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Whoever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말씀의 초대
세상은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을 차별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의로우신 심판자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의 겸손과 의로움을 보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재판을 받으며 변론해야 할 때 아무도 자신을 거들지 않고 저버렸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자신을 끝까지 돌보아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제2독서). 의롭다고 여겨지는 바리사이는 자신을 높이는 기도를 하였고, 죄인으로 취급되는 세리는 자신을 낮추는 기도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어떤 이를 의인으로 여기시는지 밝히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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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중국 춘추 시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 안영의 마부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이 마부는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길을 비키고 예를 표하는 모습에 마치 자신이 재상이나 된 듯이 착각하며 말을 몰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부의 아내는 그러한 남편의 모습이 영 못마땅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주인은 키가 여섯 자도 못 되는 분이지만 제나라의 정승이 되어 이름이 천하에 높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항상 스스로 몸을 낮추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키가 팔 척이나 되지만 남의 마차나 끄는 마부이면서도 스스로 우쭐하여 거만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과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마부는 곧바로 아내에게 백배사죄하고 다시는 거만을 떨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마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안 재상 안영이 그 까닭을 마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마부는 아내의 따끔한 충고에 따른 것이라 이야기하였고, 재상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큰 벼슬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재상은, 아내의 말에 공감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마부의 품성을 보고 벼슬을 내렸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사람의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을 높이는 기도를 한 반면, 세리는 자신을 낮추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곧 바리사이는 자신의 눈으로만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잘난 것만 생각났던 것이고, 세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부족한 면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자신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느낌 아니까…
-이성현신부-
사람 1.
사람들이 만날 우리보고 뭐라 뭐라 하는데…
우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말 똑똑하고 훌륭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자꾸 예수님과 우리를 적대적으로 묘사해서 그렇지 루카 복음서를 보면 우리도 예수님과 식사를 3번이나 한 사람들입니다(루카 7,36 ; 11,37 ; 14,1). 예수님도 우리가 식사하자 하면 거절하지 않고 하셨다 이거지요.
우리는 부활을 믿지도 않는 사두가이파들이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권선징악과 부활 신앙으로 무장된 사람들입니다. 생활은 어떻고요? 우리는 정말 검소합니다. 율법도 정말 중요시하지요. 안식일법, 정결예법, 결혼, 개종에 관한 것, 각종 서약과 십일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킵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도 바리사이파로 살아왔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사도 22,3 ; 26,5 ; 갈라
1,14 ; 필립 3, 5-6)? 이 성경 구절들 한번 보시면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다 아실 겁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입니다.
사람 2.
사람들은 우리 세리들을 죄인의 대명사로 취급합니다. 특히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요즘 말로 ‘왕따’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앞잡이 노릇으로 적과의 협력, 민족에 대한 반역,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물론 우리 중에는 부정부패해서 부를 축적한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죄인입니다. 가족들에게도 부끄럽고 하느님께도 죄스럽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식사도 함께하지 않는데,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사람대접 해 주십니다. 정말 감사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조용히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통해 분명히 오늘을 사는 모든 신앙인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사람 1처럼 오만방자해야 할지, 사람 2처럼 겸손해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느낌 아니까…
성장하는 신앙인
-한장우 신부-
이런 의문을 가진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죄인은 성체를 못 모시는 것입니까? 이런 의문을 듣고, 나름대로 답을 찾고자 고민해 본 일이 있습니다.
의인과 죄인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죄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양심입니다. 양심을 거스르면, 죄라고 여기며 양심에 어긋나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은 모두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죄라고 느껴지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행동을 하고도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기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깁니다.
의인은 누구이고, 죄인은 누구인가.
왜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고 하셨는가.
제가 나름대로 얻은 결론은, 사람마다 다른 양심에 의해서 구분되는 의인이니 죄인이니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러 온 이들은 의인이니 죄인이니 하는 구분으로 나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를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성장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를 공유하는 사람들이요, 말씀의 씨앗을 마음속에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고해 성사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성사라기 보다는, 스스로를 성찰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달아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좁은 문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사람들은 의인과 죄인이 아니라, 성장하는 사람과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분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의인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외면하거나 합리화하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제자리 걸음을 하며 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의 부족함을 성찰하고 보다 나은 신앙인이 되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주님의 진정한 제자로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이니 죄인이니 하는 기준에 얽매이기 보다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발전해 나가는 것을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의인'과 '죄인'이라는 구분에 얽매여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일침을 놓으셨던 것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는 말씀은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와 함께하는 성장하는 존재여야만 합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제자일 수 없습니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
-김건태 신부-
제1독서 : 집회 35,15-17.20-22ㄱ
주전 2세기경의 유대인 현인이었던 집회서 저자는 예언자의 설교 모습을 빌어 제사를 바치는 행위만으로 올바른 신앙인이라 자처하던 자들을 거슬러 경고의 말을 던진다. 참된 제사는 제물의 풍요로움이나 의식의 엄격함이 아니라 마음의 회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회개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이웃, 특히 가난하고 억울한 이웃을 향하여 마음을 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선물을 겸손하게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제2독서 : 2디모 4,6-8.16-18
복음전파자로서의 삶을 마감할 때가 다가오자 사도 바울로는 열심히 달려온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나름대로의 평가와 함께 정리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특히 사도는 선교활동 중 굴하지 않고 극복해 온 갖가지 어려움들을 회상하며 주님께 영광을 드림과 아울러 모든 것이 그분의 은총이었음을 고백한다. 사도가 확신을 갖고 기대하는 하늘나라의 보상 또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물일 것이기에 하느님은 영원히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다.
복 음 : 루가 18,9-14
간결한 비유 이야기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의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여기 당당한 모습으로 바리사이파 사람이 서있다. 신심이 깊고 율법준수에 철저했던 사람이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많은 인물이다.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를 예찬하고 있으며 이웃을 단죄하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멀찍이 초라한 모습으로 세리가 서있다. 세리라는 직업만으로 부정직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 취급되었지만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청했기에 올바른 사람 즉 구원의 대상으로 인정받 는다.
- 기도하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은 이래 가톨릭 신자들은 그 무엇보다도 기도로 은총의 선물인 신앙을 가꾸고 키워나간다. 기도를 멀리 하는 신앙은 점차 그 열기를 잃어 냉담이라는 안타까운 현실 앞에 서게 됨을 우리 자신 또는 이웃의 체험을 통해서 자주 확인한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읽고 살필 수 있어야 하며(제1독서), 그분의 뜻대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제2독서). 즉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모시는 신앙자세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 기도는 그러기에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접하고,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늘나라를 지향할 수 있는 유일하며 거룩한 통로이다. 기도를 한답시고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내세우는 일에 급급하거나 나아가 하느님 앞에 똑같은 형제인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를 범한다면 이는 오늘 복음 속의 바리사이파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을 철저하게 비우고 하느님을 중심에 모실 수 있어야 하며, 하느님만이 우리의 속마음을 낱낱이 헤아리시고 이웃관계에 있어서의 속사정을 훤히 꿰뚫어보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할 때만이 우리는 복음 속의 세리처럼 진정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수원가톨릭대학교, 구약성서)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화(例話)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감히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예화의 바리사이는 실제로도 율법을 충실히 지켰을 것입니다. 그는 유대교 신자로서 지킬 것 다 지키고, 바칠 것도 다 바쳤을 것입니다. 유대교가 요구하는 단식은 일주일에 한 번인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단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교가 요구하는 십일조는 주된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인데 그는 자기의 부수입까지 포함하여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지키고 바치는 일에 있어서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감동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 시대 모든 이들로부터 죄인이라 지탄받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이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도 겸손 하라는 교훈으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 예화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하느님의 지평(地平)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인류역사 안에 신(神)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신이 준 계명을 잘 지키고, 제물을 잘 바쳐서 신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해서 소원성취 하라고 권합니다. ‘태초에 두려움이 있었고, 그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생각하게 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신에게 무엇을 바쳐서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어떤 혜택을 받아 내겠다는 민속 종교들의 발생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이들의 마음, 혹은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심청이가 생각하던 종교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빌려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이 생각하는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인간이 자기 소원을 성취 하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내가 잘 지키고 잘 바쳐서, 하느님을 감동시키거나, 그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아서 나 한 사람 잘 되고, 나 한 사람 잘 사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소원성취는 인간 각자가 노력하여 할 일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자기 안에 모셔 들이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자기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비는’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을 스스로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베풀어진 것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려 합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앙인입니다. 잘 지키고, 잘 바쳐서 소원성취 하겠다는 마음은 독재자 밑에 사는 기쁨조가 하는 일입니다. 아니면, 조직 폭력배가 그 두목 앞에서 하는 행동방식입니다. 그것은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의 혜택을 얻어내겠다는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독재자도 아니고, 조폭의 두목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 덕분에 우리가 잘 살아보겠다고 붙여진 호칭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이어받아 그분의 뜻을 존중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면서 살겠다는 자녀의 결의(決意)가 담긴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그 아버지의 일을 실천한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말할 때는 어머니와 대립된 아버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자녀를 낳아 기르고, 그 자녀가 사람노릇 하도록 가르치는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옛날 남성(男性) 위주의 가부장(家父長)사회에서 자녀들과 관련지어 아버지를 말할 때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역할도 당연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신 분, 아버지의 배려로 생명이 성장하고, 자녀가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하여 산다고 말할 때, 아버지라는 호칭 안에는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버리지 않고 세심히 돌보듯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 부모가 자녀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듯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 우리가 부모에게서 세상사는 법을 배웠듯이 우리가 배워 실천하며, 그분의 생명을 살아야 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가 잘 한 일에 만족하고 하느님 앞에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우리들이 흔히 하는 자만자족 현상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열(優劣)을 논하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의 경쟁자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이웃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은 모두 불쌍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우월감 혹은 열등감은 현실을 바로보지 못한 착각입니다. 나만 바라보기에 생긴 착각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리는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실 것을 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 중에 의롭게 되어 돌아간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인간의 올바른 자세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안에 가득할 것을 빕니다. 그리고 그 자비를 스스로 실천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유대교가 죄인이라며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당신 주변에 넘쳐흐르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자기 한 사람 잘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소신껏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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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집회서 35,15-17.20-22는 하느님은 공정하고 자비로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다고 말합니다. 또한 필자는 진심으로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은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고 이런 사람이 하느님께 간청하면 하늘에 다다를 것이라고 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제2독서 디모테오 후서 4,6-8.16-18은 사도 바울로가 그의 제자 디모테오에게 당부하는 말씀으로 유언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바울로는 "나는 훌륭한 싸움을 했으며, 달릴 길을 다 달렸고 믿음을 간직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이렇게 산 이들에게 주님께서 정의의 월계관을 씌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 부끄럽게 여겨 도와주지 않고 저버렸던 이들에게 주님께서 벌을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바울로야말로 복음선포의 사명을 마치고 정의의 월계관을 쓴 아름다운 신앙인의 귀감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루가 18,9-14는 루가 복음서에만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관원의 예화입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자신만이 의롭다는 식으로 기도를 바칩니다. 또한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사람으로서 일 주일에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고 자랑합니다. 유다인들은 일년에 한 번 단식하고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생산했을 때 소출의 십분의 일을 바쳤던 것입니다.
바리사이와는 달리 세관원은 직업상 죄인인지라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로 눈을 들 생각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예수께서는 예화 끝에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관원”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님은 예화에서 바리사이보다 세관원의 기도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자주 기도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바리사이의 신앙행위 자체를 나무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지적한 것은 바리사이와 세관원 두 사람이 취한 신앙구조라 하겠습니다. 바리사이는 철저히 자신의 의로움과 선행만을 앞세우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웃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율법을 꼬박꼬박 지키고 성전 제사에 참여하는 행위만이 참된 믿음이고 의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달리 세관원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앞세우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합니다. 그는 겸손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자신을 개방합니다. 신앙이란 결코 율법을 지키는 일이나 성전제사에 참여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찬미와 은총을 청하면서 이웃에게 개방된 삶을 영위하는 것임을 바리사이는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미사에 참여하고 교회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웃이나 사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없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신앙행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이 의로운 것처럼 자랑만 늘어놓으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멀리하는 바리사이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만을 바라면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세관원의 신앙구조 중에서 우리는 어디에 속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앞에서 남을 업신여기며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기도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지만, 겸손한 기도는 구름을 꿰뚫는 법입니다.
"하느님, 저의 그름을 판단하소서"
-권선민 신부-
저녁 무렵, 사제관 밖을 내다보면 아파트로 둘러싸인 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아파트 옆 공원을 열심히 활보합니다. 뛰는 사람, 걷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등등. 둘레가 8백 미터가 족히 넘는 공원 산책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 눈에 가장 많이 띄는 사람들은 기름진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몸이 체지방을 제대로 분해시키지 못해서인지, 비만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조금씩들 좀 먹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살 때문에 힘들어하는 그들을 바라볼 때 한편으로 안쓰러운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몸에 누적된 체지방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쌓아 가고 있는 교만의 지방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더 클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에는 사랑의 향기가 배어 있어야 " -홍승모 신부-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 말씀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기도는 이루어진다 -손용환신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만일 당신이 화가라면 바리사이를 어떻게 그리겠습니까? 좋은 옷을 입고, 배가 나오고, 눈을 아래로 깔고, 폼 잡고 십일조를 내는 모습으로 그리지 않을까요? 만일 당신이 화가라면 죄인을 어떻게 그리겠습니까? 어두운 얼굴을 하고, 힘없이 머리를 숙이고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는 모습으로 그리지 않을까요?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안소근 수녀- 시작 기도 새벽을 열며 저는 운동경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중계를 하는 운동경기는 거의 빠짐없이 보는 편이지요. 특히 요즘에는 프로야구의 막바지라서 야구에 흠뻑 빠져 있답니다. 그런데 야구를 보면서 의외의 경우가 자주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히 점수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한 점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또 반대로 점수를 도저히 낼 수 없는 상황인데 오히려 대량 점수를 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의외성 때문에 야구가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의외성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반응입니다. 빠다킹신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이수철 신부- 예전 독일에서 수도연합회 총회가 열렸을 때의 기도가 지금도 생생하게 겸손한 기도만이 주님께 이릅니다. -배광하 신부- 주님께 다다를 기도 성모님을 통한 놀라운 만남 -이기양 신부 - 프랑스 루르드 성모성지에서의 일입니다. 누가 주인인가? -홍금표 신부 - 한 동안 유행하던 말 중에 '공주병', '왕자병'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으로 우주의 중심이 '나'라는 전제가 깔린 미성숙한 정신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서공석 신부- 겸손한 자의 기도 -조욱현 신부 - 오늘 독서와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기도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오늘은 특히 겸손한자, 가난한 자의 기도에 특별한 강조를 두고 있다. 겸손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2001. 10. 28)- 1. 성서이야기 2. 우리의 이해 예수님은 예화에서 바리사이보다 세관원의 기도가 더 의롭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자주 기도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바리사이의 신앙행위 자체를 나무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지적한 것은 바리사이와 세관원 두 사람이 취한 신앙구조라 하겠습니다. 바리사이는 철저히 자신의 의로움과 선행만을 앞세우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웃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율법을 꼬박꼬박 지키고 성전 제사에 참여하는 행위만이 참된 믿음이고 의인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달리 세관원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앞세우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합니다. 그는 겸손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자신을 개방합니다. 신앙이란 결코 율법을 지키는 일이나 성전제사에 참여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찬미와 은총을 청하면서 이웃에게 개방된 삶을 영위하는 것임을 바리사이는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나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기준 미달인 사람들을 판단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녀원이란 곳은 철저한 규율 아래 침묵과 절제와 희생과 기도의 삶으로 영위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 기준에 맞춰야 했고, 나아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성당에 앉아 있음으로써 하느님께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참된 인간이 되기 전에 참된 수도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는 모든 율법 조건을 완벽하게 채우고 덤으로 더 지키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한 가지가 공든 탑을 무너뜨립니다. 내 기도의 크기는 몇 평이나 되는가 -정원순 신부·- 오늘 복음(루카 18,9-14)에서는 두 사람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는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세리와도 같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영적인 교만함이 배어 나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이고 우월적이며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게 자기자랑을 하는 기도로 보입니다. 자신의 기도 생활에 대하여 우쭐하여 하느님에게서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 보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세리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고 그것을 진실하고 겸손하게 반성하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제대로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말은 기도하는 것과 사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내 삶에 반영이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기도와 삶이 일치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땀이 나고 몹시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세리는 솔직하게 하느님께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자신의 생활을 뒤돌아보면 자신의 잘못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직함과 인간다움이 묻어 나는 기도입니다. 이에 비하여 바리사이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데는 민감하면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살펴보고 알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죄라는 결과로 선을 그은 것입니다. 그래서 경직된 기도를 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했지만 자신과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 처지, 아픔을 느끼고 헤아리기보다 자신이라는 벽에 부딪쳐 다른 사람들의 죄만 본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데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기도하시면서 우리도 당신을 따라 기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요한 14,13) 기도하고 구하며 간청하라”(마태 7,7)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기도는 겸손된 것이어야 하며(루카 18,9-14), 깨어 있는 마음(마르 13,33),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에 신뢰하는 마음(루카 11,5-13)과 순수한 지향으로 하느님께 합당한 기도를(마태 6,5-8) 바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자세로 기도를 할 때 내 기도의 크기는 수백만 평이 되어 다른 사람의 흠이나 잘못도 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가 나를 헐뜯고, 뒤에서 비난해도 내 기도의 크기가 한두 평이 아니고 수백만 평이 되기에 그 사람에게 웃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통, 곤란, 번민, 아픔, 괴로움 따위에도 주저앉거나 실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도 나의 기도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한분도 신부- 먼곳을 가깝고 빠르게 갈수 있는 자동차와 시간과 장소에 상관하지 않고 통화할 수 있는 핸드폰으로 인해 업무 처리는 예전보다 빨라졌고, 더욱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해결해야 할 일들도 많아졌지만, 그렇게 세상은 더욱 발전되어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면서 열심히 마음에 비만을 생기게 했던 바리사이의 기도와, 차마 하느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던 세리의 가난한 마음의 기도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모범적인 생활을 보여 주었고, 남들이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던 바리사이들의 생활은 사실 칭찬을 들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남들의 소중한 재산을 탐닉하며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서 살았던 세리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의인과 죄인으로 판단할 수 있는 평가자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칭찬 받을 선한 일을 해 놓고서 욕을 먹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진정한 칭찬과 보상은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하면서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보상을 원할 때 그것은 이미 그 값어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열심했던 바리사이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독백이 아쉽습니다. 우리들은 하느님 앞에 과연 어떤 마음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모두는 의인의 원형이신 하느님 앞에 모두가 마음의 지방을 줄여야 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 저의 옳음을 보지 마시고, 저의 그름을 판단하소서! 아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두 사람은 사회적 지위나 신분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종교를 갖고 있었고, 그러기에 성전에 들어갈 때 지향하는 목적이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두 사람은 얻은 바가 서로 달랐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한 사람은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죄를 용서 받았으며 하느님과 화해하고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상태와 변함이 없습니다. 한 사람은 구원을 얻었으나 다른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과연 성전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기에 이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바리사이의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가 아니라 자신의 선행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것이며, 자신을 정당화시키며 결국은 이웃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가 드린 기도의 문제는 하느님에게 눈을 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함을 부각시킨데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는 율법과 경신례를 완벽히 준수하기에 다른 사람과는 달리 특별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마땅히 하느님에게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세리의 기도는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먼저 인정합니다. 세리는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을 신뢰할 수 없다고 느끼기에 하느님께 그러한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바로 하느님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세리는 기도 중에 하느님 자비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구원은 인간의 완전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이며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로 읽은 집회서에는 이렇게 언급돼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그분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 주신다.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회 35,16-21).
기도의 힘은 하느님 앞에 납작 엎드릴 줄 아는 겸손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우리는 세상과 다른 역설적인 이 논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신비입니다. 자신은 의인이라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지 못하고,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기에 주님께 의탁하는 죄인은 의롭게 됩니다.
응답을 받지 못한 의인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믿음과 기도는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사랑이 결여된 기도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에는 자신의 영광과 오만이 있을 뿐이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고통스런 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에는 사랑의 향기가 배어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사랑을 깨달았기에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2티모 4,6).
19세기 독일의 나자렛파 화가인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794∼1872)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우리의 상상대로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그가 1851년 런던 방문 때, 그곳에서 의뢰받은 <그림 성경 Picture Bible>(1851∼60) 240점의 목판화 중 하나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두 사람이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옷차림새로 보아 바리사이입니다. 그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그래서 그는 돈을 내며 세리를 깔보듯이 쳐다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지금의 교회에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넉넉해서 교회에 돈푼께나 낸다고 폼 잡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교회에서도 남들과 다르다며 특별대우 받길 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특별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이내 교회를 떠납니다. 배부른 사람은 하느님을 찾지 않으니까요.
다른 한 사람은 몸동작으로 보아 세리입니다. 그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그래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지금의 교회에는 적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도 적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며 무릎 꿇어 고백하는 사람도 적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교회에서 얻을 게 없다며 이내 교회를 떠납니다. 의인은 교회에서 얻을 게 없으니까요.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의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 앞에서 부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 앞에서 특별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자신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자라고 말하는 것은 자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만과 자만과 오만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까지 이르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은 하소연을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집회서 35,16-17) 그래서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합니다.(집회서 35,21) 그분께서는 의로운 자들의 송사를 듣고 머뭇거리지 않고 판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앞에서의 죄인이 사람들 앞에서의 의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낮은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의 높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드리는 겸손한 기도만이 하늘을 감동시켜 하늘에까지 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바리사이의 기도일까요? 아니면 세리의 기도일까요? 수도자의 기도일까요? 아니면 세무서장의 기도일까요? 답은 그때그때 다릅니다. 기도는 누구의 기도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기도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지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합니까? 우리는 하느님께 겸손하게 기도합니까? 묻고 또 물읍시다.
오소서, 성령님.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서게 하소서.
독서
너무 잘 알려진 복음이고 더 이상 묵상할 것이 없을 것 같았는데, 언뜻 ‘다른 생각’ 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구차하고 궁색하게 보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꼭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야 했을까요 ? 그런 사람이 정말 의인이었을까요 ?
바리사이의 행동 자체에는 흠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강도짓이나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단식하고 십일조를 바치는 것에 대해 잘못한 일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의인이라고 해서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 과 진정한 의인들은 구분되고, 루카복음 안에서도 예를 들자면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고 말합니다. (루카 1, 6) 이것을 보면 신약 시대에도 참된 의인은 하느님께 인정받는 성인들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의 올바름이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게 (18, 9) 만들 때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이 떠오릅니다. ‘다른 모든 죄악이 사람의 악행에서 나오지만, 교만은 선행까지도 손상시켜 헛되게 하기 때문이다.’ 선행뿐 아니라 다른 가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저 스스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말하기가 매우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가끔 느끼게 되는 한 가지 생각을 적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훌륭한 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스로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것은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의 선하심을 알아보고 감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을 때 또한 그 선물을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내줄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지닌 것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려는 모습을 볼 때가 없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솔직히 ‘저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자신이 없구나.’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오히려 초라해 보입니다. 진짜 보물을 지닌 사람은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속물같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자신만을 위해 그렇게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을 다시 빌리면 선물 자체까지도 ‘손상시켜 헛되게 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무엇인가 얻어내기 위해 그렇게 자신의 입지를 다져야 하는 사람의 처지가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
다시 오늘 복음에 나온 바리사이를 바라봅니다. 하느님 앞에서까지 그런 식으로 자신을 포장해야 했을까요 ? “제가 다른 사람들 …과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1절)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려 했던 그는, 어쩌면 그렇게 해서라도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리를 확보해야 했던 것인지 모릅니다. 알량한 무엇인가를 내세우고 다른 사람을 밀어내며 하느님 가까이에 한자리를 잡아야 했던 것은 아닐까요 ?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실 사람의 마음속을 다 아십니다. 바리사이나 세리가 하느님 앞에 자신을 어떻게 내세우든,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판단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구차해 보이게 만든다면, 하느님 앞에서는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시편 139, 1 – 2) 그런 하느님 앞에서는, 내 모습을 만들어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께는, 진실하고 솔직한 삶이 중요할 따름일 것입니다.
성찰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 (루카 18,9) 이 한 구절에 오늘 복음의 모든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의롭다고 스스로 내세울 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길 것은 더욱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기준을 가지고 계시며, 이에 따라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4절) 하느님 앞에서는 내 있는 그대로를 보여드릴 뿐입니다. 그분은 “가련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주시는” (시편 22, 25) 분이십니다. 나의 가난함을 굽어보시는 분이시라면, 그 가난함을 덮을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시편 51, 19)
도저히 득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편이 점수를 내거나, 상대편의 아주 좋은 기회를 잘 막아내면 너무나도 신나고 재미있는 상황이 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좋은 기회에서도 점수를 하나도 내지 못하거나, 상대편의 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점수를 주게 될 때에는 ‘어쩌면 그럴 수가 있냐?’고 말하면서 이 의외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에게 좋은 의외성은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나쁜 의외성은 그럴 수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들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처럼, 우리들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나요? 사실 그러한 판단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 새벽, 잠을 자고 있는데 글쎄 모기한테 물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기가 어찌나 재빠른지 도저히 잡을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또 한 두 마리도 아닌 것 같습니다. 불만 껐다하면 윙윙대는 소리는 잠을 도저히 잘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화가 나요. ‘이 놈의 모기 때문에 내가 잠을 못 잔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지 모릅니다. 이 모기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요? 저만한가요? 아니지요. 저보다도 훨씬 작지요. 제 손톱보다도 작은 모기 때문에 그렇게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잘났다’고 교만해져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점을 말씀하세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중에서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더욱 더 기쁘게 받아들인다고 하지요. 이는 비록 겉으로는 옳게 산다고 하더라도 하느님보다도 위에 올라서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기도는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가슴을 치며 바치는 겸손된 기도는 그 사람이 지금은 외적으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일지라도 받아주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한없이 부족하면서도 겸손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반성하여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떳떳하다고 착각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한 세리의 모습을 갖추겠다는 결심을 감히 해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 모습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바리사이의 기도를 바치고 싶을 때가 종종 우리들에게 유혹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하지만 그 때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기도보다는 세리의 기도를 더 좋아하십니다.
잠깐이라도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세요.
기억납니다. 회의 일정이 다 끝나고 기진맥진했을 때 총 아빠스님의
마침 기도가 있었습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미사 시작 때의 ‘자비송’을
그대로 기도로 바쳤을 때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참 편안한 느낌이었고
새삼 자비송 기도가 얼마나 좋은 기도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성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순수한 열정에서 우러난 경우가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 역시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하십니다. 사실 말이든 기도든 진실하고 간절할수록
짧은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리의 기도는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한지요.
자기의 죄와 한계를 너무나 잘 아는 겸손한 기도입니다.
자기자랑의 독백 기도(?)를 바치는 바리사이와는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결국 주님께 의롭다 인정받고 떠난 자는 바리사이가 아닌 세리였습니다.
바로 이 세리의 기도에 바탕을 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동방수도 전통에서 면면히 계승되어온 복음의 요약과도 같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네 단락으로 나눠 호흡에 맞춰 끊임없이 기도로 바칠 때
마음의 겸손과 평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겸손의 기도
프랑스의 매화마을이라는 명상센터를 운영하시는 베트남 승려 틱 낫 한 스님은 기도에 대하여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기도는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도는 우주가 인간에게 선사하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선물이다. 행복은 이미 궁극의 차원에 존재하고 있으며, 기도는 궁극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기도하길 바란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우주 안의 모든 에너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하길 바란다.”
가끔 교우분들과의 면담 중에 자주 상담 받게 되는 것이 기도 중에 분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집중이 안 되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저 자신은 속으로 “저도 안 되요”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누릅니다. 불교 격언에 “찰라의 순간에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면 부처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찰라’란 ‘눈 깜짝할 사이’라는 뜻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도 정신이 한 곳으로 집중이 안 돼 많은 스님들이 평생을 깊은 산중에서 수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같이 세속에서 온갖 일상의 번잡함 속에서 온전히 한 정신으로 기도에 전념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집중된 기도를 포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분심과 잡념이 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더욱 그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에 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겸손되이 낮추며 기도할 때 분심 잡념의 기도를 뛰어 넘어 주님께서 다 들어 주신다는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때문에 오늘 집회서의 저자는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회 35, 21).
기도의 분심 여부를 떠나 진정 내 자신의 기도는 가난한 이의 기도, 낮추는 이의 기도였는지를 먼저 반성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실망감에 포기하지 않는 끈기의 항구한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성인들도 기도의 완성과 끝이 없었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어 항구히 주님께 매달린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런 뒤에 오늘 바오로 사도와 같은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티모 4, 7~8).
타는 떨기나무에서
광야의 타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모세는 존엄하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으로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신을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신고 있는 세속의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시련과 고통을, 자갈과 가시, 오염된 물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 주었던 신을 벗는 것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그 대신 온전히 주님께 의탁할 때, 그분께서 신이 되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세속과 천상의 것에 양다리를 걸치고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가장 작은 자세로, 주님께서 당신의 것으로 신겨 주시고 입혀 주신다는 사실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임해야 합니다.
자기가 이제껏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감추고 겸손히 서야 합니다. 열심히 쌓아올린 세상의 공로들이 때로는 진실한 기도에 다가갈 수 없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겸손을 가로막는 교만과 우월의식의 유혹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는 자신이 훌륭히 지켜온 종교적 선행과 율법이 결국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장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신고 있던 세속의 신을 벗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이었던 세리는 자신의 허물로 인한 잘못으로 세속 교만의 신을 벗고 겸손히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뉘우칩니다. 이때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 14).
결국 기도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주님 앞에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죄의 인정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세속의 것을 버리고 주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도 가슴이 뛰고 벅차서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한국말로 성모송이 들려 올 때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한국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데 성모송이 한국말로 들려오다니 너무나도 놀라 단상을 유심히 보니 한국 사람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단상으로 끌려오듯 왔습니다."
청년 하나가 단상으로 뛰어 올라와 알지도 못하는 우리 일행 중의 한 자매를 붙잡고 기적이라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청년의 감동은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순간 그곳은 동포애와 신앙심을 확인하는 가슴 뭉클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10월의 마지막 주간이 다가오면 10월의 마지막을 노래한 유행가보다도 루르드 성모성지 순례의 기억이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신자들과 함께 새벽 미사를 성모님 발현 동굴에서 봉헌하는 은총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고, 신자들은 각자의 원의를 담아 성지 곳곳을 순례하던 중 우연히 길에서 프랑스 신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부는 우리 일행을 만나자 자기도 한국에 머무른 적이 있다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오늘 한국천주교회의 2대 교구장이셨던 앵베르 범 주교님의 고향 교구에서 야간 묵주기도를 주관하게 되었는데 매 묵주기도의 시작을 한국말로 시작해 주면 아주 뜻깊은 행사가 되겠다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3만 명의 교구민들이 참석하게 되는 프랑스 교구의 야간 묵주기도회에 우리 일행이 초대를 받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청을 받아들였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감격적인 성모님의 밤을 봉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잊지 못할 성모님의 밤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뜻밖의 청년이 나타나 감사함을 표현한 것이지요.
청년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프랑스에 학회가 있어서 오게 되었고, 어머님의 권유로 루르드를 순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외국인인 군중의 무리에 끼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한 마음으로 야간 묵주기도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귀를 의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익숙한 한국말로 성모송이 들려왔던 것이지요.
'아니겠지'하고 기도에 마음을 모으려고 하는데 또 한국말로 성모송이 들려오더라는 겁니다. 너무나도 놀란 청년은 자기도 모르게 제대 앞으로 끌리듯 걸어 나왔고 행사가 끝나자마자 단상으로 뛰어 올라 자매를 붙잡고 반가움을 나누고 자초지종을 주고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성모님 전구의 은혜라는 말을 연발하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파리행 기차를 타려고 졸린 눈을 비비며 기차역으로 나갔는데 그 청년은 어제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며 새벽같이 전송을 나왔습니다. 우리는 너도나도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는 표현으로 그 청년의 신심과 인간성을 칭찬했습니다.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미사가 끝나고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어떤 청년이 저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입니다.
"나를 만나려고 기다리시나요"하고 묻자 "신부님, 저를 모르시겠어요?"하고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을 응시하자 "신부님, 루르드에서 만났던 스테파노입니다"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어요. 깜짝 놀라서 어찌된 일인지 묻자 미국에 있는 동안 평화신문의 '생활속의 복음'이 좋아서 성당 누리방에 매주 옮겨놓았다며 한국에 가면 글 쓴 신부님을 꼭 만나고 싶었다고 합니다.
마침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글 쓴 신부님을 찾아왔는데 저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신문에 사진도 나와 있는데 어찌 나인지를 몰랐냐고 하자, 루르드에서 잠깐 본데다가 제가 본당을 옮겨 생각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참 놀라운 만남이었습니다.
루르드에서는 청년의 열정적인 신심과 인품 때문에 제가 놀랐는데 그 청년은 평화신문의 글쓴이가 저라는 사실에 더 놀랐다고 합니다. 10월, 묵주기도 성월이 되면 연이은 이 두 사건 만으로도 성모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성모님 안에서 풍요로운 만남이 신자 여러분들에게도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 '통제력의 착각'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말 그대로 세상에 대한 통제력의 착각인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내가 축구 경기를 보지 않아 한국이 일본에 졌다던가, 혹은 어느 전직 대통령처럼 나의 기에 눌려 김일성이 사망했다고 믿는 정신상태이다. 이런 모습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시각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이 두 인물들은 너무나 극단적인 요소를 가진 인물들이다.
바리사이파 사람. 우리는 이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결코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는 어떤 면에서는 매우 모범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보통 유다인들은 일년에 한번 속죄의 날 단식하면 되는데 이들은 이 규정에 만족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였고, 더 나아가 다른 유다인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생산했을 때 한해서 그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데 비해 이들은 이자 수입을 포함해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 뿐 아니라 혹시 시장에서 산 물건도 생산자가 십분의 일을 바치지 않았을까 염려하여 물품구입 때도 십일조를 바치곤 하였던 종교적 열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세리는 부정축재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당시에는 지방세를 거둘 때 관리를 두어 직접 징수하지 않고 세관별로 임대를 주어 징수하게 하였다. 따라서 '세리'라는 인물은 임대차 계약에 의해 실제로 관세를 징수하는 민간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때문에 이들은 자주 이방인들과 접촉할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관세를 매겨 일부는 다음의 임대차 계약을 위해 검은돈으로 상납하고 일부는 자신의 치부를 위해 사용하였기에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는 인물들이었다.
때문에 기도의 내용 자체만 놓고 본다면 바리사이의 기도에서 특이 사항을 발견할 수도 없고, 거짓 기도라 믿을 내용도 없다.
그러기에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올바른 기도는 바리사이의 기도요, 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올바른 삶을 살아 바리사이처럼 당당하고 멋있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세리의 기도를 보면서 많은 죄를 저지르면서도 생활의 개선없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모습은 뻔뻔스러움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하느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를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기도의 차이는 무엇일까? 도대체 왜 하느님께서는 세리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했을까 ?우리는 이 두 기도의 차이점을 여러가지 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당당함 대 겸손함, 감사의 기도 대 용서의 청원, 그리고 의인의 기도 대 죄인의 기도, 독백 대 대화 등등.
그러나 필자는 이 두 기도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기도 드리는 사람의 위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바리사이의 기도에서 문장의 주인이 되는 것은(주어가 "저는")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여기에 비해 세리의 기도에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하느님이요 세리는 손님의 자리(객어)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우주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요,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느님의 눈과 뜻으로 나를 반성하고, 그럼으로써 나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전제를 놓고 볼 때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훌륭하고 당당한 면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기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었고, 나를 중심으로 나와 하느님을 보는 마음, 하느님을 주변부에 놓으려는 태도가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였던 것이다.
여기에 비해 세리의 기도는 비록 짧고 내세울 것도 없는 초라한 기도였지만 하느님을 주인의 자리에 놓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보려는 갸륵한 마음이 있는 기도, 하느님이 중심을 차지하는 기도인 것이다.
아마도 이 차이가 이 두 기도의 근본적인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단순히 기도에 대한 가르침만이 아니라 자기네만 옳은 줄 알고 남을 업신여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아니 이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처세에 대한 교훈인 것이다.
때문에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되새겨야 할 교훈은 이것이리라 ! '하느님'을 주인의 자리에 모시고 '나'를 봐야 한다고,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을 낮추는 진정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의 예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예화의 바리사이는 실제로도 윤리적으로 훌륭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유다교인으로서 지킬 것 다 지키고 바칠 것도 다 바쳤습니다. 유다교가 요구하는 단식은 일주일에 한 번인데 이 사람은 두 번이나 단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교가 요구하는 십일조는 주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인데 이 바리사이는 자기의 부수입까지 포함한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지키고 바치는 일에 있어서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감동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 시대 공인된 죄인으로 모든 이의 지탄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의 말씀을 열심히 신앙생활하고도 겸손 하라는 교훈으로 축소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예화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열린 하느님의 지평에 우리를 인도합니다. 인류역사 안에 신(神)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신이 준 계명을 잘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신으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해서 소원성취 하라고 권합니다.
‘태초에 두려움이 있었고 이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생각하게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에게 무엇을 바쳐서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어떤 혜택을 받아 내겠다는 민속 종교들의 발생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정화수를 떠놓고 빌던 그 마음의 연장이고,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쳐 아버지가 눈을 뜨는 혜택을 받게 한 심청이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초월적 힘을 빌려 소원성취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이 소원성취 하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내가 잘 지키고 잘 바쳐서 하느님을 감동시켜 그분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아내어 나 한 사람 잘 되고 잘 사는 길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소원성취는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비는’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이 흘러넘치게 하는 데에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베풀어진 것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려 합니다. 잘 지키고 잘 바쳐서 소원성취 하겠다는 것은 독재자 밑에 사는 기쁨조가 바라는 일입니다. 혹은 조폭조직의 두목 밑에 사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의 혜택을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그런 독재자도 아니고 조폭의 두목과 같은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 한 사람 강자가 되어 잘 살아보겠다는 호칭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 주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생명을 배워서 살겠다는 아버지라는 호칭입니다.
그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말할 때는 어머니와 대립된 아버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자녀를 낳아 기르고 그 자녀가 사람노릇 하도록 가르치는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옛날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자녀들과 관련지어 아버지를 말할 때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역할도 당연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신 분, 아버지의 배려로 생명이 성장할 수 있고, 자녀가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하여 산다고 말할 때, 아버지라는 호칭 안에는 어머니도 항상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같은 역할을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버리지 않고 용서하며 돌보듯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 부모가 우리를 불쌍히 여겼듯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 부모에게서 세상에 사는 법을 배웠듯이 우리가 배워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아버지라는 하느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가 잘 한 일에 만족하고 하느님께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도취되어 자만자족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우리들이 흔히 하는 자만자족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우열(優劣)을 논하라고 주어진 우리의 삶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의 경쟁자가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웃이며 하느님이 주신 형제자매들입니다. 사심 없이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은 모두 불쌍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가지는 우월감도 열등감도 현실을 바로보지 못한 잠시의 착각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리는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실 것을 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 중에 의롭게 되어 돌아간 사람은 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올바른 자세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사는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안에 가득할 것을 빕니다. 그리고 그 자비를 스스로 실천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죄인이라고 유다교가 버린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당신 주변에 넘쳐흐르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고 나 한 사람 잘 되겠다는 사람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외면하는 유다교 지도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소신껏 실천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제1독서: 집회 35,12-13.16-18: 겸손한 사람의 기도
제1독서에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큰 희생제물을 즐겨 받으시는 듯이 하는 전례태도에 말려들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자, 과부, 억압받는 자들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 그들의 기도는 진실하고 소박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뇌물에 매수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 기도의 힘은 ‘구름’까지도 뚫으며, 그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는 하느님께 대해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이러한 내용은 오늘의 복음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도 가난한 자 세리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만, 자기의 공로와 선행을 내세우는 자 바리사이의 기도는 거절하신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기도에 있어서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비유의 전체적 의미는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취하는 ‘자만심’과 ‘자기 합리화’의 태도를 고발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9절) 말씀하셨다고 루가는 밝히고 있다.
자기네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명백하게 언급되어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인 것은 확실하다. 비유의 내용이 ‘올바름’의 형태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우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자만심을 비난하고 계시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절).
비유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기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청해야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자신이 행한 많은 선행을 자랑할 것 밖에 없다. 그는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율법 이상의 것을 행하고 있다. 즉 율법은 1년에 단 한번 속죄의 날(레위 16,29)에 단식을 하도록 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이나(월. 목) 단식을 한다든가, 생산자에게만 의무가 부과되는 밀, 술, 기름을 구입하면서도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든가 하는 것이다(12절). 이것뿐이 아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자신만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11절).
모든 내용이 그 자신만을 들어 높이기 위한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은 단지 그 자신의 자기만족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요소가 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죄스런 상태에 있더라도 그들을 위한 도움과 자선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의’(義)를 돋보이게 하려 그들의 잘못을 고발하는데 더 신경을 쓴다. 그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다른 형제들을 내리 깎기 위한 하나의 구실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다”(13절). 자기 잘못에 대한 세리의 겸손하고도 순박한 고백은 그가 대죄인 이라기보다는 그가 하느님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 앞에 내세울만한 것이 없기에 오직 하느님의 자비만을 기다리고 있다. 만일 그가 무엇을 얻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잘못을 용서해주시고 그를 새롭게 해주는 사랑일 것이다. 즉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은총’이요 ‘선물’이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14절). 세리의 태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최고의 사랑과 용서의 모습을 되찾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올바름’이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분만이 자신을 구원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기도’란 세리의 기도처럼 항상 겸손한 기도를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바로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당신의 은총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현대인은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기도를 하더라도 바리사이처럼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한다.
복음의 바리사이파 삶은 스스로 의롭다고 하면서 ‘하느님 앞에 증오심으로 가득 차있는’ ‘거짓’과 ‘위선’으로 싸여있는 인간의 상징이며, 하느님 앞에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만으로 족하다는 자만심으로 차있는 사람들의 상징이다. 이러한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퍼져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기 형제들과 교회의 바리사이즘을 맹렬히 비난하면서도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과 복음은 어느 누구의 자기 찬양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
제2독서: 2디모 4,6-8.16-18: 정의의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았음을 알고, 동시에 그 구원에 협력해야할 의무를 깨닫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7-8절).
하느님 앞에 겸손된 기도를 바치면서 바로 주님께서 나 자신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닫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 앞에 언제나 올바른 사람으로 서있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제1독서 집회서 35,15-17.20-22는 하느님은 공정하고 자비로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인다고 말합니다. 또한 필자는 진심으로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은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고 이런 사람이 하느님께 간청하면 하늘에 다다를 것이라고 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제2독서 디모테오 후서 4,6-8.16-18은 사도 바울로가 그의 제자 디모테오에게 당부하는 말씀으로 유언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바울로는 "나는 훌륭한 싸움을 했으며, 달릴 길을 다 달렸고 믿음을 간직했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이렇게 산 이들에게 주님께서 정의의 월계관을 씌워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혔을 때 부끄럽게 여겨 도와주지 않고 저버렸던 이들에게 주님께서 벌을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바울로야말로 복음선포의 사명을 마치고 정의의 월계관을 쓴 아름다운 신앙인의 귀감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루가 18,9-14는 루가 복음서에만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관원의 예화입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자신만이 의롭다는 식으로 기도를 바칩니다. 또한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사람으로서 일 주일에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고 자랑합니다. 유다인들은 일년에 한 번 단식하고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생산했을 때 소출의 십분의 일을 바쳤던 것입니다.
바리사이와는 달리 세관원은 직업상 죄인인지라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로 눈을 들 생각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예수께서는 예화 끝에 “하느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관원”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날도 미사에 참여하고 교회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웃이나 사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없이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신앙행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신만이 의로운 것처럼 자랑만 늘어놓으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멀리하는 바리사이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만을 바라면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세관원의 신앙구조 중에서 우리는 어디에 속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앞에서 남을 업신여기며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기도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지만, 겸손한 기도는 구름을 꿰뚫는 법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난 소중한 존재이므로 그 어떤 잣대로도 다른 사람을 업신여길 권리가 없습니다. 이를 아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어 창피를 주거나 돌에 맞아 죽도록 할 마음이 없어서 남몰래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도 의로운 사람입니다. 형들의 시기로 상인에게 팔리고, 이국땅에서 하인으로 살다가 억울하게 감옥살이까지 하며 아까운 젊은 날을 허비(?)했지만, 재상이 되고 형들을 재회했을 때 그 모든 일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용서하는 사랑을 보입니다. 진정 의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사실 그의 자세는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의 자세가 아니었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스스로 도취된 상태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 없이 자신이 하느님처럼 판단하고 결정해 버립니다. 참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기도라면 자신의 양심을 살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루카 15,29)라고 한 큰아들의 목소리를 반향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는 정말 종처럼 충실한 자입니다. 덤으로 주 2회나 단식하며 십일조도 꼭꼭 바치는 완벽주의자요 모범생입니다. 그는 찬양과 감사의 구조를 갖춘 기도를 구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구색 맞추는 장식에 지나지 않고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자, 하느님! 제가 이 정도 하였으니 당신도 이에 준하여 제게 갚아주셔야지요?’가 아닐까요? 좋은 말을 구사한다고 해서 좋은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2-3)라고 했지요.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는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라고 한 작은아들의 목소리와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라고 한 소경의 절박한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참조) 그래서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회 35,21)고 하지요. 바리사이는 자신의 공로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그 공로에 대한 보상이 구원이라고 계산하며 사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
이제 예수께서 이런 판단을 내리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세리는 자신이 의롭게 된 줄도 모르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한 바리사이를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자들`….”(마태 23,1-36 참조)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시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복음서는 말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6-7 참조)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에서 “많은 말로써가 아니라 순결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 간청이 허락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다 잘하는데 딱 한 가지 결함이 잘하는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기 때문에 까다로운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실수도 많이 하고 재주가 없어도 좋은 인간적 품성 하나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묻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딱 한 가지의 차이입니다. 풍성하지만 중요한 것이 빠진 바리사이의 기도, 빈약하지만 온 마음이 담겨 있는 세리의 기도. 철저히 율법을 지키면서도 하느님의 눈 밖에 날 수도 있고, 율법준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하느님께 의롭게 된 자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역설은 바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으뜸이 되고 싶으면 섬겨야 하고, 살고 싶으면 죽어야 하는’ 데 있습니다.
직장, 관공서뿐 아니라 교회내 교구, 수도원도 일 할 사람이 예전보다는 많아졌고, 그러다보니 해야 할 일들도 더 많아졌습니다. 주위는 온통 업그레이드가 되어 갑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이 되는 도덕과 윤리, 그리고 예절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어 보이고, 심지어 더욱 경시되어 가는 듯한 느낌도 받습니다. 특히 빨라지는 경쟁 사회안에서 개인 스스로가 ‘승리’해야 앞서 갈 수 있다는 풍조와 자신의 의지들을 빠른 시간내에 성취시켜야 한다는 생각들이 인간 관계와 기본까지도 그런식으로 해결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와 세리는 양 극단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절바른 생활태도과 품위로 살아가는 바리사이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경제적 고통을 주는 세리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내용을 보면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아니, 그들이 기도하는 자세와 시선만 보더라도 바리사이는 꼿꼿이 정면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못냅니다. 삼척동자가 보더라도 진정한 기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알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도’라는 주제 안에서 바라볼 때 세리나 바리사이라는 직업은 의미가 없습니다. 실상 주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면서도(실제로 잘못이 없다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모습을 보면 민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질도 받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겸손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보면 한걸음 뒤로 물러 바라보게 되고, 더 나아가 응원도 해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고, 우리 모두는 죄를 짓는 공간과 죄 형태 만이 다를 뿐입니다. 모두가 죄를 짓고 살고 있는 부족한 인간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진실은 분명히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도는 소리와 횟수, 그리고 형식도 중요하지만, 정성과 겸손된 우리의 마음 자세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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