서서 천국을 안내하고 부자가 살게 될 집을 찾아갑니다. 역시 천국은 천국이었지요.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 부자는 연신 벙글거렸습니다.

㰡역시, 천국은 다르군. 아, 여기서 살게 되었다니 정말 좋구나.㰡‘

그런데 천사는 그 으리으리한 저택들을 계속 지나쳐 가기만 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부자는 더 좋은 집을 기대하며 천사를 따라갔습니다. 둘은 그 다음 마을로 들어섰는데 이 마을에는 50평, 100평이 넘는 최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하였습니다.

㰡그러면 그렇지. 여기도 살만은 하겠군.㰡‘

부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집을 찾고 있는데 이번에도 천사는 그 마을을 휙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보니 저만큼 달동네가 나왔습니다.

㰡설마 저 곳은 아니겠지.㰡‘

이렇게 생각하며 가는 부자에게 천사는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세워진 어느 쓰러져가는 판잣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㰡’여기가 당신이 살집입니다.㰡“

화가 치민 부자가 따졌습니다.

㰡’무슨 소리이십니까? 저는 지상에서 살 때에도 호화주택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아니 천국에 와서 이렇게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서 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㰡“

그러자 천사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㰡’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지상에 살면서 보내준 건축 자재로 지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니까요.㰡“

우리는 70, 80년의 인생을 정말로 아등바등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아끼고 모아서 저축을 하는가 하면 남은 인생을 위해서 보험까지도 들지요.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세상에서는 이것저것을 일구고 저축하며 아끼고 보험도 들어 놓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하늘 나라에 얼마나 저축을 해 놓으셨는지요? 집 한 채 지을만 하신지요?

하늘 나라에는 아랑곳없이 안타까울 정도로 세상에만 몰입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인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가족을 위해서는 풍요롭고 넘치게 살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인색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중심에 계셔야지 사람을 사랑하고, 부모와 형제를 존경하며 이웃과 함께 나눌 수가 있게 됩니다. 하느님 대신 재물이 중심에 온다면 하느님을 외면하고 부모, 형제도 외면하는 탐욕스런 재물의 노예가 될 뿐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산 분배에 대한 불평으로 괴로워하며 가르침을 청한 청년에게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두며 하느님과 이웃에 인색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당부이시지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이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영원히 잃지 않을 재물, 진정한 재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느님과 이웃입니다.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

-강영구 신부 -

 


+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그대에게

구두장이 세몬의 가게에 미하일이라는 청년이 수선공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땅으로 쫓겨난 천사입니다.
그가 풀어야 할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사람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이 세 가지 문제를 풀면 미하일은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이야기 안에 그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당신도 이 문제를 풀고 그 해답대로 산다면 하늘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한 번 풀어보시겠습니까?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 운명의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큰 창고를 다시 짓고 곡식과 재산을 쌓아둘 궁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그는 다음 날 아침 해 뜨는 광경을 보지 못하고 맙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한 시간 후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와 당신에게 허락된 시간과 장소는 ‘지금, 여기’뿐입니다.
한 시간 후 나와 당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여기’서 사랑하는 생활을 하십시오.(一明)

 


집착과 탐욕, 자유와 청빈

-박상대 신부-

 

  부자(富者)와 빈자(貧者), 소유(所有)와 포기(抛棄)에 관한 문제는 루가복음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 가진 것이 많으면 삶의 영위에 다소 풍족함이 있겠으나 그만큼 걱정이 많게 되고, 가진 것이 없으면 아쉬움은 있으나 걱정은 그만큼 적다. 소유는 집착과 탐욕을, 포기는 자유와 청빈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부자는 육체를 따라 살고, 빈자는 영혼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는 재물로 삶의 고통을 이기려 하지만 빈자는 영혼으로 그 고통을 극복해 나간다. 루가복음은 12,13-34에서 예수님의 부(富)와 빈(貧)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원칙적으로는 율사들이 민사소송의 판결을 내리는 법이다. 허나 율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리신(11,45-52) 예수님께 유산의 정당한 분배를 요청하는 것이 그렇게 무리는 아닌 듯 싶다.(13절)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당신을 재판관이나 재산분배자로 세웠냐는 반문으로 요청을 일축(一蹴)하셨다.(14절) 이는 예수께서 젊은이의 요청을 막연히 피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요청 안으로 파고들 심산(心算)이셨던 것이다.

 

  가르침의 핵심은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15절)는 것이다. 재산은 오히려 탐욕을 불러와 생명을 더 위태롭게 할뿐만 아니라, 탐욕이 극에 달하면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가 잘 말해준다. 예화에 등장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은 자기 밭에서 얻은 많은 소출을 전부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한데 있다. 부자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사고와 행동의 소유자이다. 부자는 소유와 저장을 바탕으로 인생을 만끽할 계획을 세우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계획으로 끝나버린다. 이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바로 그날 밤 부자의 숨을 거두어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그렇지, 좀 심한 처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달렸다. 주인이신 그분이 원하시면 그렇게 도로 가져가시는 것이다.

 

  다음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305억원 기부" 사실에 대한 부산일보 2003년 10월 16일자 5면에 게재된 사설 1의 내용이다. 부산 동래구 금사동 소재 "㈜태양 송금조 회장이 사재 305억원을 털어 부산대학교에 대학발전기금으로 출연했다... 지방에선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기부금 소식인 데다 상상을 뛰어넘는 거액이어서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 송 회장의 출연금은 대학발전기금으론 국내 최고액이다. 자고 나면 정경유착의 검은 돈 수수 관련 기사가 매스컴을 장식하는 세태에서 송 회장의 기부금 소식은 세상을 살 맛나게 만든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송 회장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향토기업인으로 꼽힌다. 송 회장은 기업경영으로 많은 돈을 모았지만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알뜰 기업인으로 알려졌다. 305억원은 송 회장이 입을 것, 먹을 것을 아끼며 모은 재산이라고 한다. 이같이 모은 돈을, 그것도 거액을 선뜻 내놓았으니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기부인가. 송 회장은 탄탄한 기업들과 학교(부산 북구 구포동 소재 경혜여고)까지 소유하고 있지만 일상생활은 근검절약 그 자체라고 한다. 송 회장은 평소에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알뜰히 모아 좋은 일에 쓸 것’이라고 말해 왔다. 이번 기부금 쾌척(快擲)은 송 회장의 생활철학을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송 회장은 부산대에 인재 육성을 당부했다. 인재를 키워야 지역의 미래가 보장된다는 노(老) 기업인의 예지를 읽을 수 있다. 김인세 총장은 ’송 회장의 뜻에 따라 부산대를 세계 속의 명문대학으로 발전시키고 인재 양성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약속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이다. 동시에 부럽다는 생각도 해봤다. 사람의 마음 안에 하느님을 위한 공간의 마련은 수고 없이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재물을 인생의 전부인양 여기면 사는 삶은 시편작가가 말하듯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14,1) 라고 생각하는 실용적인 무신론자(無神論者)의 삶과 같다. 다행히 세상에는 부자보다는 빈자가 더 많다. 자기 탓이든 남의 탓이든 세상에 빈자가 더 많다는 것은 실용적인 유신론자(有神論者)가 더 많음을 뜻한다. 실용적(實用的)이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서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나 생(生)을 마감하는 순간에는 누구나 하느님 앞에 실제적인 유신론자가 되어 빈손으로 그분 앞에 서야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야>(루가12,13-21)
 

-유광수 신부-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어리석은 자란 그리스어로 아폴론(apholon)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현명하지 못한, 지각없는, 단순한, 어리석은, 무지한, 참 종교에 대한 지식이 결여된, 허무한, 겉치례하는 이라는 뜻이다.

 

로마서에 보면 유다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율법을 배워서 사리를 분별할 줄도 알고 눈먼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되고 어둠 속을 헤메는 사람에게는 빛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으므로 무식한 사람에게 지도자가 되고 철없는 자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로마 2,17-20) 하느님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스스로 하느님을 알고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무식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요, "참 종교에 대한 지식이 결여된 사람이요",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어리석은 자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하느님인양 착각하고 섬기는 이들로서 우상을 섬기는 이다. 그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마치 자기 생명을 영원히 지켜 줄 것이라고 믿고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이다.

"불신자는 이렇지 않나니 이렇지 않나니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도다. 불신자는 심판 때에 버티지 못하리니 의인의 모임에서 죄인도 그러하리라."(시편 1,4-5) 어리석은 이들이 믿고 있는 우상들은 결국 심판 때에 버티지 못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은 것들이다.

 

어리석은 자가 섬기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많은 소출을 내었다."고 말했다. 땅이 소출을 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많은 소출을 내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소출을 낸 부유한 사람의 땅은 하느님의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부유한 사람은 땅에서 많은 소출을 내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만 재산을 모았다. 결국 이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산을 섬겼다. 재산이 자기 자신을 쉬게 해주고 먹이고 마시고 즐거움을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 대신 재산을 섬긴 것, 그것이 우상을 섬긴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총체적으로 어리석게 살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그 동안 어리석은 말을 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어리석게 살은 것이다. 결국 영원한 것이 아닌 사라지고 마는 재산을 마치 영원한 것인양 섬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재물에 자기 생명을 맡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존하는 사람이다.

 "주여,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었나이다... 천녀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같고, 한토막 밤과도 비슷하오니 당신이 앗아가면, 그들은 한 바탕 꿈,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 같이, 아침에 피었다가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서 말라버리나이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듯 가버리나이다. 날수 셀 줄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우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 89, 참조)

라고 기도한 것처럼 하느님께 의존하는 사람이요, 하느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요, 영원한 분이심을 알고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때로는 우상을 섬길 때가 많이 있다. 하느님이 아닌 재물을 또는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 아닌 어떤 사람을, 하느님이 아닌 어떤 물건을, 하느님이 아닌 어떤 자리를 섬기는 경우가 있다. 결국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무엇을 청하고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우리가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으려면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야겠고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올바르게 섬기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상을 섬기는 경우는 대부분 하느님에 대한 무지함이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다. 즉 어리석은 삶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이 시간을 잘 사용해서 어리석은 사람에게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듣고도 계속해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