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10월24일 연중 제 29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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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생각과 취향을 가지고, 각자의 상처와 가치관을 가지고
서로의 다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섞여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세상이다.
또한 어디를 보아도 욕망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는 세상이다.
자연스럽게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분명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 던져진 삶을 살고 있다.
인류가 기억하는 역사라는 시간의 시작부터 온갖 종류의 갈등은 항상 자연스럽게 존재해왔다.
상대적 소신은 다른 시각의 소신을 죽이고자 했고,
각자의 욕망은 성취를 위해 또 다른 욕망을 제압해야만 했다.
선과 악은 공존할 수 없는 체질의 두 세계이다.
그런 선과 악이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세상이고 우리의 삶이다.
악은 철저하게 악의 방법을 고수한다.
쉽게 세상을 손에 넣고자 다양한 분열을 통해 하나의 악이라는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악의 방법이란 단순한 물리적인 폭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때로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흔들어놓으려 한다.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려 헤어나지를 못하게 만들려 한다.
그리고 기회가 되었을 때 주저함 없이 철저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선은 선이라는 이름 때문에 선한 모습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만일 선이 악의 방법과 똑같이 대응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늘 두들겨 맞고, 빼앗기고, 멍 투성이의 바보의 얼굴을 보일 때가 많다.
세상의 돌아가는 모습에 가장 가슴 아파하셨을 이는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셨을 것이다.
이내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바보의 모습으로 살다가 돌아가시게 만든다.
철저한 바보였던 그 외아들은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마저 내어주라 하신다.
겉옷을 빼앗으려 한다면 속옷까지 빼앗기라 하신다.
일곱 번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다.
원수마저 사랑하라 하신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니까 영원한 것에 희망을 걸라고 하신다.
그런 분께서 당신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라 오셨다 한다.
무엇에 대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분열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용서의 대상에 관한 착각이다.
중요한 식별이 요구된다.
악은 결코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악은 용납할 수 없는 소멸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악의 방법이 아닌 선의 방법이다.
악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악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용서하라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뜻은 우리 모두에게 선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 아름다움만이 악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어 있는 영혼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열은 선과 악에 대한 식별로 시작되는 갈라짐이다.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과 증오, 정의와 불의, 강함과 약함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어 생겨나는 갈라짐이다.
식별의 지혜를 청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한 어디를 보아도 욕망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는 세상이다.
자연스럽게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분명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 던져진 삶을 살고 있다.
인류가 기억하는 역사라는 시간의 시작부터 온갖 종류의 갈등은 항상 자연스럽게 존재해왔다.
상대적 소신은 다른 시각의 소신을 죽이고자 했고,
각자의 욕망은 성취를 위해 또 다른 욕망을 제압해야만 했다.
선과 악은 공존할 수 없는 체질의 두 세계이다.
그런 선과 악이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세상이고 우리의 삶이다.
악은 철저하게 악의 방법을 고수한다.
쉽게 세상을 손에 넣고자 다양한 분열을 통해 하나의 악이라는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악의 방법이란 단순한 물리적인 폭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때로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흔들어놓으려 한다.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려 헤어나지를 못하게 만들려 한다.
그리고 기회가 되었을 때 주저함 없이 철저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선은 선이라는 이름 때문에 선한 모습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만일 선이 악의 방법과 똑같이 대응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늘 두들겨 맞고, 빼앗기고, 멍 투성이의 바보의 얼굴을 보일 때가 많다.
세상의 돌아가는 모습에 가장 가슴 아파하셨을 이는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셨을 것이다.
이내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다.
그리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바보의 모습으로 살다가 돌아가시게 만든다.
철저한 바보였던 그 외아들은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마저 내어주라 하신다.
겉옷을 빼앗으려 한다면 속옷까지 빼앗기라 하신다.
일곱 번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다.
원수마저 사랑하라 하신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니까 영원한 것에 희망을 걸라고 하신다.
그런 분께서 당신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라 오셨다 한다.
무엇에 대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분열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용서의 대상에 관한 착각이다.
중요한 식별이 요구된다.
악은 결코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악은 용납할 수 없는 소멸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악의 방법이 아닌 선의 방법이다.
악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악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들에 대한 용서하라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뜻은 우리 모두에게 선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하시는 것이었다.
그 아름다움만이 악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어 있는 영혼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분열은 선과 악에 대한 식별로 시작되는 갈라짐이다.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과 증오, 정의와 불의, 강함과 약함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어 생겨나는 갈라짐이다.
식별의 지혜를 청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6,22-23)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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