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CONSTITUTIO PASTORALIS DE ECCLESIA IN MUNDO HUIUS TEMPORIS
GAUDIUM ET SPES
1965. 12. 7.
강대인 번역
차례 |
1. 온 인류 가족과 교회의 긴밀한 결합 2. 공의회는 누구를 향하여 말하는가? 3. 인간에 대한 봉사 |
4. 희망과 고뇌 5. 급격한 변화 6. 사회 질서의 변화 7. 정신과 도덕, 종교의 변화 8. 현대 세계의 불균형 9. 인류의 보편적 열망 10. 인류의 심각한 의문 |
11.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응답 |
12.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 13. 죄 14. 인간의 구조 15. 지성의 존엄, 진리와 지혜 16. 도덕적 양심의 존엄 17. 자유의 우월성 18. 죽음의 신비 19. 무신론의 형태와 근원 20. 체계적 무신론 21.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태도 22. 새 인간 그리스도 |
23. 공의회의 의도 24.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소명의 공동체적 특성 25. 개인과 사회의 상호 의존성 26. 공동선의 증진 27. 인간 존중 28. 반대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 29. 모든 사람의 본질적 평등과 사회 정의 30. 개인주의 윤리의 극복 31. 책임과 참여 32. 사람이 되신 말씀과 인간 연대 |
33. 문제 제기 34. 인간 활동의 가치 35. 인간 활동의 규범 36.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 37. 죄로 타락한 인간 활동 38. 파스카 신비 안에서 완성된 인간 활동 39. 새 땅과 새 하늘 |
40 교회와 세계의 상호 관계 41. 교회가 개인에게 주고자 하는 도움 42. 교회가 인류 사회에 주고자 하는 도움 43.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인간 활동에 기여하고자 하는 도움 44. 교회가 현대 세계에서 받는 도움 45.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 |
46. 서론 |
47. 현대 세계의 혼인과 가정 48. 혼인과 가정의 거룩함 49. 부부 사랑 50. 혼인의 풍성한 열매 51. 부부 사랑과 인간 생명의 존중 52. 혼인과 가정의 행복을 도모하여야 할 모든 사람의 의무 |
53. 서론 |
54. 새로운 생활 양식 55. 문화의 창조자인 인간 56. 문제와 임무 |
57. 신앙과 문화 58. 그리스도의 복음과 인간 문화의 복합적 관계 59. 다양한 문화 형태의 조화 |
60. 문화 혜택에 대한 만인의 권리 인정과 그 실현 61. 전인 교육 62. 문화와 그리스도교 교육의 조화 |
63. 경제 생활의 몇 가지 측면 |
64.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 발전 65. 경제 발전에 대한 인간의 통제 66. 제거되어야 할 엄청난 경제 사회적 격차 |
67. 노동, 노동 조건, 여가 68. 기업 참여, 세계 경제 구조 참여, 노동 쟁의 69. 모든 사람을 위한 지상 재화 70. 투자와 통화 71. 재산 취득, 재화의 사적 지배, 대토지 72. 경제-사회 활동과 그리스도 왕국 |
73. 현대의 공공 생활 74. 정치 공동체의 본질과 목적 75. 모든 사람의 공공 생활 협력 76. 정치 공동체와 교회 |
77. 서론 78. 평화의 본질 |
79. 전쟁의 야만성 방지 80. 전면 전쟁 81. 군비 경쟁 82. 전쟁의 절대 금지와 전쟁 회피를 위한 국제 협력 |
83. 분쟁의 원인과 그 대책 84. 민족들의 공동체와 국제 기구 85. 경제 분야의 국제 협력 86. 몇 가지 적절한 규범 87. 인구 증가에 관한 국제 협력 88. 원조 제공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임무 89. 국제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교회의 효과적 현존 90. 국제 기관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역할 |
91. 신자 개인과 지역 교회의 임무 92. 모든 사람의 대화 93. 세계 건설과 그 목표의 성취 |
하느님의 종들의 종 바오로 주교는 거룩한 공의회의 교부들과 더불어
영구적인 기록으로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1)을 공포한다.
머리말
온 인류 가족과 교회의 긴밀한 결합
1.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인 그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야 할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
공의회는 누구를 향하여 말하는가?
2.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신비를 더욱 깊이 고찰한 다음, 이제 교회의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뿐 아니라 곧바로 인류 전체를 향하여 말하며,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현존과 활동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든 이에게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공의회는 인간의 세계를, 곧 인류 가족 전체와 인간이 살아가는 온갖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무대인 이 세계에는 인간의 노력과 실패와 승리가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창조주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보존된다고 믿는다. 죄의 노예 상태에 떨어졌으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악의 권세를 쳐부수시고 해방시키신 이 세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변혁되고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인간에 대한 봉사
3. 오늘날 인류는 자신의 발명과 자신의 능력을 경탄하면서도 흔히 현대 세계의 변화,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개인 노력과 집단 노력의 의미, 마침내 사물과 인간의 궁극 목적과 관련하여 고뇌에 찬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모으신 하느님 백성 전체의 신앙을 증언하고 제시하는 공의회는 그러한 여러 문제에 대하여 인류 가족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그 문제들을 복음에서 이끌어 낸 빛으로 비추어 주고, 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그 창립자에게서 받은 구원의 힘을 인류에게 풍부히 제공함으로써, 그 백성이 들어 있는 온 인류 가족에 대한 연대와 존경과 사랑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진정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육신과 영혼, 마음과 양심, 정신과 의지를 지닌 단일한 전인간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의 중심 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인간의 숭고한 소명을 천명하고 인간 안에 심어진 신적인 어떤 씨앗을 긍정하며, 이 소명에 응답하는 모든 이의 형제애를 증진하고자 교회의 성실한 협력을 인류에게 제공한다. 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추구한다. 곧 성령의 인도로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셨으며,2) 심판하시기보다는 구원하시고 섬김을 받으시기보다는 섬기러 오셨다.3)
서론
현대 세계의 인간 상황
희망과 고뇌
4.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고자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의 기대와 열망 그리고 때로는 극적이기도 한 그 특성을 인식하고 이해하여야 한다. 현대 세계의 주요한 몇몇 특징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다.
오늘날 인류는 그 역사의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는 급격한 변화가 점차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인간의 지능과 창조적 노력에서 일어난 변화는 인간 자체를 변화시켜, 개인과 집단의 판단과 열망, 사물과 인간에 대한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바꾸고 있다. 이제는 진정한 사회적 문화적 변혁을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변혁은 종교 생활에도 미치고 있다.
어떠한 성장의 위기에서나 그러하듯, 이 변혁에도 가볍지 않은 어려움들이 따른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힘을 그토록 널리 펼치면서도 언제나 그 힘이 인간을 섬기도록 다스리지는 못한다. 인간 정신의 내면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려고 노력하면서도 흔히 제 자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 생활의 법규는 점차 더욱 분명하게 찾아 내면서도, 사회 생활의 방향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인류가 이토록 풍요로운 재화와 능력과 경제력을 누려 본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고 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완전 문맹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이 오늘날처럼 예리한 자유 의식을 가져 본 적이 결코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심리적 예속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는 또한 각자의 상호 의존과 필연적인 연대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그토록 절감하면서도, 서로 싸우는 세력들이 일으키는 극도의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다. 정치, 사회, 경제, 인종, 이념의 극심한 분쟁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의 위험도 없지 않다. 사상의 교류는 증대되고 있지만, 주요 개념들을 표현하는 말마디 자체가 서로 다른 이념 속에서 아주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끝으로, 더 나은 현세 생활은 열심히 추구하고 있지만, 정신적 발전은 걸맞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토록 복합적인 상황에 놓인 수많은 우리 동시대인들은 영원한 가치를 참으로 깨닫지 못하고 또 이를 새로운 발견과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에 희망과 고뇌의 와중에서 동요하고 있는 사람들은 세계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서로 물어 보며 불안에 짓눌려 있다. 그러한 세계 상황은 사람들에게 응답을 촉구하고 또 강요하고 있다.
급격한 변화
5. 오늘날의 정신적 동요와 생활 조건의 변화는 더욱 광범위한 세계 변혁과 직결되어 있다. 그 결과로 정신 형성에서는 수학과 자연 과학 또는 인간 자체를 다루는 과학이 더욱 중시되고, 행동 영역에서는 그러한 과학의 소산인 기술이 더욱더 중시되고 있다. 이러한 과학 정신이 과거와는 다른 문화 형태와 사고 방식을 지어 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지구의 면모를 바꾸어 놓고 이제는 우주 정복에 나서고 있다.
인간 지성은 또한 시간에 대한 그 지배 영역을 어느 정도 확장하였다. 역사 지식의 힘으로 과거를 지배하고 예측 노력과 계획화로 미래를 지배하게 되었다.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의 진보는 인간이 자신을 더 깊이 인식하도록 도와 줄 뿐 아니라 기술을 활용하여 사회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도록 도와 준다. 동시에 인류는 인구 증가의 예측과 그 조절에 대하여 더욱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역사 자체의 흐름도 개인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히 빨라지고 있다. 인류 사회는 이제 하나의 공동 운명을 지니게 되어, 더 이상 여러 가지 역사로 흩어질 수 없다. 이렇게 인류는 정적인 세계관에서 더욱 역동적이고 발전적인 세계관으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에서 수많은 문제들의 방대하고 새로운 복합성이 출현하며, 이는 새로운 분석과 종합을 요구한다.
사회 질서의 변화
6. 그리하여 가부장제의 가족, 씨족, 부족, 부락과 같은 전통적 지역 공동체들과 다양한 집단과 사회의 인간 관계는 날로 더욱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다.
산업 사회의 형태가 점차 확산되어, 어떤 나라들을 경제적인 풍요로 이끌며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사회 생활의 개념과 조건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다. 비슷하게, 도시 생활의 문화와 그 욕구가 증가하여, 도시들과 도시인들이 불어나고 또 도시 생활이 시골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적인 새로운 수단들이 여러 사건들을 알리고 사상과 감정을 매우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여 수많은 연쇄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 수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이주하게 되고 거기에서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도 경시할 수 없다.
이렇게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인간 관계가 끊임없이 증가되고 동시에 ‘사회화’ 자체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사회화가 언제나 적절한 인격 성숙과 진정한 인간 관계(‘인간화’)를 증진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 발전과 기술 진보의 편의를 이미 누리고 있는 나라들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이는 또한 자기 지역에서 산업화와 도시화의 혜택을 얻고자 열망하는 민족들이 여전히 개발 노력을 기울이도록 부추기고 있다. 그러한 민족들은, 특히 더 오랜 전통을 지닌 민족들은 동시에 더욱 성숙하게 더 개인적으로 자유를 행사하려는 움직임을 겪고 있다.
정신과 도덕, 종교의 변화
7. 인간 정신과 사회 구조의 변화는 흔히 기존 가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서 그렇다. 젊은이들은 때때로 인내심을 잃고 또 고뇌로 반항하기도 하며, 사회 생활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더 일찍 사회 생활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이 때문에 흔히 부모들과 교육자들은 자신의 임무 수행에서 날로 더욱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제로 선대에서 물려받은 제도와 법규, 사고 방식과 생활 감정이 오늘날의 현실 상황에 언제나 잘 맞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행동 방식과 그 규범에 중대한 혼란이 일어난다.
마침내 새로운 상황은 종교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으로, 더욱더 날카로워진 비판력이 마술적인 세계관과 아직도 떠도는 미신에서 종교를 정화하고, 날로 더욱 인격적이고 적극적인 신앙 생활을 요구한다. 이로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욱더 생생하게 깨닫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 실천에서 멀어지고 있다. 지난 시대와 달리, 신이나 종교를 부정한다거나 거기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하거나 유별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이는 마치 과학의 진보나 어떤 새로운 인본주의의 요구처럼 드물지 않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여러 지역에서 철학자들의 주장으로 표현될 뿐 아니라, 문학, 예술, 인문 과학과 역사 해석, 그리고 국가 법률에까지 널리 영향을 미쳐,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요되고 있다.
현대 세계의 불균형
8. 이토록 급속한 사태의 변화, 흔히 무질서하게 진행되는 변혁은 물론, 세상에 가득 찬 불평등에 대한 한층 더 예리한 의식 그 자체가 모순과 불균형을 낳고 또 심화시킨다. 인간 자체에서도 현대의 실천적 지성과 이론적 사색 사이에 더욱더 자주 불균형이 일어나, 자기 지식의 총체를 지배하지도 못하고 이를 종합하여 직접 정리하지도 못한다. 또한 실용 능률의 추구와 도덕적 양심의 요구 사이에서, 또 사회 생활 조건과 개인의 사색과 명상의 요구 사이에서 자주 불균형이 생겨난다. 끝으로, 인간 활동의 전문화와 사물의 전체적 전망 사이에서 불균형이 일어난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인구, 경제, 사회의 중압적인 조건에서, 또는 세대 차에서 오는 어려움에서, 또는 남녀간의 새로운 사회 관계에서 불평등이 생겨난다.
또한 여러 종족들 사이뿐 아니라 사회의 여러 계층 사이에서, 부강한 나라와 빈약한 나라 사이에서, 여러 민족들이 평화 염원으로 만든 국제 기구와 자기 이념 선전의 야욕은 물론 국가나 다른 단체의 집단적 탐욕 사이에서 커다란 불평등이 생겨나고 있다. 거기에서 상호 불신과 증오, 분쟁과 환난이 일어나, 인간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 되고 동시에 희생제물이 된다.
인류의 보편적인 열망
9. 그러면서도 피조물들에 대한 지배를 날로 더욱 강화할 수 있고 또 강화하여야 한다는 인류의 확신이 커져 간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날로 더 나은 봉사를 하고 개인과 집단이 본연의 존엄을 긍정하고 발전시키도록 도와 주는 그러한 정치, 사회, 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인류의 의무라는 확신도 커져 가고 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은 뚜렷한 의식을 지니고 불의와 불공정 분배로 착취당하였다고 여기는 저 재산을 치열하게 요구하고 있다. 최근에 독립한 나라들과 같은 개발 도상국들은 정치 분야뿐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자 하며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자유로이 수행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더 빨리 발전하는 다른 부유한 나라들과 개발 도상국들의 격차는 날로 커져 가고 동시에 흔히 경제적 예속도 심화되고 있다. 굶주림에 짓눌린 사람들이 더 부유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남녀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는 법률과 실제에서 여자들이 남자들과 같은 평등권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들과 농어민들은 생활 필수품을 마련하고 노동으로 자기 인격을 발전시키고자 하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생활 조직에도 참여하기를 바란다. 이제야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모든 민족이, 문화 혜택은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질 수 있고 또 베풀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요구의 이면에는 더 깊고 더욱 보편적인 열망이 감추어져 있다. 곧 개인과 집단이 인간 품위에 알맞은 만족스럽고도 자유로운 삶, 현대 세계가 인간에게 그토록 풍요롭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누리는 그러한 삶을 갈망하고 있다. 더욱이 여러 나라들이 하나의 세계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날로 더욱 힘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다 보니, 현대 세계는 동시에 강하면서도 약하고, 최선을 이루거나 최악을 저지를 수 있으며, 자유와 예속, 진보와 퇴보, 형제애와 증오의 길이 열려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 불러일으킨 힘들이 인간을 억압할 수도 있고 인간에게 봉사할 수도 있으므로 그 힘들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인간 자신의 책임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묻는다.
인류의 심각한 의문
10. 참으로현대 세계를 괴롭히는 불균형은 인간의 마음 속에 뿌리박힌 더욱 근본적인 저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 바로 인간 자체 안에서 여러 요인들이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 가지로 자기 한계를 체험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참으로 무한한 자기 욕망을 느끼며 더 높은 삶으로 부름 받았음을 자각하고 있다. 수많은 유혹에 이끌리는 인간은 끊임없이 어떤 취사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더구나 인간은 연약하고 또 죄인이므로 바라지 않는 일을 하고 바라는 일을 하지 않는 수가 드물지 않다.4)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 분열을 겪고 있으며 바로 거기에서 이토록 허다한 사회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실천적 유물론에 젖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하기를 외면하며, 그리고 불행에 짓눌린 사람들은 이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제시되는 사물의 해석에서 스스로 안식을 찾았다고 여긴다. 또 어떠한 사람들은 오로지 인간의 노력만으로 진정하고 완전한 인류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장차 지구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자기 마음의 온갖 소망을 채워 주리라는 자기 확신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인생의 의미에 절망한 나머지 인간 실존은 고유한 의미가 전혀 없다고 여기며 오로지 인간의 능력만으로 인생에 모든 의미를 부여해 보려고 노력하는 자들의 만용을 찬미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세계의 현재 발전을 직시하며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새삼 예민하게 절감하는 사람들이 날로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토록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저 승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인간은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고 또 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 지상 생활 다음에는 무엇이 따라오는가?
교회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5) 당신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빛과 힘을 주시어 인간이 자신의 드높은 소명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다고 믿는다. 또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은 하늘 아래에서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는다.6) 마찬가지로 교회는 인류 역사 전체의 관건과 중심과 목적을 자신의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모든 변천 속에도 변하지 않는 많은 것이 들어 있으며, 그 불변의 것들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7) 안에 궁극의 토대를 두고 있다고 확언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습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그리스도의8) 빛 아래에서 공의회는 인간의 신비를 밝히고 현대의 주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에 협력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응답
11. 하느님의 백성은 온 누리에 충만하신 주님의 성령께 인도되고 있음을 믿는 그 신앙에 따라, 현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사건과 요구와 염원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 계획의 진정한 징표가 무엇인지 알아 내려고 노력한다. 신앙이야말로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밝혀 주고 인간의 소명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 주며, 따라서 참으로 인간적인 해결로 마음을 이끌어 준다.
공의회는 특히 오늘날 가장 높이 평가되고 있는 저 가치들을 신앙의 빛으로 식별하고 그 신적 원천에 비추어 판단하고자 한다. 이러한 가치들은 하느님께 받은 인간 재능에서 나오므로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들은 인간 마음의 타락으로 그 올바른 방향에서 벗어나는 일이 드물지 않으며 따라서 정화가 필요하다.
교회는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대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무엇을 권고하여야 한다고 보는가? 전세계에서 인간 활동의 궁극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 기대되고 있다. 여기에서 인류와 그 속에 사는 하느님의 백성이 서로 봉사하며, 교회의 사명이 종교적이고, 또 바로 이 사실 자체에서,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것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
12. 세상 만물은 인간을 그 중심과 정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에는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거의 일치한다.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제 자신에 대하여 다양하고도 상반되는 수많은 의견을 내놓았고 또 내놓고 있다. 흔히 인간을 절대적 규범으로 들어 높이거나 또는 절망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무시하며, 거기에서 회의와 고뇌를 한다. 이러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교회는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거기에 대답을 할 수 있고, 그 대답으로 진정한 인간의 조건을 그리고 그 연약함을 밝히는 동시에 인간의 존엄과 소명을 올바로 깨닫게 할 수 있다.
성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자기 창조주를 알고 사랑할 수 있으며, 창조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워져1) 만물을 다스리고 이용하며 하느님을 찬양한다.2)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 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나이다”(시편 8,5-7[4-6]).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외롭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으며”(창세 1,27), 남녀의 결합이 인간 사회의 최초 형태를 이루었다. 인간은 그 깊은 본성에서 사회적 존재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도 없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서에 다시 나오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죄
13 .하느님께서 의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지만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지 않았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 창조주보다는 오히려 피조물을 섬겼다.3) 하느님의 계시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 사실은 바로 우리의 경험과 일치한다. 인간이 제 마음을 살펴볼 때, 선하신 자기 창조주에게서는 올 수 없는 악에 기울어져 있고 수많은 죄악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흔히 하느님을 자기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궁극 목적을 지향하는 당연한 질서마저 무너뜨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조화를 깨트려 버렸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삶은 개인 생활이든 사회 생활이든 참으로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극적인 투쟁으로 드러난다. 더욱이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악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이겨 낼 수 없음을 깨닫고, 또 누구든지 저마다 사슬에 묶여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인간을 해방하시고 그 힘을 북돋아 주시려고 주님께서 친히 오시어 인간을 내적으로 새롭게 하시고,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 묶어 두었던 “이 세상의 통치자”(요한 12,31)를 밖으로 쫓아 내시었다.4) 죄는 인간을 위축시켜 완성을 추구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인간들이 체험하는 드높은 소명과 깊은 불행은 바로 이 계시의 빛 속에서 그 궁극 이유를 발견한다.
인간의 구조
14.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는 인간은 그 육체적 조건을 통하여 물질 세계의 요소들을 자기 자신 안에 모으고 있다. 이렇게 물질 세계는 인간을 통하여 그 정점에 이르며 창조주께 소리 높여 자유로운 찬미를 드린다.5)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적 생활을 천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인간은 하느님께 창조되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자기 육체를 좋게 여기고 존중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죄로 상처받은 인간은 육체의 반역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자기 육체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요구하고6) 육체가 마음의 악한 경향을 따르게 내버려 두지 않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육체적 관심사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고 또 자신이 자연의 한 조각이거나 인간 사회의 한 무명 요소일 수만은 없다고 여겨도 속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 내면성으로 만물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 돌아갈 때 이 깊은 내면성을 찾는 것이고, 거기에서 속마음을 들여다보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기다리고 계시며,7) 바로 하느님의 눈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기 자신 안에서 영적인 불멸의 영혼을 인식하게 될 때에 인간은 다만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서 흘러 나오는 허상에 우롱당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사물의 심오한 진리 자체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성의 존엄, 진리와 지혜
15. 하느님의 지성의 빛을 나누어 받은 인간이 자기 지성으로 만물을 초월한다고 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다. 인간은 오랜 세기에 걸쳐 꾸준히 자기 재능을 발휘하여 경험 과학, 기술, 학문 예술에서 발전을 거듭하여 왔으며,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특히 물질 세계의 탐구와 정복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인간은 언제나 더욱 심오한 진리를 탐구하고 또 발견하였다. 실제로 인간 지성은 오로지 현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비록 죄의 결과로 어느 정도 흐려지고 나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실재를 참으로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의 지적 본성은 마침내 지혜를 통하여 완성되고 또 완성되어야 한다. 지혜는 인간 정신이 참되고 좋은 것을 찾고 사랑하도록 부드럽게 이끌어, 지혜를 지닌 인간은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찾아 내는 온갖 새로운 것들을 더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자면, 현대에는 지난 세기들보다 더욱더 이러한 지혜가 필요하다. 실제로 더욱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일어서지 않으면 세계의 미래 운명은 위기에 빠질 것이다. 더 나아가서,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지혜를 지닌 여러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야 한다. 성령의 은혜로 인간은 하느님 계획의 신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깨달을 수 있다.8)
도덕적 양심의 존엄
16. 인간은 양심의 깊은 곳에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법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거기에 복종하여야 할 법이다. 그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회피하도록 부른다. 필요한 곳에서는 마음의 귀에 대고, 이것을 하여라, 저것을 삼가라 하고 타이른다. 이렇게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기 마음 속에 새겨 주신 법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이며 이 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9)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10)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행되는 저 율법을11) 놀라운 방법으로 알려 준다.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되어 진리를 추구하고 개인 생활과 사회 관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도덕 문제들을 진리 안에서 해결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른 양심이 우세하면 할수록 개인이나 집단이 무분별한 방종에서 더욱 멀어지고 객관적 도덕 기준에 부합하도록 더욱 노력한다. 어쩔 수 없는 무지에서 양심이 잘못을 저지르는 수도 드물지 않지만, 양심이 그 존엄성을 잃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데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죄의 습관으로 양심이 차츰 거의 다 어두워졌을 때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자유의 우월성
17. 오로지 자유로이 인간은 선을 지향할 수 있다. 현대인은 자유를 중시하고 또 열렬히 추구한다. 참으로 옳다. 그러나 자주 그릇된 방법으로 자유를 옹호한다. 자신을 즐겁게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악이라도 할 수 있다는 방종까지도 자유라고 옹호한다. 그러나 참 자유는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 모습의 탁월한 표징이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제 ?프痔? 손에 맡겨 두고자 하셨다.12) 그것은 인간이 자유 의지로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 그분을 따르며 자유로이 충만하고 복된 완전성에 이르도록 바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한다. 곧 맹목적인 내부 충동이나 순전한 외부 강박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적 동기와 권고에 따라 인격적으로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온갖 욕정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선을 선택하여 자기 목적을 추구하고 적절한 도움을 받아 효과적으로 슬기롭게 행동할 때에 인간은 이러한 존엄성을 얻는다. 그러나 죄로 손상된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지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저마다 자기가 한 선악에 따라 하느님의 법정에서 자기 일생에 대한 셈을 치러야 할 것이다.13)
죽음의 신비
18.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이른다. 인간은 꺼져 가는 육체의 쇠약과 고통에 괴로워할 뿐 아니라 영원한 소멸의 공포에 더더욱 괴로워한다. 바로 자기 마음의 본능에 따라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완전한 몰락과 결정적인 파멸을 배척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영원의 씨앗은 한갓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어서 죽음을 거슬러 일어선다. 온갖 기술의 시도가 제아무리 유익하다 하여도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킬 수는 없다. 생물학적 수명의 연장은 인간의 마음 속에 결코 지울 수 없이 새겨진 저 피안의 삶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죽음 앞에서는 온갖 상상이 다 힘을 잃어버리지만,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교회는 인간이 지상 불행의 한계를 넘어 행복한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육체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며,14) 인간이 자기 죄로 잃어버린 구원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구원자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때에 죽음은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영원 불멸하는 신적 생명의 친교 안에서 전 존재로 당신을 따르도록 인간을 부르셨고 또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생명으로 부활하시어 거두신 것이다.15) 따라서 확고한 논증에 바탕을 둔 신앙은 깊이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미래의 운명에 대한 그의 불안에 해답을 준다. 또한 동시에 신앙은 이미 죽음으로 먼저 빼앗긴 사랑하는 형제들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힘을 주며, 그들이 하느님 곁에서 참 생명을 얻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다 준다.
무신론의 형태와 근원
19. 인간 존엄성의 빼어난 이유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름 받은 인간의 소명에 있다.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받는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보존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랑을 자유로이 인정하고 자기 창조주께 자신을 맡겨 드리지 않고서는 인간은 온전히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따라서 무신론은 현대의 극히 중대한 문제로 여겨야 하고 더욱더 치밀한 검토를 하여야 한다.
무신론이란 말은 서로 매우 다른 현상들을 가리킨다. 명백히 신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은 신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에 대한 문제가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그러한 방법으로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부당하게도 실증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 만사를 과학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그와 반대로 더 이상 어떠한 절대 진리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거의 무력해질 정도로 인간을 들어 높인다. 신 부정보다는 인간 긍정에 더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신을 만들어 놓고 그 형상을 부정하지만, 그러한 신은 결코 복음의 하느님이 아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신에 관한 문제를 전혀 다루지도 않는다. 그들은 종교적 불안을 체험하지도 못하는 것 같고, 종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무신론은 세상의 죄악에 대한 격렬한 저항에서 생기고 또는 어떤 인간 가치를 부당하게 절대화하여 그것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데에서 생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바로 현대 문명이, 그 자체가 그렇지는 않더라도 지상 사물에 너무 얽혀 있어, 흔히 하느님께 대한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다.
분명히 자유 의사로 자기 마음에서 하느님을 몰아 내고 종교 문제를 회피하여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양심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이므로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신앙인들 자신도 어느 정도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무신론이란 전체적으로 보아 원초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 원인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원인들 가운데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반동, 어떤 지역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발이 보태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이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 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린다면, 신앙인들은 이 무신론의 발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체계적 무신론
20. 현대 무신론은 흔히 체계적 형태를 드러내는데,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그 형태는 인간 자율의 열망을 지나치게 펼쳐 신에 대한 어떠한 의존도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무신론을 주창하는 자들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목적이 되고 고유한 자기 역사의 유일한 창조자요 형성자가 되는 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곧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목적이신 주님께 대한 긍정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거나 적어도 자유는 그러한 신 긍정을 완전히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대의 기술 발전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만능 의식이 이러한 이론을 주장할 수 있다.
현대 무신론의 형태 가운데에서 인간 해방을 특히 경제적 사회적 해방에서 기대하는 무신론을 간과할 수 없다. 종교는 본질상 이러한 인간 해방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다. 종교가 인간에게 허황된 내세의 삶에 대한 희망을 일으켜, 지상 국가의 건설을 외면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의 지지자들이 국가 통치를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는 종교를 맹렬히 공격하며, 특히 청소년 교육에서 공권력이 동원할 수 있는 압력 수단을 다하여 무신론을 전파하고 있다.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태도
21. 하느님과 인간을 충실히 섬기는 교회는, 슬프게도 인간 이성과 공통 경험에 반대될 뿐 아니라 인간을 그 고귀한 천품에서 추락시키는 저 위험한 이론과 운동을 과거에 배격하였던 것과 같이 단호히 배척한다.16) 그러나 교회는 무신론자들의 마음 속에서 신 부정의 숨은 이유를 찾아 내려고 노력하며, 무신론이 일으키는 문제들의 중요성을 깨닫고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문제들을 진지하게 또 깊이 검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신 긍정이 인간 존엄성에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하느님 안에 기초를 두고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께 지성과 자유를 지닌 사회적 존재로 창조되었고 더욱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며 하느님의 행복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더 나아가서 종말론적 희망이 지상 임무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동기를 주어 지상 임무의 완수에 도움을 준다고 가르친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께 기초를 두지 않고 영생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오늘날 흔히 그러하듯 인간의 존엄성은 극심히 손상될 것이며, 생명과 죽음, 죄와 고통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아 사람들은 흔히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한편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어렴풋이만 이해되는 미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실제로 어떤 기회에, 특히 인생의 주요 사건에서 앞서 말한 의문을 아무도 완전히 회피할 수는 없다. 이 물음에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완전하고 가장 확실하게 답변하여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더 높은 사색과 더욱 겸허한 탐구로 인간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무신론의 치유는 한편으로는 교리의 올바른 제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완전한 삶에서 기대하여야 한다. 교회가 할 일은 하느님 아버지와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을 마치 눈에 보이듯이 제시하고 성령의 인도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쇄신하고 정화하는 것이다.17) 그것은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성숙한 신앙의 증거, 곧 어려움을 분명히 알고 이겨 낼 수 있도록 훈련받은 신앙의 증거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빛나는 신앙의 증거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보여 주었고 또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신앙이 신자들의 전 생활에, 세속 생활에까지 젖어들어 신자들이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그 풍요성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마침내, 한마음 한뜻으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위하여 함께 분투하며18) 일치의 표지로 드러나는 신자들의 형제애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는 데에 매우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교회는, 비록 무신론을 완전히 배격하지만,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을 바로 건설하도록 힘을 합쳐야 한다고 진정으로 선언한다. 이는 분명히 진지하고 신중한 대화가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국가의 지도자들이 인간의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고 불의하게 자행하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별을 개탄한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성전도 세울 수 있는 실질적 자유를 요구한다. 또한 무신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린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도록 정중하게 권유한다.
교회가 이미 인간의 드높은 운명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되살려 주며 인간 소명의 존엄성을 수호할 때에 교회는 자신의 메시지가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열망과 일치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교회의 메시지는 인간을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발전을 위하여 빛과 생명과 자유를 쏟아부어 준다. 또한 그 밖에는 아무것도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다. “주님, 주님을 위하여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19)
새 인간 그리스도
22. 실제로,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 첫 인간 아담은 장차 오실 분, 곧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예형이었다.20) 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바로 그 계시 안에서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진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그 근원을 두고 그분 안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골로 1,15)21)이신 그분께서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아담의 후손들에게 최초의 범죄 때부터 이지러졌던,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분 안에 받아들여진 인간 본성이 소멸되지 않았으므로,22)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인간 본성도 고상한 품위로 들어 높여졌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바로 그분께서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정신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23)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어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 말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같아지셨다.24)
무죄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유로이 흘리신 당신 피로 우리에게 생명을 얻어 주셨고, 또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시고 우리를 서로 화해시켜 주셨으며25) 악마와 죄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구해 내시어, 우리가 누구나 사도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하셨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셨다”(갈라 2,20).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모범을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26) 또또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우리가 그 길을 따른다면, 삶과 죽음이 거룩하게 되고 새로운 뜻을 가지게 된다.
많은 형제 가운데 맏아들이신27) 성자의 모습을 닮게 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첫 선물로”(로마 8,23) 받아, 그 선물로써 사랑의 새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된다.28) “상속의 보증”(에페 1,14)이신 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몸이 해방될”(로마 8,23) 때까지 온 인간이 내적으로 쇄신된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로마 8,11).29) 분명히 수많은 환난 가운데에서 악을 거슬러 싸우고 죽음까지도 겪어야 할 필요와 의무가 그리스도인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파스카 신비에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화되어 부활을 향한 희망으로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30)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은총이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들어맞는 말이다.31)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32)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인간의 신비는 이와 같이 위대한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교 계시를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밝혀지는 신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과 죽음의 수수께끼가 밝혀지며, 그분의 복음을 떠나면 우리는 그 수수께끼에 짓눌려 버린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쳐부수고 부활하셨으며, 풍성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33) 우리가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34)
공의회의 의도
23. 현대 세계의 주요 양상 가운데 하나는 인간 상호 관계의 복합성이며, 그러한 전개에는 현대 기술의 진보가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형제적 대화는 이러한 진보가 아니라 인간 공동체 안에서 더 깊이 이루어진다. 그 대화는 인간의 완전한 정신적 존엄에 대한 상호 존중을 요구한다. 참으로 그리스도교 계시는 이러한 인간 친교의 증진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동시에 창조주께서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본성에 새겨 주신 사회 생활 법칙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교회 교도권의 최근 문서들이 인간 사회에 관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더 상세히 제시하였으므로1) 공의회로서는 다만 몇 가지 더 중요한 진리만을 상기시키고 그 진리의 토대를 계시의 빛으로 밝힌다. 그런 다음에 우리 시대에 더 중요한 어떤 영향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소명의 공동체적 특성
24. 만민을 아버지로서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 형제애로 대접하기를 바라셨다.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신”(사도 17,26)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똑같은 하나의 목적, 바로 하느님께로 부름 받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첫째가는 가장 큰 계명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이다”(로마 13,9-10; 1요한 4,20 참조). 날로 더욱 서로 의존해 가는 사람들에게 또 날로 더욱 하나로 합쳐지는 세상에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22) 하시며 성부께 기도하실 때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시야를 열어 주셨으며,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과 신적 위격의 결합이 지닌 어떤 유사성을 가리켜 주셨다. 이 유사성은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2)
개인과 사회의 상호 의존성
25. 개인의 진보와 그 사회의 발전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서 드러난다. 사실 인간은 바로 그 본성에서 반드시 사회 생활이 필요하므로, 모든 사회 제도의 근본도 주체도 목적도 인간이며 또 인간이어야 한다.3) 사회 생활은 인간에게 덧붙여진 우연한 그 무엇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상호 의무, 형제적 대화 등으로 인간은 되도록 자신의 모든 재능을 키우고 자기 소명에 응답할 수 있다. 인간 계발에 필요한 사회적 유대들 가운데에서 가정과 정치 공동체 같은 어떤 유대는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에 더 직접적으로 부합하고, 다른 유대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 의사에서 나온다. 현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상호 관계와 상호 의존성이 날로 복잡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공립이든 사립이든 다양한 연합과 단체가 생겨나고 있다. 사회화라 불리는 이 사실은 실제로 위험도 없지 않지만 개인의 역량을 고취하고 신장시키며 인권을 옹호하도록 수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다.4)
인간은 자기 소명, 종교적인 소명의 완수를 위하여 사회 생활에서 많은 것을 얻지만,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그 속에 잠겨 살아가는 사회 환경 때문에 흔히 선행에서 멀어지고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빈번히 일어나는 사회 질서의 혼란이 부분적으로는 경제, 정치, 사회 구조의 긴장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깊숙이는 인간의 오만과 이기주의에서 생겨나며, 이는 또한 사회 영역까지 부패시킨다. 죄의 결과로 사물의 질서가 어지럽혀진 곳에서, 인간은 날 때부터 악에 기울어져 있고 그 다음에도 죄에 대한 새로운 충동과 부딪친다. 줄기찬 노력과 은총의 도움 없이는 이를 이겨 낼 수 없다.
공동선의 증진
26. 날로 더욱 긴밀해지고 점차 전세계로 확산되는 상호 의존성에서, 공동선은─곧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 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 생활 조건의 총화는─오늘날 더욱더 전세계적인 것이 되고 거기에 온 인류와 관련되는 권리와 의무를 내포하게 되었다. 어떠한 집단이든 다른 집단의 요구와 정당한 열망, 더욱이 온 인류 가족의 공동선을 고려하여야 한다.5)
또한 동시에 인간이 지닌 고귀한 존엄성에 대한 의식이 커지고 있다. 인간은 만물에 앞서고 또 인간의 권리와 의무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곧 의식주, 생활 신분의 자유로운 선택, 가정 형성, 교육, 노동, 명예, 존경, 적절한 정보, 자기 양심의 바른 규범에 따른 행동, 사생활 보호의 권리 그리고 종교 문제에서도 정당한 자유를 누릴 권리가 인간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 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 사물의 안배는 인간 질서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친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6) 하셨을 때에 이를 가리키신 것이다. 사회 질서는 날로 발전하며, 진리에 토대를 두고, 정의 위에 세워져 사랑으로 활력에 넘쳐야 한다. 또한 자유에서는 날로 더욱 인간적인 균형을 잡아야 한다.7) 그리고 이렇게 되려면 정신의 개혁과 더불어 광범한 사회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묘한 섭리로 시간의 흐름을 다스리시며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이러한 발전을 도와 주신다. 또한 복음의 누룩이 인간 존엄의 억누를 수 없는 요구를 마음 속에 불러일으켰고 또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간 존중
27. 실천적이고 더욱 긴급한 결론을 내려서, 공의회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저마다 이웃을 어떠한 예외도 없이 또 하나의 자신으로 여겨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웃의 생활을 고려하여 그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수단들을 보살펴야 한다.8) 가난한 라자로를 조금도 돌보지 않았던 저 부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9) 특히 현대에서는 우리 자신이 그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 주고 누구를 만나든지 적극적으로 봉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노인이든, 불의하게 천대받는 외국인 노동자이든, 피난민이든, 불법적인 결합으로 태어나 자기가 짓지 않은 죄 때문에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어린이이든, 그리고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우리 양심에 호소하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온갖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을 해치는 고문, 심리적 억압과 같이 인간의 온전함에 폭력을 자행하는 모든 행위;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 감금, 추방, 노예화, 매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 매매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 또한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당하는 굴욕적인 노동 조건; 이 모든 행위와 이 같은 다른 행위들은 참으로 치욕이다. 이는 인간 문명을 부패시키는 한편,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도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을 더 더럽히며,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는것이다.
반대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
28. 사회, 정치, 종교 문제에서 우리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하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존경하고 사랑하여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의 사고 방식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그들과 더욱 쉽게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이러한 사랑과 호의가 진리와 선에 대하여 우리를 무관심하게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된다. 오히려 바로 그 사랑??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도록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오류와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을 구별하여야 한다. 오류는 언제나 배격하여야 하지만,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은 비록 그릇되거나 부정확한 종교적 개념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인간 존엄성을 간직하고 있다.10) 하느님 홀로 심판자이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누구의 내적인 죄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11)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가 받은 모욕까지 용서하라고 요구하며, 사랑의 계명을 모든 원수에게까지 확대시킨다. 이것이 신약의 계명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12)
모든 사람의 본질적 평등과 사회 정의
29. 모든 사람이 이성적 영혼을 갖추고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같은 본성과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또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고 동일한 신적 소명과 목적을 지니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의 근본적 평등은 더욱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분명히 육체적 능력이 다르고 지성적 도덕적 역량이 다르므로 모든 사람이 동등하지는 않다. 그러나 인간 기본권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 사회적이든 문화적이든, 또는 성별, 인종, 피부색, 사회적 신분, 언어, 종교에서 기인하는 차별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극복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한 인간 기본권이 아직도 어디에서나 온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를테면 자유로이 배우자를 선택하고 생활 신분을 받아들일 권리, 또는 남성이 받을 수 있는 것과 동등한 교육과 문화의 기회가 여성에게 거부되는 경우가 그렇다.
더욱이 인간들 사이에 정당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평등한 인간 존엄성은 더욱 인간답고 공평한 생활 조건에 이르게 되기를 요구한다. 하나인 인간 가족의 구성원들이나 민족들 사이의 지나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추문을 일으키고, 사회 정의, 평등, 인간 존엄성은 물론 사회적 국제적 평화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립이든 공립이든 모든 인간 단체는 인간의 존엄과 목적에 봉사하며 온갖 사회적 정치적 예속을 거슬러 줄기차게 투쟁하고 모든 정치 체제 아래에서 인간의 기본권을 수호하도록 진력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단체들은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때로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모든 것 가운데에서 가장 드높은 정신적 실재에 점차 부응해 나가야 한다.
개인주의 윤리의 극복
30. 심각하고 급속한 사태의 변화는 어느 누구도 사태의 추이에 무관심하거나 게으름으로 무기력해져 순전히 개인주의 윤리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고 더욱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능력과 타인의 필요에 따라 공동선에 기여하고 사립이든 공립이든 인간의 생활 조건 개선에 이바지하는 단체들을 밀어 주고 도와 줌으로써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더욱더 잘 이행할 수 있다. 그러나 풍부하고 관대한 견해를 내세우면서도 언제나 실제로는 사회의 요구를 전혀 돌보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법률과 규정을 무시한다. 또한 갖가지 사기와 간계로 정당한 세금이나 사회에 대한 다른 의무의 회피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회 생활의 어떤 규범들, 예를 들어 보건 위생법이나 차량 운전 법규 등을 경시하며, 자기가 이러한 부주의로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사회적 연대 책임을 현대인의 주요 의무로 여기고 이를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세계가 하나로 결합될수록 더욱 분명히 인간의 임무도 개별 집단을 뛰어넘어 점차 전세계로 확대되어 간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각 개인과 개별 단체들이 스스로 도덕적 사회적 덕을 닦고 그 덕행을 사회에 확산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여 필요한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참으로 새로운 인간, 새로운 인류의 창조자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책임과 참여
31. 각 개인이 자기 자신과 그 소속 집단에 대한 양심의 의무를 더욱 엄밀하게 이행하려면, 오늘날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수많은 수단을 이용하여 더욱 폭넓은 정신 교양을 쌓도록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특히 어떠한 사회적 출신이든 모든 청소년의 교육에 힘써 우리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대로 탁월한 재능만이 아니라 위대한 정신을 갖춘 남자들과 여자들이 일어서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책임 의식을 지니게 되려면, 반드시 자신의 존엄을 깨닫고 하느님과 이웃에 헌신하는 자기 소명에 부응할 수 있는 생활 조건이 부여되어야 한다. 인간이 극도의 빈곤 속에 빠지게 되면 인간의 자유는 흔히 더욱 무기력해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나치게 안일한 생활에 빠져들어 이를테면 황금의 고독 속에 자신을 가두어 버리면 인간의 자유는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그와 반대로 인간이 사회 생활의 불가피한 관계를 인정하고, 인간 관계의 수많은 요구를 받아들이며, 인간 공동체의 봉사에 헌신할 때에 인간의 자유는 더욱 굳건해진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공동 활동에서 자기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그 의욕을 북돋워 주어야 한다. 대다수의 국민이 참된 자유로 국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국가 제도는 치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그 국민의 현실 상황과 국가 권위에 필요한 힘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활동에 모든 국민이 쉽게 참여하게 하려면 이 집단들이 사람들을 이끌어들여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만드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당연히 삶의 의미와 희망의 근거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인류의 미래 운명이 놓여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 되신 말씀과 인간 연대
32. 하느님께서 인간을 혼자서 살아가도록 하지 않으시고 사회적 결합을 이루도록 창조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또한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13) 구원 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13) 구원 역사의 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공동체의 지체로서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 주시고, 그들을 “내 백성”(출애 3,7-12)이라 부르셨으며, 더 나아가서 이 백성과 더불어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으셨다.14)
그러한 공동체적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성취되고 완성되었다. 바로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고자 바라셨기 때문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시고, 자캐오의 집으로 내려가셨으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극히 평범한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일상 생활의 언어와 표상을 쉽게 활용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인간의 고귀한 소명을 보여 주셨다. 인간 관계, 특히 사회 생활의 근원이 되는 가정의 유대를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 조국의 법률을 자원하여 지키셨다. 당시 그 지역의 노동자 생활을 하고자 하셨다.
설교하실 때에는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서로 형제로서 대접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다. 기도하실 때에는 당신의 모든 제자가 하나 되기를 간청하셨다. 더욱이 그분께서는 만민의 구세주로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시어 인류가 하느님의 가족이 되고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 되게 하셨다. 많은 형제들의 맏아들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 후에 당신을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 가운데에 당신 성령을 주시어 바로 당신의 몸 안에서, 곧 교회 안에서 새로운 형제적 친교를 이루게 하셨다. 그 안에서는 모든 이가 서로서로 지체를 이루고 주어진 여러 가지 은사에 따라 서로 봉사한다. 이러한 연대는 완성되는 그 날까지 언제나 증진되어야 할 것이다. 그 날, 은총으로 구원된 사람들은 하느님과 형제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는 가족으로서 완전한 영광을 하느님께 드릴 것이다.
문제 제기
33. 인간은 자기 노력과 재능으로 자신의 삶을 더욱 폭넓게 발전시키려고 언제나 분투하여 왔다. 오늘날에는 특히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그 지배권을 거의 온 자연계로 확장하였고 또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 또 무엇보다도 국가들 사이의 수많은 교류 수단의 증가에 힘입어 인류 가족은 점차 전세계의 한 공동체임을 자각하고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옛날에 특히 하늘의 힘에 기대하였던 많은 복을 오늘날에는 이미 자신의 노력으로 마련하게 되었다.
이미 온 인류에게 번져 가는 이 거대한 노력 앞에서, 사람들 사이에 많은 물음이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그러한 노력은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 개인이나 사회의 노력은 무슨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는가? 하느님 말씀의 유산을 지키며 거기에서 종교적 도덕적 분야의 원리를 길어 올리는 교회는, 언제나 각각의 문제에 대하여 즉각적인 답변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시의 빛을 모든 이의 경험과 결합시켜 인류가 최근에 들어선 여정을 비추어 주고자 한다.
인간 활동의 가치
34. 개인적 집단적 인간 활동, 곧 인간이 여러 세기를 거쳐 자신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려는 저 거대한 노력 그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일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세상을 정의와 성덕으로 다스리며,1)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알고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을 하느님께 다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은 만물을 다스려 하느님의 이름이 온 땅에 빛나게 하여야 한다.2)
이 명령은 또한 모든 일상 활동과 관련된다. 실제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마련하면서 사회에 적절히 봉사하도록 활동을 해 나가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당연히 자기가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활동을 펼치고 자기 형제들의 이익을 돌보며 개인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역사 속에서 성취시키는 데에 이바지한다고 여길 수 있다.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자기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 낸 작품들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적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징표이며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이 커질수록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인간의 책임도 더욱 확대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사람들이 세계 건설을 외면하게 하거나 자기 동료들의 행복을 소홀히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러한 활동을 하도록 의무로써 더욱 단단히 붙들어 매고 있다.4)
인간 활동의 규범
35. 인간 활동은 인간에게서 나오듯이 인간을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인간은 일을 하면서 사물과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완성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신의 능력을 기르며 자기를 벗어나 자기를 초월한다. 이러한 성장은, 바로 이해한다면, 모을 수 있는 외적 재산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오히려 어떠한 존재이냐에 따라 가치를 지닌다.5) 마찬가지로, 더 큰 정의, 더 넓은 형제애, 사회 관계에서 더 인간다운 질서를 확립하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기술의 발전보다 더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 진보에 물질적 바탕을 마련할 수 있지만 결코 그 자체만으로 인간 진보의 실현을 이끌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활동의 규범은 바로 하느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인류의 참 행복에 부합하고 개인으로든 사회 속에 자리하든 인간에게 완전한 자기 소명의 계발과 성취를 허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
36. 그러나 많은 현대인은 인간 활동과 종교의 더욱 밀접한 결합으로 인간이나 사회나 학문의 자율성이 침해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세 사물의 자율성을, 피조물과 사회 자체가 고유의 법칙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이 점차 이를 분별하고 이용하고 안배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와 같은 자율성을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것은 현대인이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창조주의 뜻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사실, 만물은 창조의 조건 자체에서 고유의 안정성과 진리와 선, 또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은 이를 존중하여야 하고, 학문이나 기술의 각기 고유한 방법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덕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6)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만물을 보존하시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어떤 때에는 바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없지 않았지만, 거기에서 논쟁과 갈등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신앙과 과학을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던 정신 자세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7)
그러나 만일 ‘현세 사물의 자율성’이란 말이, 피조물들이 하느님께 의존하지 않는다거나 인간이 피조물을 창조주께 돌려 드리지 않고 멋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하느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생각이 몹시 그릇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어떠한 종교이든 모든 신앙인은 언제나 피조물들의 언어 안에서 창조주의 현현과 목소리를 들어 왔다.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피조물 자체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죄로 타락한 인간 활동
37. 또한 성서는, 역사의 경험과 일치하여, 인간 진보는 인간의 커다란 선익이지만 큰 유혹도 함께 가져다 준다고 인류 가족에게 가르쳐 준다. 실제로 가치 질서가 뒤집히고 선과 악이 뒤섞여 사람들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오로지 자기 것만을 헤아리고 남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세상은 이미 참된 형제애의 자리가 되지 못하고, 인류의 증대된 힘은 벌써 인류 자체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한다. 암흑의 세력에 대한 힘든 투쟁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이 투쟁은 태초부터 시작되어 주님의 말씀대로8)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 투쟁에 뛰어든 인간은 선을 고수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하느님의 도우시는 은총과 커다란 노력이 없으면 자기 자신 안에서 통일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느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인간 진보가 인간의 참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 세상을 본받지 마라.”(로마 12,2) 하신 사도의 말씀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곧 하느님과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안배된 인간 활동을 죄의 도구로 변질시키는 저 허영과 악의에 찬 정신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저 불행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릇된 자기 사랑과 오만 때문에 날마다 위험을 겪고 있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정화하고 완성으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고 성령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하여야 한다. 하느님께 그 피조물들을 받아, 이를테면 하느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기고 존중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복을 내려 주신 분께 그 피조물에 대하여 감사하고 청빈과 자유의 정신으로 피조물을 사용하고 누리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서9) 세상의 진정한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고린 3,22-23).
파스카 신비 안에서 완성된 인간 활동
38.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이 생겨났으며, 바로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땅에 머무르셨다.10) 하느님의 말씀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세상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고 그 역사를 당신 안에 받아들이시어 새롭게 재창조하셨다.11)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 하고 알려 주시며, 또한 인간 완성과 세계 개혁의 근본 법칙은 사랑의 새 계명이라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이들에게 사랑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보편 형제애를 이룩하려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신다. 동시에 이 사랑은 중대한 일만이 아니라 먼저 일상의 생활 환경에서 힘써 실천하여야 한다고 권고하신다. 우리 모든 죄인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시며12) 당신 표양으로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어깨에 육신과 세상이 지워 주는 십자가도 져야 한다고 우리를 가르치신다. 당신 부활로 주님이 되시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는13) 당신 성령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활동하고 계시며 다가올 세기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실 뿐 아니라, 그 열망으로 인류 가족이 자신의 삶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고 온 땅을 이 목표에 이르게 하려는 간절한 희망을 일깨우시고 정화하시고 복돋워 주신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는 여러 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천상 생활에 대한 열망을 명백히 증언하여 인류 가족 안에 그 열망을 생생하게 간직하도록 부르시고, 또 어떤 사람은 인간들을 위한 현세적 봉사에 헌신하여 이 봉사로 하느님 나라의 바탕을 마련하도록 부르신다. 마침내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시어, 자기 사랑을 버리고 지상의 모든 힘을 인간 생활로 끌어들여 인류 자체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제물이 될14) 미래를 향하여 성장하게 하신다. 이 희망의 보증과 노자를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위하여 저 신앙의 성사 안에 남겨 주셨다. 이 성사 안에서 인간의 손으로 가꾼 자연 요소들이 영광스러운 성체와 성혈로 변화된다. 이 성사는 형제적 친교의 만찬이며 천상 잔치를 미리 맛보는 선취이다.
새 땅과 새 하늘
39. 우리는 땅과 인류가 완성되는 때를 모르며,15) 우주 변혁의 방법도 알지 못한다. 죄로 이지러진 이 세상의 모습은 반드시 사라진다.16) 그러나 그러나 하느님께서 정의가 깃들이는 새로운 집과 새로운 땅을 마련하시리라는17) 가르침을 우리는 받고 있다. 그 행복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평화의 모든 열망을 채우고 또 넘칠 것이다.18) 그그 때에 죽음은 패배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이며, 허약하고 썩을 몸에 심겨진 것이 불멸의 옷을 입을 것이다.19) 사랑과 그 업적은 남을 것이며,20)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저 모든 피조물이 허무의 종살이에서 해방될 것이다.21)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22) 하는 경고를 우리는 듣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이 땅을 가꾸려는 관심을 약화시켜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 땅에는 이미 새로운 세기의 어떤 밑그림을 제시하여 줄 수 있는 저 새로운 인류 가족의 몸이 자라고 있다. 따라서 현세 진보는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 진보가 인간 사회의 더 나은 개선에 이바지할 수 있는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다.23)
인간의 존엄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의 가치들, 곧 우리 본성과 노력의 훌륭한 열매인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주님의 성령 안에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지상에 널리 전파한 다음,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보편되고 영원한 나라,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24) 를 돌려 드릴 때에, 모든 때를 씻어 버리고 찬란하게 변모된 그 가치들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이 지상에 그 나라는 이미 신비로이 현존하며, 주님께서 오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
교회와 세계의 상호 관계
40. 인간의 존엄, 인간 공동체, 인간 활동의 깊은 뜻에 대하여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은 교회와 세계 관계의 토대와 더불어 그 상호 대화의 바탕을 이룬다.1) 그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이 공의회가 교회의 신비에 대하여 이미 발표한 모든 것을 전제로 하고, 이제 이 세계 안에 존재하고 세계와 더불어 살아가며 활동하는 그 동일한 교회를 고찰하여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영원하신 성부의 사랑에서 나와,2) 시간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께 세워지고, 성령 안에서 하나로 모인3) 교회는 미래 세기에서만 완전히 성취될 수 있는 구원의 종말론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미 여기 지상에 현존하고 있으며, 사람들로 곧 지상 국가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람들은 인류 역사 안에서 이미 하느님 자녀들의 가정을 이루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언제나 그 가족을 불려 나가도록 부름 받고 있다. 또한 천상 보화로 결합되고 부요하게 된 이 가족은 그리스도에게서 “이 세상에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로서”4)“가시적 사회적 결합의 적절한 수단도”5) 갖추고 있다. 이렇게 교회는 동시에 “가시적 집단인 동시에 영적인 공동체 ”6)로서 온 인류와 함께 걸어가 세계와 함께 동일한 지상 운명을 체험하고 있다. 교회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되고 하느님의 가족으로 변화되어야 할 인류 사회의 누룩으로서 또 마치 그 혼처럼7) 존재한다.
참으로 지상 국가와 천상 국가의 이러한 융합은 신앙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고 인류 역사의 신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인류 역사는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이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죄로 어지럽혀질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자기 고유의 구원 목적을 추구하며 인간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어 줄 뿐 아니라 그 생명의 빛을 어느 모로 온 세상에 되비추고 있다. 특히 인간의 존엄을 치유하고 향상시키며, 인류 사회의 결속을 강화하고, 인간의 일상 활동에 더욱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세상에 빛을 비춘다. 이렇게 교회는 그 구성원 각자와 온 공동체를 통하여 인류 가족과 그 역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데에 많은 것을 이바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는 이 똑같은 임무를 완수하는 데에 다른 그리스도 교회나 공동체들이 협동하여 이바지하였고 이바지하고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고 높이 평가한다. 동시에 교회는 복음의 준비에서 세계로부터 개인이나 인간 사회의 역량과 활동으로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굳게 확신한다. 교회와 세계에 어느 정도 공통된 영역에서 올바로 촉진하여야 할 이러한 상호 교류와 도움의 몇 가지 일반 원칙들을 제시한다.
교회가 개인에게 주고자 하는 도움
41. 현대인은 자기 인격을 더욱 충만히 계발하고 날로 더욱 자기 권리를 찾아 내고 주장해 나가는 도정에 있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 목적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밝혀 주는 것이 교회에 맡겨진 사명이므로, 교회는 동시에 인간에게 그 고유한 실존의 의미, 곧 인간에 대한 깊은 진리를 밝혀 준다. 참으로 교회는, 오로지 자신이 섬기는 하느님께서만 지상의 양식으로는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열망을 충족시켜 주심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이 성령의 격려를 받고 있으므로 결코 종교 문제에 온전히 무관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는 지나간 세기들의 경험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수많은 증언으로 입증되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인생의 의미, 자신의 활동과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적어도 어렴풋이나마 알고자 갈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현존 자체가 이러한 문제들을 인간의 마음에 상기시켜 준다.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신 하느님 홀로 이러한 문제에 완전한 해답을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들 안에서 계시를 통하여 그 해답을 주신다.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더 인간답게 된다.
이런 신앙에서 교회는 인간의 존엄을 온갖 견해의 변천에서, 예컨대 인간의 육체를 너무 업신여기거나 지나치게 드높이는 견해에서 보호할 수 있다. 어떠한 인간의 법률도 교회에 맡겨진 그리스도의 복음만큼 적절하게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이 복음은 하느님 자녀들의 자유를 알리고 선포하며 궁극적으로 죄에서 나오는 온갖 예속을 배척하고,8) 양심의 존엄과 그 자유 결정을 거룩히 존중하고, 인간의 모든 재능을 하느님께 대한 봉사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배가시키라고 끊임없이 권고하며, 모든 사람을 모든 사람의 사랑에 맡긴다.9) 이는 그리스도교 경륜의 근본 법칙과 일치한다. 똑같은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고 동시에 구세주이시며 또 인류 역사와 구원 역사의 주인이시지만, 바로 이 신적 질서 안에서 피조물 특히 인간의 정당한 자율성을 결코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존엄성 안에서 자율성을 회복시키시고 강화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의 힘으로 인간의 권리를 천명하고 이 권리를 어디에서나 증진하는 현대의 힘찬 움직임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복음 정신에 젖어들어, 온갖 그릇된 자율에서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법의 모든 규범에서 벗어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인간 권리가 완전히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이 보존되기는커녕 오히려 소멸되고 만다.
교회가 인류 사회에 주고자 하는 도움
42. 인류 가족의 일치는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하느님 자녀들의 가족 일치로10) 더욱 튼튼해지고 완성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맡기신 고유한 사명은 정치, 경제, 사회의 질서에 있지 않다. 교회에 설정된 목적은 종교 질서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11) 그러나 바로 이 종교적 사명에서 하느님 법을 따라 건설되고 강화되어야 할 인간 공동체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임무와 빛과 힘이 흘러 나온다. 또한 필요하다면, 시간과 장소의 상황에 따라 교회는 자선 사업이나 다른 위대한 활동처럼, 모든 사람을 위하여 특히 빈곤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활동을 일으킬 수 있고 또 반드시 일으켜야 한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오늘날 사회 운동에서 발견되는 좋은 것은 무엇이든, 특히 일치를 향한 진보, 건전한 사회화 과정, 경제적 시민적 연합의 진전을 인정한다. 일치의 증진은 바로 교회의 가장 깊은 사명과 부합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12)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회는 사회의 진정한 외적 일치가 정신과 마음의 일치에서, 곧 성령 안에서 그 일치를 결코 풀어질 수 없게 이루어 주는 저 믿음과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 준다. 교회가 현대 인류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도 생활에서 실천되는 저 믿음과 사랑 안에 있는 것이지 순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사하는 어떤 외적 지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는 그 사명과 본질의 힘으로 인류 문화의 어떤 특수 형태나 어떤 특정 정치, 경제, 사회 체제에 얽매이지 않는다. 바로 이 보편성 때문에, 여러 인간 공동체와 국가들이 교회를 신뢰하고 그 사명 완수를 위한 참된 자유를 실제로 인정하기만 하면, 교회는 그들 사이에서 가장 긴밀한 유대가 되어 줄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자기 자녀들이 또한 모든 사람이 하느님 자녀들의 이러한 가족 정신으로 국가와 민족 사이의 온갖 갈등을 극복하고 인간의 정당한 연합체들에게 내적인 견고성을 부여하도록 권고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만들었고 또 끊임없이 만들고 있는 극히 다양한 단체들에서 발견되는 참된 것, 좋은 것, 옳은 것은 무엇이든 이 공의회는 커다란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더욱이, 교회에 소속되고 자신의 사명과 합치될 수 있는 한, 교회는 이 모든 단체를 도와 주고 증진하기 바란다고 선언한다. 인간과 가정의 기본 권리와 공동선의 요구를 인정하는 어떠한 체제 아래에서든, 교회는 모든 사람의 행복에 봉사하면서 스스로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것 말고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인간 활동에 주고자 하는 도움
43. 공의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천상 국가와 지상 국가의 시민으로서 복음의 정신에 따라 현세의 자기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하도록 권고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고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13) 그 때문에 자기의 현세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바로 신앙을 통하여 각자 부름 받은 그 소명에 따라 현세 의무를 더더욱 이행하여야14)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또 이와는 반대로, 종교 생활이란 다만 혼자서 하는 예배 행위와 어떤 도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뿐이라고 여겨, 현세 활동은 종교 생활과 전혀 다르다는 듯이 스스로 현세 활동에 몰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똑같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 사이의 저 괴리는 현대의 중대한 오류로 여겨야 한다. 이러한 추문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자들이 격렬히 비난하였고15) 더 더욱이나 신약에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대한 벌로 경고하셨다.16) 따라서 한편으로 직업적 사회적 활동과 다른 한편으로 종교 생활을 서로 부당하게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 자기의 현세 의무를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웃은 물론 바로 하느님께 대한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고 또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위험에 빠트린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목수 일을 하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인간적, 가정적, 직업적, 학문적 또는 기술적 노력을 종교적 가치와 결부시켜 활력에 찬 하나의 종합을 이루어 자기의 온갖 현세 활동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다. 그 종교적 가치의 드높은 질서 아래에서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지향하게 된다.
세속의 직무와 활동은, 비록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평신도들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러므로 개인이든 집단이든 평신도들은 세상의 시민으로서 행동할 때에 각 분야의 고유한 법칙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그 분야에서 진정한 전문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기꺼이 협력하여야 한다. 신앙의 요구를 깨닫고 신앙의 힘을 갖추어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새로운 일을 창안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현세의 시민 생활에 하느님 법을 새기는 것은 이미 올바로 형성된 양심을 지닌 평신도들이 할 일이다. 그리고 평신도들은 사제들에게서 영적인 빛과 힘을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은 자기 사목자들이 언제나 실제로 전문가들이어서 무슨 문제가 생기든 중대한 문제라도 구체적인 해결책을 즉각 내놓을 수 있다거나 또 이를 위하여 사목자들이 파견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지혜로 빛을 받아 교도권의 가르침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새기고17) 자기의 고유한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물에 대한 그리스도교 가치관에 따라 어떤 환경에서 결정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여야 할 때가 자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신자들은 똑같이 진지한 태도로 똑같은 일에 대하여 달리 판단할 것이다. 이런 일은 매우 자주 또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제시되는 해결책들을 많은 이들이 당사자들의 의도와 달리 쉽게 복음의 메시지와 결부시킬 때에는,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사건에서 자기 의견을 위하여 배타적으로 교회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언제나 진지한 대화를 통하여 서로 빛을 비추어 주도록 노력하며 서로 사랑을 간직하고 무엇보다도 공동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의 모든 생활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평신도들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정신에 젖어들게 하여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일에서 참으로 인간 사회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 받고 있다.
하느님의 교회를 지도할 임무가 맡겨진 주교들은 자기 신부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선포하여 평신도들의 모든 지상 활동에 복음의 빛을 쏟아 부어야 한다. 또한 모든 사목자는 자신의 일상 생활과 관심으로18) 세상에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거기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힘과 진리를 판단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수도자들과 평신도들과 더불어 삶과 말로, 교회는 그 안에 지닌 모든 은혜와 함께 자신의 현존만으로도 현대 세계에 절실히 필요한 저 덕행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세상과 더불어 온갖 견해를 지닌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적절한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공의회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오늘날 인류는 갈수록 더욱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일치를 추구하고 있으므로, 더더욱 사제들은 주교들과 교황의 지도 아래에서 모든 힘과 노력을 모아 온갖 분열의 구실을 없애고 온 인류를 하느님 가족의 일치로 인도하여야 한다.”19)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자기 주님의 충실한 정배로 머물렀고 또 세상에서 구원의 표지가 되기를 결코 그친 적이 없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회는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그 구성원들 가운데에20) 하느님의 성령께 불충하게 살았던 자들이 없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우리의 이 시대에도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와 그리고 복음이 맡겨진 자들의 인간적인 나약함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교회는 모르지 않는다. 이러한 결함에 대한 역사의 판단이 어떠하든, 우리는 그 잘못을 자인하고, 복음 전파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이를 단호히 극복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또한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발전시켜 가며 역사의 경험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어머니인 교회는 끊임없이 자기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표지가 교회의 얼굴에서 더욱 찬란히 빛나도록 정화와 쇄신을 권고한다.”21)
교회가 현대 세계에서 받는 도움
44. 교회를 역사의 사회적 실재로 또 그 누룩으로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듯이, 바로 교회도 인류의 역사와 발전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지 않는다.
지난 여러 세기의 경험, 학문의 진보, 인간 문화의 다양한 형태 속에 숨어 있는 보화들은 인간 자신의 본성을 더욱 충만하게 밝혀 주고, 진리를 찾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며, 교회에도 도움이 된다. 교회는 그 역사의 시초부터 여러 민족들의 언어와 개념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법을 익혔으며 또한 철학자들의 예지로 그 메시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곧 모든 사람의 이해력과 지성인들의 요구에 가능한 한 복음을 적응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계시된 말씀의 그러한 적응 선포는 언제나 모든 복음화의 법칙을 고수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 실제로 모든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자기 나름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길러지고, 동시에 여러 민족 문화와 교회 사이의 활기찬 교류가 증진된다.22) 이러한 교류를 증진하기 위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사물이 급속히 변동하고 사고 방식이 매우 다른 현대에서, 특별히 교회는 믿는 이든 믿지 않는 이든 세상에 살면서 다양한 제도와 전문 분야에 정통하고 그 깊은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백성 전체, 특히 사목자들과 신학자들의 소임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현대의 다양한 말을 경청하고 식별하고 해석하며 이를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계시 진리가 언제나 더 깊이 받아들여지고 더 잘 이해되고 더욱 적절히 제시될 수 있다.
교회는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의 표징으로서 가시적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 사회 생활의 발전으로 교회도 역시 부요해질 수 있고 또 부요해지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여하신 구조에 무엇이 부족하여서가 아니라, 그 구조를 더 깊이 깨닫고 더 잘 표현하고 현대에 더 쉽게 적응시키려는 것이다. 교회는 그 공동체 안에서는 물론 각각의 자기 자녀들 안에서 온갖 계층이나 신분의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도움을 받고 있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닫고 있다. 가정, 문화, 경제, 사회, 정치의 국가적 국제적 차?貶【? 인간 공동체를 향상시키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교회 공동체에, 그 공동체가 외부적으로 매여 있는 그만큼, 적지 않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교회는 교회를 반대하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의 반대 그 자체에서도 많은 이익을 얻었고 또 얻을 수 있다고 공언한다.23)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
45. 교회가 스스로 세상을 도와 주고 세상에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지향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곧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온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자신의 지상 순례 시간에 인류 가족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선익은 교회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실천하는 “구원의 보편 성사”24)라는 바로 이 사실에서 흘러나온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이 생겨났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 우주를 새롭게 재창조하시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인류 역사의 목적이시고 역사와 문명이 열망하는 초점이시며 인류의 중심이시고, 모든 마음의 기쁨이시며 그 갈망의 충족이시다.25) 성부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시키시고 들어 높이시어 당신 오른편에 앉히시고 산 이와 죽은 이의 심판관으로 세우셨다. 그분의 성령 안에서 생명을 얻고 하나로 모인 우리는 인류 역사의 완성을 향하여 순례하고 있다. 이는 그분의 사랑과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질 것이다(에페 1,10 참조).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묵시 22,12-13).
서론
46. 공의회는 인간의 존엄성이 어떠하고 또 인간이 전세계에서 이행하도록 부름 받은 개인적 사회적 임무가 무엇인지 설명하였으므로, 이제 복음과 인간 경험에 비추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현대의 몇 가지 긴급 과제로 돌리고자 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많은 문제들 가운데에서 특히 혼인과 가정, 인간 문화, 경제-사회적 정치적 생활, 민족 간의 유대와 평화를 상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각각의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에게서 솟아 나오는 빛과 원리를 명백히 밝히고 이 빛으로 그토록 복잡다단한 문제들의 해결을 모색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고 모든 사람을 비추어 주고자 한다.
현대 세계의 혼인과 가정
47. 개인의 행복, 일반 사회와 그리스도교 사회의 안녕은 부부 공동체와 가정 공동체의 행복한 상태에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공동체를 중시하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오늘 이 사랑의 공동체를 보호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부부와 부모가 그 숭고한 임무를 다하도록 도와 주는 여러 가지 도움을 진지하게 반길 뿐 아니라 거기에서 더 좋은 혜택을 기대하며 이를 증진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이 제도의 존엄성이 어디에서나 똑같은 밝기로 드러나지는 못하고 있다. 중혼, 이혼의 만연, 이른바 자유 연애 또는 다른 기형으로 그늘이 졌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부부 사랑은 흔히 이기주의, 향락주의, 부당한 출산 거부로 더럽혀지고 있다. 더욱이 현대의 경제, 사회 심리, 정치 등의 생활 조건이 가정에 가볍지 않은 혼란을 미치고 있다. 끝으로,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인구 증가로 생기는 문제들을 염려하고 있다. 이 모든 문제로 양심이 고뇌하고 있다. 그러나 혼인과 가정 제도의 가치와 힘은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 자체가 거기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흔히 더 자주 여러 모양으로 이 제도의 진정한 특성을 드러내 준다는 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교회 가르침의 몇 가지 요체를 명확하게 밝혀 혼인 생활의 천부적 존엄성과 그 탁월하고 신성한 가치를 수호하며 증진하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사람을 비추어 주고 격려하고자 한다.
혼인과 가정의 거룩함
48. 창조주께서 제정하시고 당신의 법칙으로 안배하신, 생명과 사랑의 내밀한 부부 공동체는 인격적인 합의로 맺은 결코 철회할 수 없는 계약으로 세워진다. 이렇게 부부가 자기 자신을 서로 주고받는 인간 행위로,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견고한 제도가 사회 앞에 나타난다. 부부와 자녀와 사회의 행복을 지향하는 이 신성한 유대는 인간의 임의에 좌우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바로 여러 가지 선과 목적을 지닌 혼인의 제정자이시다.1)그 모든 것은 인류 존속, 가족 개인의 인격 향상과 영원한 운명, 가정 자체와 온 인류 사회의 존엄성과 안정성, 평화와 번영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혼인 제도 자체와 부부 사랑은 그 본질적 특성으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며, 그로써 마치 절정에 이르러 월계관을 쓰는 것과 같다. 따라서 혼인 계약으로 “둘이 아니라 한 몸”(마태 19,6)이 된 남자와 여자는 인격과 행위의 내밀한 결합으로 서로 도와 주고 봉사하며, 또한 자신들이 이룬 일치의 의미를 체험하고 날로 더욱 충만하게 한다. 이 깊은 결합은 두 인격의 상호 증여로서, 자녀의 행복과 더불어 부부의 완전한 신의를 요구하며, 그들의 풀릴 수 없는 일치를촉구한다.2)
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신적 원천에서 솟아나고 당신과 교회의 일치를 그 모범으로 세우신 이 다각적인 사랑에 풍성한 복을 내려 주셨다. 일찍이 하느님께서 사랑과 신의의 계약으로 당신 백성을 만나러 오셨듯이,3) 이제 인간의 구원자이신 교회의 신랑께서4) 혼인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부부를 만나러 오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부터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당신 친히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5) 그렇게 부부도 서로 자신을 내어 주며 영원한 신의로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 주신다. 진정한 부부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받아들여져 그리스도의 구속 능력과 교회의 구원 활동으로 다스려지고 풍요로워진다. 그리하여 부부는 효과적으로 하느님께 인도되고 부모의 숭고한 임무 수행에서 도움과 힘을 얻는다.6)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부부는 그 신분의 의무와 존엄성을 위하여 특수한 성사로 견고하게 되고, 이를테면 축성된다.7) 이 성사의 힘으로 혼인과 가정의 임무를 수행하며, 온 삶을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채워 주는 그리스도 정신에 젖어들어, 날로 더욱 자기 완성과 상호 성화를 위하여, 또 그럼으로써 다 같이 영광을 위하여 나아간다.
그러므로 부모들 자신이 솔선수범하고 가정 기도를 바치면 자녀들은 물론 집안에 함께 사는 모든 사람이 인격 완성과 구원과 성화의 길을 더욱 쉽게 찾을 것이다. 또한 부성과 모성의 존엄과 임무를 지닌 부부는 자녀 교육, 특히 종교 교육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할 것이다. 교육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부모의 의무이다.
자녀들은 가정의 살아 있는 지체로서 그들 나름으로 부모의 성화에 이바지한다. 자녀들은 감사하는 마음의 애정과 효성과 신뢰로써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부모를 역경과 노년의 고독에서 자녀의 도리로 봉양할 것이다. 혼인 성소의 지속성 안에서 굳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수절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 것이다.8) 가정은 자신의 영적 보화를 또한 다른 가정들과 더불어 아낌없이 나눌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계약에 대한 표상이며 참여인 혼인에서 생겨나므로,9) 부부 사랑과 많은 자녀 출산과 일치와 신의로 또 모든 가족의 사랑과 협력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과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 주어야 한다.
부부 사랑
49. 하느님의 말씀은 약혼자들과 부부들에게, 순결한 사랑으로 약혼기를, 갈림 없는 사랑으로 부부 생활을 보호하고 증진하라고 거듭 권고한다.10) 많은 현대인들도 민족과 시대의 훌륭한 관습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표현된 부부의 참된 사랑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가장 인간적인 사랑으로서 자발적인 감정으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향하기 때문에 인간 전체의 행복을 다 포괄한다. 따라서 이 사랑은 몸과 마음의 표현을 특수한 품위로 풍요롭게 하고 또한 이 표현들을 부부 애정의 특수한 요소와 표시로 삼아 고귀하게 할 수 있다. 이 사랑을 주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사랑의 선물로 고쳐 주시고 채워 주시고 높여 주시기에 마땅하다고 여기셨다. 인간적인 사랑과 신적인 사랑을 결합시키는 이러한 사랑은 부부가 자유로이 서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고 이를 다정한 마음과 행동으로 드러내도록 이끌어 주며, 부부의 온 삶에 스며든다.11) 나아가서 이 사랑은 그 너그러운 실천으로 자라나고 완전해진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이기적으로 추구되고 가련하게 쉬이 꺼져 버리는 단순한 성애의 경향을 훨씬 초월한다.
이 사랑은 혼인의 고유한 행위로 독특하게 표현되고 완성된다. 따라서 부부가 친밀하고 정결하게 서로 결합하는 행위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행위이다. 참으로 인간다운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그러한 행위는 상호 증여를 뜻하고 북돋우며,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서로 풍요롭게 한다. 상호 신의로 보장되고 특히 그리스도의 성사로 거룩하게 된 이 사랑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몸과 마음이 갈릴 수 없도록 충실한 것이며, 따라서 온갖 간음이나 이혼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또한 서로 완전한 사랑 안에서 인정되는 아내와 남편의 평등한 인격적 존엄으로, 주님께서 확고히 세우신 혼인의 단일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소명의 의무를 항구히 수행하려면 뛰어난 덕행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부부는 거룩한 생활을 북돋워 주는 은총의 힘으로 확고한 사랑과 너그러운 마음과 희생 정신을 끊임없이 닦고 또 기도로 간구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 부부가 그들 사랑의 신의와 화합을 증언하고 자녀 교육에 뛰어난 열성을 보이며 혼인과 가정을 위하여 필요한 문화적, 심리적, 사회적 쇄신에 참여한다면, 진정한 부부 사랑은 더 높이 평가될 것이며 그에 대한 건전한 여론도 형성될 것이다. 젊은이들이 정결을 닦고 적절한 시기에 정숙한 약혼기를 거쳐 혼인에 이를 수 있도록, 부부 사랑의 존엄성과 그 임무와 행위에 대하여 특히 가정의 품안에서 제때에 알맞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혼인의 풍성한 열매
50. 혼인과 부부 사랑은 그 본질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한다. 자녀들은 참으로 혼인의 가장 뛰어난 선물이며, 부모의 행복에 크게 이바지한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 하시고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마태 19,4) 하느님께서 ?H? 당신의 창조 활동에 인간을 특별히 참여시키고자 바라시어,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라”(창세 1,28). 그러므로 진정한 부부 사랑의 실천과 거기에서 나오는 가정 생활의 전체 구조는, 혼인의 다른 목적들을 뒤로 제쳐 두지 않고, 부부가 그들을 통하여 당신 가족을 날로 자라게 하시고 풍요롭게 하시는 창조주와 구세주의 사랑에 굳센 마음으로 협력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한다.
인간 생명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의무는 부부의 고유한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 부부는 이 의무에서 자기들이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의 협력자이며 또한 그 사랑의 해석자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지고 자신의 임무를 다하며, 하느님을 공경하고 따르며 함께 의논하고 노력하여 바른 판단을 내릴 것이다. 자기 자신들의 행복과 아울러 이미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자녀들의 행복을 위하여 힘쓰며, 시대와 생활 신분의 물질적 정신적 조건을 알아 내고, 마침내 가정 공동체와 현세 사회와 교회 자체의 선익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이러한 판단은 부부 자신이 궁극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내려야 한다. 그리고 행동 방식에서 그리스도인 부부는 자기 멋대로 할 수 없으며, 하느님 법을 지키는 바로 그 양심을 언제나 따라야 하고, 그 법을 복음의 빛으로 참되게 해석하여 주는 교도권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저 하느님 법은 부부 사랑의 완전한 의미를 밝혀 주고 보호하며 참으로 인간다운 완성으로 이끌어 준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인 부부가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희생 정신을 배양하며12) 인간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적극적인 책임감으로 출산의 임무를 이행할 때에 창조주께 영광을 드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다하는 부부들 가운데에서 지혜로운 공동 결정으로 더 많은 자녀들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알맞게 교육하는 부부들을 특별히 상기하여야 한다.13)
그러나 혼인은 출산만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다. 두 인격이 맺은 풀릴 수 없는 계약의 성격 자체와 자녀의 행복은 부부의 상호 사랑이 올바르게 표현되고 또 진보하고 성숙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므로 가끔 간절히 바라는 자녀가 없더라도 혼인은 온 생애의 공동 생활과 친교로서 지속되며, 그 가치와 불가해소성도 보존된다.
부부 사랑과 인간 생명의 존중
51. 생활을 조화롭게 영위하고자 하면서도 부부들이 가끔 어떠한 현대적 생활 조건에 묶여, 적어도 당분간은 자녀 수를 증가시킬 수 없고 충실한 사랑의 배양도 충만한 공동 생활도 수월하게 유지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공의회는 알고 있다. 친밀한 부부 생활이 중단되면, 흔히 신의도 깨지기 쉽고 자녀의 행복도 허물어질 수 있다. 그러면 자녀 교육도, 자녀를 더 받아들이려는 용기도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부당한 해결책을 감히 제시하고 더구나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는 생명 전달에 관한 하느님 법과 진정한 부부 사랑을 보장하는 하느님 법 사이에 실제로 모순이 있을 수 없음을 거듭 일깨운다.
사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생명 보존이라는 숭고한 직무를 인간에게 맡기시어 인간 품위에 알맞은 방법으로 이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생명은 임신[受精] 순간부터 최대의 배려로 보호받아야 한다. 낙태와 유아 살해는 흉악한 죄악이다. 인간의 성적 본성과 생식 기능은 하등 생물보다 놀라우리만큼 탁월하다. 따라서 진정한 인간 존엄에 따라 이루어지는 부부 생활의 고유한 행위 자체는 커다란 경의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부부의 사랑과 생명 전달의 책임을 조화시키는 행동 방식의 도덕성은 순수한 의향이나 동기 평가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그 도덕성은 인간의 본성과 그 행위의 본질에서 이끌어 낸 객관적 기준, 곧 참사랑이라는 맥락 안에서 상호 증여와 인간 출산의 온전한 의미를 보전하는 그러한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부부가 순수한 마음으로 정덕을 닦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원칙을 지켜야 할 교회의 자녀들은 산아 조절을 할 때에 하느님 법을 해석하는 교도권이 배척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14)
인간의 생명과 그 전달 임무는 현세에만 국한되고 또 현세에서만 측량되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혼인과 가정의 행복을 도모하여야 할 만인의 의무
52. 가정은 더욱 풍요로운 인간성을 기르는 한 학교이다. 충만한 가정 생활을 이루고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으려면 다정한 마음의 친교와 부부의 화합 그리고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성실한 협력이 요구된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참여가 자녀 교육에 대단히 유익하다. 그러나 특히 어린 자녀들은 집안에서 어머니가 보살펴야 한다. 여성의 정당한 사회 진출이 경시되지 않으면서도, 어머니의 보호는 보장되어야 한다. 자녀들이 성년으로 자라 완전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성소를 따르거나 생활 신분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교육하여야 한다. 혼인할 때에는 도덕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행복한 상황에서 자기 가정을 이룰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젊은이들이 가정을 이룩할 때에 그들이 기꺼이 들을 수 있는 현명한 조언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는 것은 부모와 보호자들의 의무이다. 그러나 혼인이나 배우자 선택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강박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가정은 여러 세대가 모여 서로 도와 주며, 더 충만한 지혜를 얻고 개인의 권리를 사회 생활의 다른 요구와 조화시키는 곳이므로, 가정은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 그러므로 공동체와 사회 단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은 혼인과 가정의 증진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이바지하여야 한다. 국가 권력은 혼인과 가정의 진정한 특성을 인정하고 보호하고 향상시키며 공중 도덕을 수호하고 가정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것을 그 신성한 임무로 여겨야 한다. 자녀를 낳고 가정의 품안에서 교육하는 부모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불행히도 가정의 행복을 잃은 어린이들은 주도면밀한 입법과 다양한 사업으로 보호하고 적절한 도움으로 불행을 덜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기회를 살려15) 변화하는 유형한 것에서 영원한 것을 분별하여, 자기 생활의 증언으로 또 선의의 모든 사람과 협력하여 혼인과 가정의 가치를 열심히 증진하여야 하며, 이렇게 어려움을 이겨 내고 새 시대에 알맞은 편의와 필요한 도움을 가정에 제공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신자들의 그리스도교 감각과 사람들의 올바른 도덕 의식과 거룩한 학문에 조예가 깊은 이들의 지혜와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 학문, 특히 생물학, 의학, 사회학, 심리학 등의 전문가들이 공동 연구로써 인간의 정당한 출산 조절의 다양한 조건을 도와 주고 더 완전히 밝혀 내도록 노력한다면, 혼인과 가정의 행복에 또 양심의 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가정 문제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갖추고, 부부들이 부부 생활과 가정 생활에서 그 소명을 다하도록 하느님 말씀의 선포, 경신 전례와 다른 영적인 도움 등 여러 가지 사목 수단으로 도와 주고, 어려움을 겪는 부부들을 친절과 인내로 격려하며 참으로 빛나는 가정이 이루어지도록 사랑으로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사제들의 임무이다.
여러 단체, 특히 가정 단체들은 젊은이들과 부부들, 주로 신혼 부부들을 이론과 행동으로 격려하며 그들에게 가정 생활, 사회 생활, 사도직 생활을 가르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끝으로, 부부 자신도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되고 인간의 참된 질서 안에 세워져,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과 거룩함으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16)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17) 따르며, 자기 소명의 기쁨과 희생 안에서, 자신들의 충실한 사랑을 통하여,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에 보여 주신 저 사랑의 신비의18) 증인이 되어야 한다.
서론
53. 인간은 오로지 문화를 통하여, 곧 자연의 재화와 가치를 개발하여 참되고 완전한 인간성에 이른다는 것이 바로 인격이 지닌 특성이다. 인간 생활이 다루어질 때마다 자연과 문화는 매우 밀접히 연결된다. ‘문화’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로 인간이 정신과 육체의 다양한 자질을 연마하고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을 가리킨다. 인간은 지식과 노동으로 지구를 다스리려고 노력하며, 가정과 온갖 시민 사회에서 관습과 제도를 발전시켜 사회 생활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고, 마침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위대한 정신적 경험과 갈망을 자기 작품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며 보존하여 많은 사람들의 발전과 더 나아가 온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다.
여기에서, 인간 문화는 필연적으로 역사적 사회적 측면을 드러내고, ‘문화’라는 말은 흔히 사회학적 민족학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화의 다원성을 말하게 된다. 실제로, 사물의 이용, 노동의 제공, 자기 표현, 종교의 실천과 관습의 형성, 입법과 법률 제도 제정, 학문과 예술의 증진, 그리고 아름다움을 가꾸는 다양한 방법에서 공동 생활의 다양한 조건과 다양한 형태의 생활 가치 체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물려받은 제도에서 각기 인간 공동체 고유의 세습 자산이 형성된다. 또한 이렇게 특정한 역사적 환경이 이루어지고, 모든 민족과 시대의 사람이 그 환경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인간적 시민적 문화 증진을 위한 가치들을 길어 올린다.
새로운 생활 양식
54. 현대인의 생활 조건이 사회적 문화적 견지에서 급격히 변화되었으므로 인류 역사의 새 시대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다.1) 거기에서부터 문화를 발전시키고 더 널리 확산시키는 새로운 길들이 열려 있다. 자연 인문 사회 과학의 엄청난 진보와 기술의 발달, 인간들이 서로 교류하는 통신 수단의 개발과 그 합리적인 조직이 이 새로운 길을 마련하였다. 여기에서 현대 문화가 지니는 특징은 이러하다. 정확하다고 하는 과학은 비판적 판단을 크게 신장하고, 심리학의 최근 연구는 인간 활동을 더욱 깊이 설명하며, 역사학은 사물을 그 변화와 진화의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크게 이바지하고, 생활 양식과 관습은 날로 더욱 동일해지고, 공동체 생활을 증진하는 산업화와 도시화와 다른 원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문화(대중 문화)를 창출하며, 거기에서 새로운 사고 방식, 새로운 행동 양식, 새로운 여가 활용 방법이 생겨나고, 여러 민족과 사회 집단 사이의 교류 증대로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보화가 모든 사람과 개인들에게 더 널리 개방되고, 이렇게 하여 다양한 문화의 개성을 보전하면 할수록 더욱더 인류의 일치를 증진하고 표현하는 더욱 보편적인 형태의 인간 문화가 마련되어 간다.
문화의 창조자인 인간
55. 어느 집단이나 국가에서든 그 공동체 문화의 장인과 창조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의식하는 사람들의 수가 날로 더 많아지고 있다. 전세계에서 자율과 책임 의식이 더더욱 증대되고 있다. 그것은 인류의 정신적 도덕적 성숙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진리와 정의 안에서 더 나은 세상을 이룩하여야 할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와 세계 통합을 직시한다면 그것은 더욱 뚜렷해진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 형제들과 역사에 대한 책임으로 인간이 정의되는 새로운 인본주의 탄생의 증인이 된다.
문제와 임무
56. 이러한 상상황에서 문화 발전에 대한 자기 책임을 의식하는 사람이 더 높은 희망을 키우면서도 스스로 해결하여야 할 기존의 수많은 이율 배반을 괴로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러 집단과 국가 사이에서 진정하고 효과적인 대화를 이끌어야 할 빈번한 문화 교류가 공동체 생활을 어지럽히거나 선조들의 지혜를 무너뜨리거나 고유의 민족성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전통의 유산을 충실히 살리면서 새로운 문화의 활력과 확대를 촉진할 수 있을까? 이것은 과학 기술의 위대한 진보에서 생겨난 문화를, 다양한 전통에 따라 고전 연구로 자라나는 고유 문화와 조화시키려 할 때에 특별히 절박한 문제가 된다.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개별 학문의 분화가 어떻게 그 종합의 필요성에 적응할 수 있으며, 또 지혜로 나아가는 명상과 경탄의 능력을 사람들 가운데에 보존하여야 할 필요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전문가들의 문화가 언제나 드높아지고 복잡해져 가고 있는 이 때에, 모든 사람이 세상에서 문화의 혜택에 참여하게 하려면,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끝으로, 문화가 스스로 주장하는 자율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순전히 현세적이고 더구나 종교 자체를 반대하는 인본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참으로 이러한 이율 배반의 한가운데에서도 오늘날 인류 문화는 완전한 인격을 올바로 계발하고 사람들의 임무 수행을 도와 주도록 발전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인류 가족 안에서 형제로서 일치하여 자기 임무를 다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신앙과 문화
57. 그리스도인들은 천상 도읍을 향한 나그네로서 천상의 것들을 찾아 맛들여야 한다.2) 그러나 더 인간다운 세상을 이룩하도록 모든 사람과 함께 협력하여야 할 임무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대되는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는 저 임무를 더욱 열심히 이행하도록, 특히 인류 문화가 인간의 온전한 소명 안에서 드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이러한 활동의 충만한 의미를 찾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실한 동기와 도움을 준다.
인간은 자기 손의 노동이나 기술의 힘으로 땅을 갈아 열매를 맺게 하고 온 인류 가족의 알맞은 거처로 만들며 사회 공동체 생활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때에, 시간의 한처음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획, 곧 땅의 지배와3) 창조의 완성이라는 계획을 실천하고 또 자기 자신을 완성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바쳐 형제들을 섬기라는 그리스도의 큰 계명을 지키게 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철학, 역사, 수학, 자연 과학 등 여러 학문에 전념하고 예술에 몰두할 때에 인류 가족이 진선미의 더 높은 이해와 보편 가치의 판단에 이르도록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며 만물을 하느님과 함께 창조하시고 사람의 아들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 즐거워 땅 위에서 뛰노시던 놀라우신 지혜에게서4) 인간은 더 밝은 빛을 받을 것이다.
그로써 인간 정신은 사물의 노예 상태에서 더 자유롭게 되어, 더 쉽게 창조주를 경배하고 관상하도록 들어 높여질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 정신은 은총의 자극을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인정하려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이 되시기 전부터 만물을 구원하시어 당신 안에서 새롭게 재창조하시고자 참 빛으로서 이미 세상에 계셨다. “참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요한 1,9).5)
분명히 현대 과학 기술의 진보는 그 방법의 힘으로 사물의 내밀한 이치까지는 파고들 수 없음에도 부당하게도 이 분야가 사용하는 연구 방법이 모든 진리 발견의 최고 척도인 것처럼 여길 때에, 어떤 현상론과 불가지론을 조장할 수 있다. 더구나 인간은 현대의 발명을 과신한 나머지 자만하여 더 이상 더 높은 것을 찾지 않게 될 위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행은 현대 문화에서 필연적으로 따라나오는 것이 아니며, 또 현대 문화의 긍정적 가치를 부정하려는 유혹으로 우리를 이끌어들여서도 안 된다. 그 가치로는, 학문의 연구, 연구 조사에서 진리에 대한 엄정한 충실성, 기술 집단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동 노력의 필요성, 국제적 연대 의식, 원조와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날로 더 생생해지는 전문가들의 책임 의식, 모든 사람에게, 특히 책임의 결여와 문화 빈곤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더 행복한 생활 조건을 만들어 주려는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어떤 준비를 하게 할 수 있으며, 그 준비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의 하느님 사랑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인간 문화의 복합적 관계
58. 구원의 메시지와 인간 문화 사이에는 여러 가지 관계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강생하신 아드님 안에서 당신을 완전히 보여 주실 때까지 당신 백성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면서 여러 시대에 그 고유한 문화에 따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교회도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선포하여 모든 백성에게 널리 전달하고 설명하며, 그 메시지를 연구하여 더 깊이 깨닫고, 전례 거행과 다양한 신자 공동체의 생활에서 이를 더 잘 표현하고자 다양한 문화의 소산을 활용하여 왔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모든 백성에게 파견되었으므로 어떠한 민족이나 국가에든, 또 어떠한 특정 풍속이나 고금의 어떠한 관습에도 불가분의 배타적 관계로 얽매이지 않는다. 고유의 전통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보편 사명을 의식하고 있는 교회는 여러 형태의 문화와 교류할 수 있으며 또 그 교류로 교회 자체도 여러 문화도 풍요로워진다.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은 죄에 떨어진 인간의 생활과 문화를 줄곧 쇄신하고 언제나 위협적인 죄의 유혹에서 흘러 나오는 오류와 악을 극복하며 제거한다. 또 민족들의 도덕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승화시킨다.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의 정신적 특성과 자질을, 마치 내면으로부터 하듯이, 천상 재화로 풍요롭게 하고 강화하고 완성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한다.6) 이렇게 교회는 그 고유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7) 이미 그 자체로 인간적 시민적 문화를 촉진하고 그 문화에 공헌하며, 자신의 활동으로, 전례 행위로도, 인간의 내적 자유를 길러 러 준다.
다양한 문화 형태의 조화
59. 위에서 말한 이유로, 문화는 인간의 전인적 완성과 온 인류 사회와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경탄, 내적 이해, 관상, 인격적 판단 형성,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의식 계발의 능력이 증진되도록 정신을 계발하여야 한다. 문화는 인간의 이성적 사회적 성격에서 직접 흘러 나오는 것이므로 자기 발전을 위한 정당한 자유를 끊임없이 요구하며, 고유 원리에 따른 정당한 자율 행동의 권리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하며, 공동선의 한계 안에서 특수 집단이든 일반 사회든 공동체와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는 한, 어떤 불가침성을 누리는 것이다.
거룩한 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상기하면서, 신앙과 이성이라는 구별되는 “두 가지 인식 영역이 있다.”고 선언하며, 분명코 교회는 “인간 예술과 학문의 문화가 자기 분야에서 고유한 원리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이 정당한 자유를 인정하며” 인간 문화, 특히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을 천명한다.8)
이 모든 것은 또한 인간이 도덕 질서와 공익을 지키는 한, 자유로이 진리를 탐구하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고 전파하며 어떠한 예술이든 연마할 수 있고 또 공적 사건들도 진실대로 더 잘 알게 되기를 요구한다.9) 공권력의 임무는 인간 문화 형태의 고유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모든 사람 가운데에, 소수 민족들 가운데에서도 문화 생활을 증진할 수 있는 조건과 수단을 강구하는 그것이다.10)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문화가 제 목적에서 벗어나 정치 권력이나 경제 세력에 강제로 예속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문화 혜택에 대한 만인의 권리 인정과 그 실현
60. 지금은 많은 사람들을 무지의 불행에서 해방시켜 줄 능력이 주어져 있으므로, 인종, 성별, 국적, 종교나 사회적 신분의 차별 없이, 인간 존엄에 부합하는 인간적 시민적 문화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가 경제나 정치에서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세계 어디에서나 인정되고 실현되도록 근본적인 결단을 내리는 끈질긴 노력은 우리 시대에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당연한 의무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풍부한 문화의 혜택이 충분히 주어져야 하며, 특히 많은 사람들이 문맹이나 책임 있는 활동의 결여로 공동선을 위하여 참으로 인간다운 협력을 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이른바 기본적인 문화 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재능의 힘이 미치는 사람들은 더 높은 연구 단계로 오를 수 있도록 매진하여야 하고, 이렇게 하여 가능한 대로 인간 사회 안에서 자기 재능과 경험 지식에 어울리는 임무와 직책을 맡아 봉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11) 이렇게 어떠한 사람이든 어느 민족의 사회 집단이든 자기의 자질과 전통에 상응하는 문화 생활의 충만한 발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이 문화에 대한 권리를 자각하고 자기를 계발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할 의무도 지고 있음을 깨닫도록 힘껏 노력하여야 한다. 사람들의 문화 추구를 가로막고 문화 열정을 없애 버리는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이 언제든 상존하기 때문이다. 특히 농어민들과 노동자들의 처지가 그러하므로, 그들의 인간 문화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증진하는 그러한 노동 조건을 제공하여야 한다. 이제는 여성들이 거의 모든 생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마땅히 여성들은 고유한 특성에 따라 자기 역할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 고유의 필요한 문화 생활 참여를 인정하고 증진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전인 교육
61. 여러 분야의 지식과 예술을 종합한다는 것은 과거에 비해 현대에는 더욱 어려워졌다. 실제로 문화를 이루는 요소들의 집단과 다양성이 증가하고, 동시에 그것을 파악하고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개인의 능력은 감소되어, ‘보편적 인간’의 모습은 갈수록 더욱더 사라져 간다. 그러나 지성, 의지, 양심, 형제애의 고상한 가치를 지닌 전인격의 균형을 유지할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남아 있다. 그 가치들은 모두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그 근거를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놀랍게 회복되고 승화된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모체와 양육 기관은 먼저 가정이다. 가정에서 사랑으로 기르는 자녀들은 사물의 바른 질서를 더 쉽게 배워 익히고, 건실한 형태의 인간 문화가 자라나는 젊은이들의 정신으로 이를테면 자연스럽게 젖어들게 된다.
현대 사회에는 이러한 교육을 위한 좋은 기회들이 있다. 특히 서적의 광범한 보급과 새로운 문화적 사회적 교류 수단들은 보편 문화를 촉진할 수 있는 기회들이다. 실제로 도처의 노동 시간 단축은 많은 사람들에게 날로 더 많은 편의를 제공한다. 여가는 정신의 휴식을 위하여 또 몸과 마음의 힘찬 건강을 위하여 바르게 선용되어야 한다. 자유로운 활동이나 연구로, 인간의 재능을 계발하고 상호 이해로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 다른 지역의 여행(관광)으로, 또한 공동체 안에서도 정신 균형을 유지하고 어떠한 신분이나 국적 또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형제 관계를 맺는 데에 도움을 주는 운동이나 경기를 통하여 여가를 선용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의 고유한 문화 행사나 집단 활동이 인간적이고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에 젖어들도록 협력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혜택도 인간을 위한 문화와 학문의 의미에 대하여 깊은 물음을 소홀히 한다면, 온전한 자기 계발을 위한 인간 교육을 이루어 낼 수 없다.
문화와 그리스도교 교육의 조화
62. 교회는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경험이 보여 주듯이, 문화와 그리스도교 교육의 조화는 우연한 사정으로 언제나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반드시 신앙 생활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신앙을 더 정확히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정신을 자극할 수도 있다. 사실 과학, 역사학, 철학의 최근 연구와 발견은 새로운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 문제들은 실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신학자들에게도 새로운 연구를 요구한다. 그뿐 아니라 신학자들은 또한 신학의 고유한 방법과 요구를 따르면서도 언제나 동시대인들에게 교리를 전달하는 더 적절한 방법을 찾도록 요청받고 있다. 신앙의 유산인 진리 자체와 그 진리를, 물론 동일한 의미와 동일한 의도로, 표현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12) 사목에서는 신학 원리뿐 아니라 일반 학문, 특히 심리학과 사회학의 발견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활용하여, 신자들을 또한 더 순수하고 더욱 원숙한 신앙 생활로 인도하여야 한다.
문학과 예술도 그 나름대로 교회 생활을 위하여 중요하다. 인간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완성하려는 시도에서 인간 본연의 특성과 인간의 문제와 경험을 배우려고 노력하며, 역사와 전세계 안에서 인간의 자리를 찾고 인간의 불행과 기쁨, 욕망과 능력을 밝히고 인간의 더 나은 운명을 그리려고 힘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문학과 예술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표현되는 인간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술인들은 자신의 활동이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고 정연한 자유를 누리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더욱 원활한 관계를 맺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또한 여러 민족과 지역의 특성에 따라 우리 동시대인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예술 형태를 교회는 인정하여야 한다. 또 그 표현 방법이 적절하고 전례의 요구에 부합하여 인간의 마음을 하느님께 드높여 주는 것이라면 지성소에 받아들여야 한다.13) 이로써 하느님 인식이 더 잘 드러나며, 복음 선포가 인간 지성에 더욱 명백해지고 인간 조건에 마치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동시대 사람들과 매우 친밀하게 살며 문화를 통하여 표현되는 그들의 사고 방식과 감각을 완전히 파악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새로운 학문과 이론은 물론 신발명의 지식을 그리스도교 도덕과 교리교육에 결부시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실천과 도덕 정신이 과학 지식과 날마다 진보하는 기술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물을 온전한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평가하고 해석할 수 있다.
신학교나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다른 학문에 출중한 사람들과 함께 힘과 뜻을 합쳐 협력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신학 연구는 동시에 계시 진리의 깊은 지식을 추구하면서, 다양한 학문을 연마한 사람들이 더욱 완전한 신앙 지식을 가지게 도와 줄 수 있도록, 동시대와 교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공동 활동은 하느님과 인간과 세계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우리 동시대인들이 더욱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성직자들의 양성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14) 더욱이 많은 평신도들이 적절한 신학 교육을 받고, 그 가운데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더욱 깊이 발전시키기를 바란다.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신자로서 자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연구와 사색의 정당한 자유를 인정하여야 하며, 전문 지식을 갖춘 분야에서 자기 의견을 겸허하고 용기 있게 밝힐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여야 한다.15)
경제 생활의 몇 가지 측면
63. 경제 사회 생활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그 온전한 소명, 사회 전체의 선익은 존중되고 증진되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경제는, 사회 생활의 다른 분야와 다르지 않게,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 증대, 시민과 집단과 민족 사이의 더욱 긴밀하고 강력한 관계와 상호 의존, 정치 권력의 더욱 빈번한 개입으로 특징지어진다. 동시에 생산 방법, 재화와 서비스의 교류가 진보함으로써 경제는 인류 가족의 증대된 요구를 더 잘 채워 줄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불안의 이유가 없지 않다. 특히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치 경제에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며, 그들의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은 거의 모두 어떤 경제 만능주의 정신에 물들어 있다. 그것은 집단 경제를 선호하는 국가에서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이다. 경제 생활의 발전이 합리적으로 또 인간답게 지도되고 조정되기만 하면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바로 이 시대에, 때로는 더 자주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또 어떤 곳에서는 힘없는 사람들의 사회적 조건을 퇴보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거대한 군중은 아직도 생활 필수품이 전혀 없는데, 어떤 사람들은 저개발 지역에서도 호화롭게 살며 재화를 낭비하고 있다. 사치와 빈곤이 함께 있다. 소수가 막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다수는 자발적으로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가운데 흔히 비인간적인 생활 조건과 노동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유사한 경제적 사회적 균형의 결여는 농업, 공업, 서비스업 사이에서, 그리고 한 동일 국가의 여러 지역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경제적으로 더 많이 발전한 나라들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대립이 날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으며 그것은 세계 평화 자체에 대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
현대인의 양심은 이러한 불평등을 날로 더욱 생생하게 절감하고 있다. 그것은 현대 세계가 누리고 있는 더욱 광범한 기술력과 경제력이 이 불행한 사태를 시정할 수 있고 또 시정하여야 한다고 확신하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경제 사회 생활의 수많은 개혁이 요구되고, 모든 사람에게 자세와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은 물론 국제 생활에 관하여 바른 이성이 요구하는 정의와 평등의 원리를 복음의 빛으로 밝혀 왔으며, 특히 최근에 와서 이를 발전시켰다. 거룩한 공의회는 특히 경제 발전의 요청을 감안하고 현대의 상황에 따라 이 원리들을 강화하여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1)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 발전
64.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인구 증가에 대비하고 인류의 증대하는 소망을 충족시키도록 농업과 공업의 생산 증가와 서비스 향상을 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기술 발전, 혁신 정신, 기업 설립과 확장 노력, 생산 방법의 적응, 모든 생산 종사자의 끊임없는 노력, 곧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모든 요소를 촉진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의 근본 목적은 단순한 생산품의 증가 또는 이익이나 지배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에 대한 봉사이다. 곧 인간의 물질적 필요와 지성적, 도덕적, 정신적, 종교적 생활의 요구를 다 고려하는 참으로 전인에 대한 봉사이다. 인간이란 모든 개인과 모든 인간 집단과 모든 인종과 세계 모든 지역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경제 활동은 고유의 방법과 법칙에 따라 도덕 질서의 경계 안에서2)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되도록 이루어져야 한다.3)
경제 발전에 대한 인간의 통제
65. 경제 발전은 인간의 통제 아래 머물러야 한다. 과도한 경제력을 가진 소수의 강자나 그러한 강자 집단의 전제에 맡기거나 한 정치 단체나 어떤 강대국들의 전제에 맡겨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각계 각층에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또 국제 관계에서는 모든 국가가 경제 진로에 적극 참여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개인이나 임의 단체들의 자발적 활동은 공권력의 노력과 조화를 이루고 또 적절히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경제 성장도 각 개인의 이른바 기계적 경제 활동 과정에만 맡기거나 공권력에만 내맡겨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릇된 자유를 빙자하여 필요한 개혁을 가로막는 이론은 물론 생산 집단 조직을 앞세워 개인과 단체의 기본 권리를 무시하는 이론의 오류를 밝혀야 한다.4)
그 밖에도 시민들은 자기 공동체의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 자기 능력대로 기여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이며 의무임을 상기하여야 하고, 국가 권력도 이를 인정하여야 한다. 특히 모든 자원을 긴급히 활용하여야 할 경제적 저개발 지역에서 자기 자원을 비생산적으로 방치하여 두거나 또는, 개인의 이주 권리는 인정하더라도, 자기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물질적 정신적 원조를 거부하는 자들은 공동선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제거되어야 할 엄청난 경제 사회적 격차
66. 정의와평등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개인의 권리와 각 민족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면서 흔히 개인적 사회적 차별과 결부되어 증대하고 있는 기존의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더 빨리 제거하도록 줄기차게 노력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많은 지역에서는, 농산물의 생산과 판매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업의 특수한 문제를 고려하여 농민들이 생산과 판매를 증대시키고 필요한 개량과 혁신을 도입하고 정당한 소득을 얻어, 흔히 그러하듯 하등 국민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농민 자신들, 특히 젊은이들은 스스로 전문 지식을 익히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전문 기술이 없으면 농업 발전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5)
정의와 평등은 또한 경제 발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유동성을 제대로 조절하도록 요구한다. 그렇게 하여 개인 생활과 가정 생활이 불확실해지고 불안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민족과 지역의 경제 발전을 위하여 자기 노동으로 이바지하고 있는 타국이나 타지역 출신 노동자들과 관련하여, 보수나 노동 조건에서 온갖 차별을 힘껏 막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은, 특히 공권력은 그들을 단순한 생산 도구가 아니라 인간으로 여겨야 하며, 가족들을 그들 곁에 불러 합당한 주거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고 현지 민족이나 지역의 사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러나 되도록 자기 지역에서 일터가 마련되어야 한다.
오늘날 급변하고 있는 경제에서, 곧 이를테면 자동화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산업 사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고 적합한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적절한 직업 기술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또한 특히 질병과 노령으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생계와 인간 존엄을 안전하게 보장하여야 한다.
노동, 노동 조건, 여가
67. 재화를 생산하고 교환하고 경제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간 노동은 경제 생활의 다른 요소들보다 우월하다. 다른 요소들은 오로지 도구라는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 노동은 자가 노동이든 다른 사람에게 고용된 노동이든 직접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며, 마치 자기 도장을 찍듯이 자연의 사물에 자기 모습을 새기며, 자기 의지로 사물을 다스린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기 노동을 통하여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고, 자기 형제들과 결합되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며,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창조를 완성하기 위하여 협력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노동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인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동참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자렛에서 손수 노동을 하심으로써 노동에 드높은 품위를 부여하셨다. 여기에서 충실히 노동하여야 할 의무와 노동에 대한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생겨난다. 사회는 실제 환경에 따라 그 나름대로 시민들이 충분한 노동의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끝으로, 노동의 보수는 각자의 임무와 생산성은 물론 노동 조건과 공동선을 고려하여 본인과 그 가족의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할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한다.6)
경제 활동은 대부분 사람들의 결합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어느 노동자에게든 손해가 되도록 경제 활동을 조직하고 규제하는 것은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노동자들이 어느 모로 자기 노동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난다. 이것은 이른바 경제 법칙으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생산 노동의 전 과정이 인간의 필요와 생활 방식에 그 무엇보다도 가정 생활에 알맞아야 하고, 특히 가정 주부와 관련하여 그러하지만, 언제나 성별과 연령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바로 노동을 통하여 자기 역량과 인격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노동자는 마땅한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 시간과 힘을 노동에 바쳐야 하지만, 가정, 문화, 사회, 종교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휴식과 여가를 모든 이가 누려야 한다. 또한 직업 노동으로는 어쩌면 거의 계발할 수 없는 재능과 역량을 자유로이 계발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기업 참여, 세계 경제 구조 참여, 노동 쟁의
68. 경제 기업 안에서 인간이, 곧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자유롭고 자율적인 인간들이 서로 결합된다. 그러므로 자본주, 고용주, 경영자, 노동자 들이 각자의 임무에 따라 활동 방향의 필요한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적절히 규정된 방법으로, 기업 경영에 대한 모든 사람의 적극적인 참여가 촉진되어야 한다.7) 그러나 흔히 노동자들과 그 자녀들의 미래 운명을 좌우하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결정이 기업 자체가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상부 기구에서 이루어지므로 노동자들도 또한 자신이나 자유로이 선출한 대표를 통하여 이러한 결정에 참여하여야 한다.
노동자들이 참으로 노동자들을 대표하고 경제 생활의 올바른 질서 수립에 이바지할 수 있는 단체를 자유로이 결성할 권리, 또한 보복의 위험 없이 단체 활동에 자유로이 참여할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이 같은 정연한 참여와 더불어 경제적 사회적 훈련을 쌓아 가면, 모든 사람에게서 자기 임무와 책임에 대한 의식이 날로 더욱 강화되고, 그러한 의식으로 각자 자기 능력과 적성에 따라 모든 경제적 사회적 발전과 세계 공동선을 실현하는 동료임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분쟁이 생길 때에는 그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언제나 가장 먼저 당사자들 사이의 성실한 대화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러나 파업은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의 고유한 권리를 수호하고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최후의 수단이기는 하지만,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조속히 협상과 화해의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지상 재화
69.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8) 다양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민족들의 합법적인 제도에 적용된 소유권의 형태가 어떠하든, 언제나 재화의 이 보편적 목적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저 재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외적 사물을 자기 사유물만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하며, 그러한 의식에서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9) 그리고 또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하여 재화의 충분한 몫을 가질 권리가 있다.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쓰고 남은 것만을 주지 말고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10) 극도의 궁핍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취득할 권리를 가진다.11) 무수한 사람들이 세계에서 굶주림에 짓눌려 있으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개인과 정부에 촉구한다.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주지 않으면 그대가 죽이는 것이다.”고12) 한 교부들의 말씀을 상기하여, 각자의 능력대로 자기 재화를 참으로 나누어 주고, 특히 개인이나 민족이 스스로 돕고 발전할 수 있도록 원조하여야 한다.
경제적으로 덜 발전한 사회에서는 드물지 않게 재화의 공동 목적이 부분적으로 공동체 고유의 관습과 전통을 통하여 충족되고 구성원 각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재화가 제공된다. 그러나 어떤 관습이 이미 현대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데도 이를 전혀 불변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훌륭한 관습을 거슬러 슬기롭지 못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 관습은 현대 환경에 적절히 적응되기만 하면 여전히 매우 유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한 나라에서는 보험과 보장을 위한 사회 제도의 어떤 조직이 재화의 공동 목적을 그 나름대로 실현시킬 수 있다. 가정 봉사와 사회 사업, 특히 문화와 교육에 이바지하는 서비스가 더욱더 증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제도에서, 국민들이 사회에 대한 어떤 태만에 빠지거나 맡은 의무의 책임을 기피하고 봉사를 거부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투자의 통화
70. 투자는 각기 그 나름대로 오늘과 내일의 국민에게 노동과 수익의 충분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투자와 경제 생활의 계획을 결정하는 사람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이든 누구나 이러한 목적을 명심하고 자신의 막중한 의무를 인식하여야 한다. 곧, 한편으로는 개인이나 공동체 전체의 품위 있는 생활에 요구되는 필수품을 제공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를 예견하여 개인이든 집단이든 현재의 소비 요구와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 요청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이루어야 할 의무가 있다. 또 언제나 경제적 저개발 국가나 지역의 긴급한 요구도 고려하여야 한다. 통화 문제에서도 자국은 물론 타국의 선익을 저해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더 나아가서 경제적 약소 국가들이 화폐 가치의 변동으로 부당한 손실을 입지 않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재산 취득, 재화의 사적 지배, 대토지
71. 재산 소유와 외적 재화에 대한 사적 지배의 다른 형태들은 인격 표현에 이바지하므로, 더 나아가서 인간에게 사회와 경제의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기회를 제공하므로, 외적 재화의 어떤 지배에 대하여 개인이나 공동체의 접근을 도와 주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사유 재산 또는 외적 재화에 대한 어떤 지배는 개인과 가정의 자립에 반드시 필요한 공간을 각개인에게 제공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 자유의 신장으로 여겨야 한다. 끝으로, 이는 임무와 책임을 이행하도록 자극을 주므로 시민 자유의 한 조건을 이룬다.13)
오늘날 이러한 지배나 소유권의 형태는 다양하며 또 날로 더욱더 다양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형태는 사회적 기금과 사회에서 관리하는 권리와 봉사에 구애받지 않고 경시하지 못할 연유로 보장되고 있다. 물질적 재산만이 아니라 전문적 역량과 같은 비물질적 재산에 대하여도 그렇게 말하여야 한다. 사적 소유권은 여러 형태의 공적 재산에 있는 저 권리를 저해하지 않는다. 관할 권위가 공동선의 요구에 따라, 그 한계 안에서, ?ㅄ聆? 보상을 할 때에만 재산을 공적 소유로 이전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누구든 공동선을 거슬러 사유 재산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것은 공권력의 소관이다.14)
사유 재산 자체가 본질상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재화의 공동 목적이라는 법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15) 그러한 사회적 성격을 소홀히 하면 재산 소유는 흔히 탐욕과 심각한 혼란의 계기가 되고, 소유권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공격자들에게 빌미를 주게 된다.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많은 저개발 지역에 광대한 농토가 반쯤만 경작되거나 사리를 위하여 전혀 경작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데도 국민의 대부분은 땅이 없거나 아주 작은 전답만을 가지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농토의 수확 증대는 분명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지주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이나 소작인으로 토지의 한 부분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인간답지 못한 급료나 보수를 받고 마땅한 주택도 없이 살아가며 중개인들에게 착취당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아무런 보장도 없이, 그러한 노예 상태로 살아가는 그들은 자발적으로 책임지고 행동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권한을 빼앗기고, 온갖 인간 문화의 증진이나 사회 정치 생활에 대한 모든 참여를 금지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 경우에 대한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 소득 증대, 노동 조건의 개선, 고용 보장의 강화, 자발적 노동의 장려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서, 충분히 경작하지 않는 농지는 그 땅을 비옥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 분배되어야 하겠다. 이 경우에는 필요한 물자와 수단이 충분히 제공되어야 하며, 특히 교육을 위한 원조와 마땅한 협동 조직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공동선이 사유 재산의 수용을 요구할 때에는 그 때마다 모든 상황을 참작하여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경제-사회 활동과 그리스도 왕국
72. 현대의 경제 사회 발전에 적극 참여하며 정의와 사랑을 위하여 투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인류의 번영과 세계 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활동에서 개인이든 단체든 빛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반드시 필요한 전문 지식과 경험을 얻어, 현세 활동에서 바른 질서를 지키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충실하여, 개인 생활이든 사회 생활이든 그리스도인의 온 삶은 참 행복의 정신, 특히 가난의 정신에 젖어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더욱 강렬하고 더욱 순수한 사랑을 받아, 자신의 모든 형제를 도와 주고 사랑에 이끌려 정의의 위업을 성취할 것이다.16)
현대의 공공 생활
73. 현대에는 민민족들의 구조와 제도에서도 많은 변화가 드러나고 있다. 민족들의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의 귀결인 그러한 변화는 정치 공동체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시민적 자유 행사와 공동선 추구를 위한 모든 사람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국민 각자의 상호 관계, 또 국민과 공권력의 관계를 조정하는 일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 존엄에 대한 의식이 더욱 활발해짐에 따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는 공공 생활에서 인권을 더 잘 보장하여 주는 정치 법률 제도를 확립하려는 열망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곧 자유로운 집회, 결사, 언론, 사적 공적 종교 신봉의 권리들이다. 사실, 인권 수호는 개인이든 단체든 국민이 국가의 생활과 통치에 적극 참여할 수 있게 하는 필수 조건이다.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과 더불어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 공동체 생활의 조직에서 더 큰 역할을 맡으려는 강한 의욕을 품게 된다. 어느 나라의 소수파든 정치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의식 속에서 이 소수파의 권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증대되고 있다. 더 나아가, 다른 견해를 밝히거나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도 날로 더해 가며, 동시에 어떤 특권층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실제로 인권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협력도 더욱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 그러하듯이 시민적 종교적 자유를 가로막고 탐욕과 정치 범죄의 희생자들을 증가시키며 권력의 행사를 공동선이 아니라 어떤 파당이나 통치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왜곡하는 온갖 정치 형태는 배척되고 있다. 참으로 인간다운 정치 생활을 이룩하려면 정의와 사랑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봉사 정신을 길러 주고 정치 공동체의 진정한 성격과 공권력의 목적, 그 바른 행사와 한계 등에 관한 기본 신념을 북돋워 주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치 공동체의 본질과 목적
74. 시민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 가정, 여러 집단은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자기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언제나 더 나은 공동선을 실현하도록 모든 사람이 날마다 자기 힘을 합칠 수 있는 더 큰 공동체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다.1) 그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 형태의 정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 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하여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완전한 자기 정당화와 의미를 얻고, 공동선에서 본래의 고유한 자기 권리를 이끌어 낸다. 참으로 공동선은 개인과 가정과 단체가 더 충만하게 더욱 쉽게 자기 완성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 생활 조건의 총체를 포괄한다.2)
그러나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정치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당연히 그들은 다양한 의견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저마다 자기 의견만 고집하여 정치 공동체가 붕괴되지 않으려면, 권력이 필요하다. 그 권력은 기계적으로나 독재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유와 의무의 수용 그리고 책임 의식에 뿌리박은 도덕적인 힘으로 온 국민의 힘을 공동선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따라서 정치 공동체와 공권력은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또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예정하신 질서에 귀속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통치 체제 결정과 통치자 지명이 국민들의 자유 의사에 맡겨져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3) 또한 정치 권력의 행사는 바로 그 공동체 안에서든 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에서든 언제나 도덕 질서의 한계 안에서 정당하게 제정되었거나 제정될 법 질서에 따라, 참으로 역동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는, 공동선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할 때에 국민들은 양심에 따라 복종하여야 할 의무를 지닌다.4) 여기에서 다스리는 사람들의 책임과 존엄과 중요성이 뚜렷해진다.
그러나 공권력의 월권으로 국민들이 억압을 받는 곳에서도, 국민들은 객관적으로 공동선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자연법과 복음이 그려 주는 한계를 지키며 이러한 권력의 남용을 거슬러 자기 자신과 동포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은 정당하다. 정치 공동체가 자체 구조와 공권력의 규제를 설정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양한 국민성과 역사 발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인류 가족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교양을 갖추고 평화를 이룩하며 모든 사람에게 관대한 인간을 육성하는 데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의 공공 생활 협력
75. 정치 공동체의 법적 기초 제정, 국가의 통치, 여러 기관의 영역과 목표 설정, 통치자 선거 등에, 모든 국민이 아무런 차별도 받지 않고 언제나 자유롭게 능동적으로 더 잘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 가능성을 제공하는 정치적 법률적 구조의 창안은 인간 본성과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5) 따라서 모든 국민은 공동선의 증진을 위하여 자유 투표를 할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봉사하려고 국가 복지에 헌신하며 그러한 직무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활동을 교회는 마땅히 찬양하고 존중한다.
의무감으로 뭉친 국민들의 협력이 국가의 일상 생활에서 그 풍부한 효과를 거두려면, 국가 권력의 기능과 기관의 적절한 분립과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실효적 권리 보호가 이루어지는 실정법 질서가 요구된다. 모든 국민에게 부과된 의무와 함께, 모든 개인과 가정과 단체의 권리와 그 권리 행사가 인정되고 보호받고 증진되어야 한다.6) 국민의 의무 가운데에는 국가에 인적 물적 봉사를 제공할 의무도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한 의무는 공동선을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다. 통치자들은 가정, 사회, 문화 단체와 중간 집단이나 기구 등을 방해하거나 그 정당한 효과적 활동을 금지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기꺼이 질서 있게 이를 증진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또한 국민은 개인이든 단체든 과도한 권력을 국가 권위에 부여하지 말아야 하고, 또 개인과 가정과 사회 단체의 책임을 덜어 버릴 만큼 부당하게 지나친 편익을 국가 권위에 요구하지도 말아야 한다.
현대의 한층 더 복잡한 환경 때문에, 국민들과 단체들이 온전한 인간 행복을 자유롭게 추구하도록 더욱 효과적으로 도와 주는 더 적합한 조건을 마련하고자 공권력은 더 자주 사회, 경제, 문화 문제에 부득이 개입하게 된다. 개인의 자주성이나 진보와 사회화 사이의 관계는 다양한 지역과 민족들의 발전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7) 그러나 권리 행사가 공동선 때문에 일시적으로 제한될 때에는 환경이 바뀌면 되도록 빨리 자유를 회복시켜야 한다. 그러나 정치 권력이 개인과 사회 집단의 권리를 침해하는 전체주의 형태나 독재 형태가 되는 것은 비인간적이다.
국민은 애국심을 너그럽고 충실하게 길러야 하겠지만, 편협한 정신을 버리고, 인종과 민족과 국가 사이의 여러 가지 유대로 결합된 인류 가족 전체의 복지를 위하여 언제나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정치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고유 소명을 의식하여야 한다. 확고한 책임 의식을 지니고 공동선의 함양에 진력하여 빛나는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실제로 권력이 자유와 더불어, 개인의 활동이 온 사회 집단의 유대 관계와 더불어, 적절한 일치가 유익한 다양성과 더불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보여 주어야 한다. 현세 사물의 관리에서 서로 다르지만 정당한 의견들을 인정하여야 하고, 또 그러한 의견들을 성실하게 변호하는 시민들이나 단체들을 존중하여야 한다. 정당들은 그들의 판단에 따라 공동선을 위한 요구를 증진하여야 하며, 결코 당리를 공동선에 앞세울 수 없다.
시민 교육과 정치 훈련은 오늘날 국민들과 특히 청소년들에게 매우 필요하므로, 모든 국민이 정치 공동체 생활에서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그러한 교육을 꾸준히 배려하여야 한다. 어려우면서도 매우 고귀한 정치 기술에 대한 적성이나 가능성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 준비를 갖추어,8) 자기 편의나 금전의 이익을 버리고 정치를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불의와 억압, 한 개인이나 정당의 전제와 불용을 거슬러 청렴하고 신중하게 투쟁하여야 하며, 진실과 공정으로, 더 나아가서 사랑과 정치적 용기로 모든 사람의 행복에 헌신하여야 한다.
정치 공동체와 교회
76. 특히 다원 사회에서는 정치 공동체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지니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이든 단체든, 국민으로서 자기 이름으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 하는 일과 교회의 이름으로 그 목자들과 함께 행동하는 일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교회는 그 임무와 권한으로 보아 어느 모로도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결코 어떠한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동시에 교회는 인간 초월성의 표지이며 보루이다.
정치 공동체와 교회는 그 고유 영역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다. 그러나 양자는, 자격은 다르지만, 동일한 인간들의 개인적 사회적 소명에 봉사한다. 양자가 장소와 시대의 환경을 고려하며 서로 건실한 협력을 더 잘 하면 할수록, 그 봉사는 더 효과적으로 모든 사람의 행복에 이바지할 것이다. 사실 인간은 현세 질서에만 매여 있지 않고, 인간 역사 안에서 살아가며 영원한 자기 소명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교회는 구세주의 사랑을 바탕으로 국가 영역에서 또 민족들 사이에서 정의와 사랑이 더 널리 펼쳐지도록 이바지한다. 교회는 또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그 가르침을 통하여 또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주는 증거를 통하여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를 비추어 줌으로써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와 책임도 존중하고 증진한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 그리고 이들의 협력자들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파견되므로, 자신의 사도직 수행에서 하느님 능력에 의존한다. 하느님께서는 매우 자주 증인들의 약점 안에서 복음의 위력을 드러내신다. 실제로 하느님 말씀의 교역에 헌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복음의 고유한 방법과 수단을 활용하여야 한다. 이는 여러 면에서 지상 국가의 수단과 다르다.
참으로 지상의 사물과 또 인간 조건에서 현세를 초월하는 것들은 서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교회는 그 고유의 사명이 요구하는 범위 안에서 현세 사물을 활용한다. 그러나 교회는 국가 권력이 부여하는 특권을 바라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어떤 정당한 기득권의 사용이 교회 증언의 진실성을 의심받게 한다든지 새로운 생활 조건이 다른 규범을 요구하게 될 때에는 정당한 기득권의 행사도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언제나 어디에서나 참된 자유를 가지고 신앙을 선포하고, 사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며,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임무를 자유로이 수행하고,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때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하여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 이 때에 교회는 오로지 복음에 일치하고 다양한 시대와 환경에 따라 모든 사람의 행복에 부합하는 모든 방법을 사용한다.
복음을 충실히 따르며 세상에서 자기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는 인간 공동체 안에서 발견되는 진선미는 무엇이든 보호하고 승화시키는 것을9) 자기 임무로 삼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 가운데에서 평화를 견고하게 한다.10)
서론
77. 전쟁의 위협과 발발에서 넘쳐나는 극심한 고통과 곤경이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바로 우리 시대에 온 인류 가족은 그 성숙 과정에서 최대 위기의 순간에 이르렀다. 인류가 차츰 하나로 결합되어 어디에서나 이미 그 일치를 더 잘 의식하고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하여 참으로 더욱 인간다운 세계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지만, 모든 사람이 새로운 마음으로 평화의 진리를 향하여 돌아서지 않고는 그 일을 성취할 수 없다. 여기에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9) 하고 선언한 복음의 메시지가 인류의 한층 더 고귀한 노력과 소망과 어우러져 새로운 빛을 비추게 된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숭고하고 진정한 평화의 도리를 밝히며 전쟁의 야만성을 단죄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열렬히 불러 내어, 평화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정의와 사랑 안에서 평화를 견고하게 하고 평화의 수단을 강구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협력하도록 촉구하고자 한다.
평화의 본질
78.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며, 오로지 적대 세력의 균형 유지로 전락될 수도 없고, 전제적 지배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올바로 또 정확히 말하자면, 평화는 “정의의 작품”(이사 32,17 참조)이다. 인간 사회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 또 언제나 더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행동으로 실천하여야 할 사회 질서의 열매가 바로 평화이다. 인류의 공동선은 그 근본 원리에서는 영원법의 지배를 받지만, 공동선이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평화는 결코 한 번에 영구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꾸준히 이룩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의지는 나약하고 죄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평화를 이룩하려면 각자의 야욕을 끊임없이 다스리며 정당한 권위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인의 행복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사람들이 신뢰로써 정신과 재능의 자산을 서로 나누지 않는다면, 지상에서 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과 민족들 그리고 그들의 존엄을 존중하려는 확고한 의지와 형제애의 성실한 실천이 평화 건설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평화는 정의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가는 사랑의 열매도 된다.
지상의 평화는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나며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모습이며 결실이다. 강생하신 성자께서는 평화의 임금님으로서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한 백성, 한 몸 안에서 모든 사람의 일치를 회복시키셨으며, 당신 육신 안에서 미움을 죽이시고,1) 부활하시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랑의 성령을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부어 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실천하며(에페 4,15 참조) 참으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평화를 간구하고 건설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똑같은 정신으로, 권리 주장에서 폭력 행위를 거부하고, 또한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권리와 의무를 침해하지 않는 가운데, 약자에게도 주어지는 방위 수단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전쟁의 위험이 인간을 위협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러하겠지만, 인간이 사랑으로 결합되어 죄를 극복하는 그만큼 폭력도 극복할 것이다. 그 때에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이사 2,4).
전쟁의 야만성 방지
79. 최근의 전쟁들이 우리 세계에 극심한 물질적 정신적 손실을 끼쳤음에도, 아직도 날마다 땅 한 구석에서는 전쟁의 참화가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각종 과학 무기가 전쟁에 사용되어, 전쟁의 잔혹성이 전투원들을 과거보다 훨씬 더한 야만 상태로 몰아넣을 우려가 있다. 복잡한 현대 상황과 혼란한 국제 관계가 새로운 전쟁 방법으로서 또 음모와 전복의 수단으로서 유격전의 장기화를 허용하고 있다. 여러 경우에 테러리즘 수단의 사용이 마치 새로운 전쟁 방법인 양 여겨지고 있다.
인류의 이 퇴보를 직시하는 공의회는 무엇보다 먼저 민족들의 타고난 권리와 그 보편적 원리가 지닌 불변의 가치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인류의 양심 자체가 이런 원리들을 더더욱 확고히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원리를 일부러 거스르는 행위뿐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시키는 명령도 죄악이며, 맹목적인 복종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들을 사면할 수 없다. 이러한 행위들 가운데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부족이나 종족이나 소수 민족을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저 행위들을 숙고하여야 하며, 이는 잔혹한 범죄로 강력히 규탄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범죄를 명령하는 자들에게 공공연히 저항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사람들의 정신은 최상의 찬사를 받아야 한다.
비인간적인 군사 행동과 그 후유증을 줄여 보려고 제법 많은 나라들이 체결한, 전쟁 문제에 관한 여러 국제 협약이 있다. 곧 부상병과 포로의 처우에 관한 국제 협약이나 이러한 종류의 다른 규약들이 있다. 그 조약들은 준수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모든 사람은 특히 공권력자들과 이 문제의 전문가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이 조약들을 개선하여, 더 잘 더 효과적으로 전쟁의 야만성을 방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뿐 아니라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떻든 전쟁이 인간사에서 뿌리뽑힌 것은 아니다. 전쟁의 위험이 있고 적절한 힘을 지닌 관할 국제 권위가 없는 동안에는, 참으로 평화 협상의 모든 방법을 다 써 본 정부들의 정당 방위권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국가 통치자들과 국정 책임을 맡은 사람들은 이토록 중대한 일을 신중히 처리하여 자기에게 맡겨진 국민들의 안녕을 보호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국민을 정당하게 보호하려는 군사 행동과 타국을 정복하고자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또한 전쟁 능력이 그 힘의 모든 군사적 정치적 사용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불행히도 전쟁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전쟁 그 자체로 적대 편의 모든 행동이 허용되는 것도 아니다.
조국 봉사에 몸바쳐 군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국민의 안전과 자유를 지키는 역군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이 임무를 올바로 수행할 때에 그들은 참으로 평화 정착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전면 전쟁
80. 과학 무기의 발달로 전쟁의 공포와 잔혹성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이런 무기를 사용하는 전투 행위는 정당 방위의 한계를 훨씬 벗어나는 막대한 무차별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 더구나 이미 강대국들의 무기고에 있는 이 무기들을 전부 사용하게 된다면, 이러한 무기 사용에서 오는 세계의 막대한 파괴와 그에 따르는 가공할 결과는 제쳐 두더라도 적대 진영 쌍방이 거의 완전히 몰살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정신으로 전쟁을 검토하도록 요구한다.2) 현대인들은 자신의 전쟁 행위에 대하여 무거운 셈을 치르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미래 시대의 흐름은 현대인들이 오늘 내리는 결정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이러한 관심에서 이 거룩한 공의회는 현대 교황들이 이미 공표한 전면 전쟁의 단죄를 자기 것으로 삼아3) 이렇게 선언한다. 도시 전체나 광범한 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무차별 파괴를 자행하는 모든 전쟁 행위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인간 자신을 거스르는 범죄이다. 이는 확고히 또 단호히 단죄받아야 한다.
현대 전쟁의 독특한 위험은, 현대식 과학 무기를 보유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범죄를 자행할 기회를 제공하고, 일종의 냉혹한 연쇄 반응으로 인간 의지가 극도의 참혹한 결정을 내리도록 충동을 받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앞으로 이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한 자리에 모인 전세계의 주교들이 모든 사람에게, 특히 국가 통치자들과 군사 지도자들에게 하느님 앞에서 또 온 인류 앞에서 그토록 막중한 책임을 심사 숙고하기를 간청한다.
군비 경쟁
81. 과학 무기는 오로지 전시에 사용할 목적으로만 비축하지 않는다. 각국의 방위력은 적에 대한 신속한 반격 능력에 달려 있다고 여기므로, 해마다 증대되는 이러한 무기 비축은, 비정상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적의 도발을 억제하는 데에 기여한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것이 어느 정도 국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수단 가운데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전쟁 억지책이 어떠하든, 상당히 많은 국가들이 보호책으로 삼는 군비 경쟁은 평화를 확고히 유지하는 안전한 길이 아니며 또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균형도 확실하고 진실한 평화가 아니라는 확신을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한다. 군비 경쟁으로 전쟁의 원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신무기의 군비에 엄청난 재화를 소모하고 있는 동안에는 오늘날 전세계의 수많은 불행에 대한 충분한 해결책이 마련될 수 없다. 국제 분쟁이 진정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번져 가고 있다. 이러한 걸림돌을 없애고 짓누르는 불안에서 세계를 해방시켜 참 평화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정신 개혁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길을 선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거듭 선언하여야 한다. 군비 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군비 경쟁이 계속된다면 그 수단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가공할 온갖 재앙을 언젠가는 일으키고 말리라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야 한다.
인류가 가능하게 만든 재앙들을 깨닫고, 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유예 기간을 기꺼이 활용하여, 우리 자신의 책임을 더 깊이 깨달아, 우리의 분쟁들을 더욱 인간다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내야 한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에게 오랜 전쟁의 질곡에서 바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도록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노력을 거부한다면, 스스로 들어선 이 악의 길에서 우리는 어디로 끌려갈지 모른다.
전쟁의 절대 금지와 전쟁 회피를 위한 국제 협력
82. 그러므로 여러 나라가 합의하여 어떠한 전쟁이든 완전히 금지할 수 있는 시대를 온 힘을 다해 준비하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물론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실질적인 권력으로 모든 사람의 안전과 정의 준수와 권리 존중을 보장하는 세계 공권력의 확립을 요구한다. 이 바람직한 권력이 확립될 수 있으려면, 현재의 국제적인 최고 중심 기구들이 공동 안전 보장에 더 적절한 수단을 강구하는 데에 더욱 치열하게 헌신하여야 한다. 평화는 무력의 위협으로 여러 국가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들의 상호 신뢰에서 태어나는 것이 분명하므로 모든 사람이 마침내 군비 경쟁을 종식시키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군비 축소가 실현되려면,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협정으로 공동 보조를 맞추어, 진실하고 효과적인 보장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4)
그 때까지는 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노력을 경시하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많은 지도자들의 선의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막대한 최고 임무를 수행하는 짐을 지고 막중한 직무에 따라 전쟁을 거부하고 전쟁을 없애려고 노력하면서도,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도자들에게 힘을 주시어, 그들이 평화를 힘차게 이룩하는 이 드높은 인간애 활동을 꾸준히 수행하고 용감히 성취하게 하여 주시도록 간청하여야 한다. 평화가 오늘날 명백히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마음과 정신을 자기 나라의 국경 밖으로 넓혀 국가 이기주의와 타국 지배 야욕을 포기하는 것이며, 이제 더 큰 일치를 향하여 이토록 힘써 나아가는 온 인류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기르는 일이다.
평화와 무장 해제 문제에 관하여 이미 줄기차게 끊임없이 확대되어 온 깊은 연구들과 이 문제를 다룬 국제 회의들은 이토록 중대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첫 걸음으로 여겨야 하며, 또 앞으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려면 이를 더욱 긴급히 촉진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기는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노력에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민족 지도자들은 자기 민족의 공동선을 보장하는 동시에 전세계의 복지를 증진하는 사람들로서 대중의 감정과 여론에 매우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적의와 경멸과 불신의 감정이나 인종적 증오와 완고한 이념들로 사람들이 분열되고 서로 대립하는 한, 지도자들이 평화 건설에 힘쓰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여기에서 새로운 정신 교육과 새로운 여론 형성이 시급히 요청된다. 교육 활동, 특히 청소년 교육에 헌신하거나 여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모든 ?泳汰? 마음 속에 평화의 새로운 감정을 길러 주는 배려를 가장 중대한 의무로 헤아려야 한다. 우리는 모두 참으로 우리 마음가짐을 고쳐, 온 누리와 저 평화의 임무를 바라보며, 인류의 더 나은 진보를 위하여 함께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릇된 희망에 속지 말아야 한다. 사실, 적의와 증오가 가셔지고 앞으로 세계 평화를 위한 확고하고 성실한 조약이 체결되지 않는다면, 이미 중대한 위기에 놓여 있는 인류는, 놀라운 과학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어쩌면 불행하게도 가공할 죽음의 정적 말고는 결코 다른 평화를 맛볼 수 없는 때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를 하면서도, 현대의 불안 한복판에 서 있는 그리스도 교회는 확고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교회는 현대를 향하여,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거듭거듭 사도의 메시지를 외치고자 한다. “지금이 바로” 마음을 고쳐야 할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5)
분쟁의 원인과 그 대책
83. 평화 건설을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을 키우는 분쟁의 원인, 특히 불의를 뿌리뽑아야 한다. 적지 않은 원인들이 과도한 경제적 불평등과 반드시 필요한 그 대책의 지연에서 일어난다. 또 다른 원인들은 지배욕과 인간 경시에서 생겨난다. 더 깊은 원인을 찾는다면, 인간의 시기, 불신, 교만, 기타 이기적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은 질서의 결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비록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그 무질서에서 세계는 끊임없이 인간들의 분쟁과 폭력으로 신음하게 된다. 더욱이 바로 국가 간의 관계에도 똑같은 결함들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 예방하려면 또 난무하는 폭력을 억제하려면 반드시 국제 기구들이 더 잘 더욱 확고히 협력하고 협동하여야 하며 끊임없이 평화 증진을 위한 조직의 결성을 추진하여야 한다.
민족들의 공동체와 국제 기구
84. 세계의 모든 국민과 모든 민족 사이의 상호 의존 관계가 더욱 긴밀해져 가는 이 시대에, 세계의 공동선을 적절히 추구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실현하려면, 민족들의 공동체는 이제 현대의 임무에 부합하는 질서를 스스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직도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는 여러 지역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국제 공동체 기구들은 식량, 건강, 교육, 노동과 관련된 사회 생활 분야는 물론, 어떤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특수 상황 속에서 그 나름대로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곧, 일반적으로 개발 도상국들의 발전을 위한 원조,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난민들의 구호, 또는 이민과 그 가족들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기존의 세계적 지역적 국제 기구들은 분명히 인류를 위하여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 기구들은 세계 도처에서 발전을 증진하고 온갖 형태의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현대의 중대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전 인류 공동체의 국제적 기초를 놓으려는 최초의 시도로 보인다. 이 모든 분야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형제애 정신을 기뻐한다. 그 정신은 막대한 불행을 덜어 주고자 언제나 더욱 강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 분야의 국제 협력
85. 현대 인류의 유대 관계는 국제 분야에서도 더욱 광범한 국제 협력의 확립을 요구한다. 거의 모든 민족이 독립은 하였지만, 극심한 불평등과 온갖 형태의 부당한 종속에서 해방되고 심각한 내부 곤경의 온갖 위험에서 벗어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발전은 인적 재정적 원조에 달려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든 교육과 직업 훈련을 통하여 경제 사회 생활의 여러 임무를 수행하도록 양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외국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원조 활동을 하면서 지배자가 아니라 오로지 협조자와 협력자로서 행동하여야 한다. 현대 세계의 교역 관습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물질적 원조도 개발 도상 국가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선진국들은 증여, 차관, 투자 형태의 다른 원조들도 제공하여야 한다. 그러한 원조는 한편에서 야욕 없이 관대하게 제공되어야 하고, 다른 편에서는 반드시 성실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세계의 올바른 경제 질서를 확립하려면, 과도한 이윤 추구, 국가적 야심, 정치적 지배욕, 군사적 계산, 이념의 선전과 강요 등을 배제하여야 한다. 여러 가지 경제 사회 체제가 제시되고 있으나, 그 가운데에서 전문가들이 건실한 세계 교역의 공통 기반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각자가 자기 편견을 버리고 성실한 대화에 나선다면 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몇 가지 적절한 규범
86. 이러한 협력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규범들이 적절하게 보인다.
가) 개발 도상의 민족들은 발전의 목표로서 명백히 또 확고히 자기 국민들의 충만한 인간 완성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슴 깊이 간직하여야 한다. 발전이란 모든 것에 앞서 바로 그 민족의 노력과 재능에서 시작되고 진보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발전은 외국 원조뿐 아니라 먼저 자기 것을 충분히 개발하고 이를 자기 역량과 전통으로 육성하는 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솔선 수범하여야 한다.
나) 개발 도상 국민들이 위에서 말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원조하여야 할 선진 민족들의 의무는 막중하다. 그러므로 선진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러한 세계적 협력 정착에 요구되는 정신적 물질적 내부 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더 힘없고 더 가난한 나라들과 하는 교역에서는 그들의 선익을 최대한 존중하여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만든 생산품의 판매에서 얻는 수익은 바로 그들의 생존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 성장의 통합과 촉진은 국제 공동체의 소임이다. 따라서 이를 위하여 마련된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충분히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하여야 한다. 또한 보조성의 원리를 반드시 지키며 전세계의 경제 관계가 정의의 규범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이를 다스리는 것도 이 국제 공동체에 딸린 일이다. 국제 교역, 특히 저개발 국가들과 교역을 관리하고 증진하며 국가 간 힘의 과도한 불균형에서 오는 결함을 보완하도록 적절한 기구를 설립하여야 한다. 기술적, 문화적, 재정적 원조와 결부된 이러한 조정으로 발전 지향 국가들이 적절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여야 한다.
라) 많은 경우에 경제 사회 구조의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미숙한 기술적 해결책의 제시는 삼가야 한다. 특히 인간에게 물질적 편익을 제공하지만 인간의 정신적 품성과 그 진보를 가로막는 일은 삼가야 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마태 4,4) 때문이다. 인류 가족의 어느 부분이든 바로 그 안에, 그 훌륭한 전통 안에,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 기원을 모르기는 하지만,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정신적 보화의 어떤 부분을 지니고 있다.
인구 증가에 관한 국제 협력
87. 오늘날 다른 수많은 어려움에 더하여 특히 급격한 인구 증가에서 생기는 어려움에 짓눌려 있는 저 민족들과 관련하여 국제 협력이 매우 절실해지고 있다. 모든 국가, 특히 부유한 국가들의 전폭적이고도 적극적인 협력을 통하여, 사람들의 생활과 적절한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여 온 인류 공동체와 더불어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긴급히 모색하여야 한다. 어떤 민족들은 만일 적절한 교육을 받아 재래의 농작물 생산 방법 대신에 새로운 기술을 채택하고 이를 지혜롭게 그 환경에 적용하며, 더 나아가서 토지 소유의 공정한 분배를 이루고 더 나은 사회 질서를 세운다면, 그들의 생활 조건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정부는 그 권한의 범위 안에서 자기 나라의 인구 문제에 관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예컨대 사회 법제와 가정 관련 입법, 농촌 인구의 도시 이동, 국가의 형편과 위급 상황에 관한 정보 등의 문제에서 그러하다. 오늘날 이 문제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이 몹시 흔들리고 있으므로, 이 모든 문제에 대하여 특히 대학교에 있는 가톨릭 전문가들이 연구 활동을 치밀하게 추진하여 더욱 폭넓게 발전시켜 주기를 바란다.
세계의 인구 증가, 또는 적어도 일부 국가의 인구 증가를 모든 방법으로 또 공권력의 온갖 개입으로써 더 근본적으로 확실히 감소시켜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공의회는 모든 사람에게 권고한다. 비록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권장되고 때로는 강요된다 하더라도, 도덕률에 배치되는 해결책은 회피하여야 한다. 혼인과 자녀 출산에 관한 인간의 양보할 수 없는 권리에 따라, 출산 자녀 수의 결정은 부모의 바른 판단에 달린 것이므로 절대로 공권력의 판단에 맡겨질 수 없다. 부모의 판단은 올바로 형성된 양심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시대와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하느님 법을 존중하는, 올바르고 참으로 인간다운 책임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어디에서나 교육 환경과 사회 조건을 개선하고 특히 종교 교육이나 적어도 건실한 도덕 교육을 실천하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자녀 수의 조절에서 부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과학의 진보에 관해서는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알려야 한다. 그 방법은 확실성이 제대로 입증되고 도덕 질서와 명백히 부합되어야 한다.
원조 제공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임무
88. 정당한 자유의 진정한 존중과 모든 사람의 형제애와 더불어 국제 질서를 확립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온 마음으로 협력하여야 한다. 더구나 세계의 많은 지역이 아직도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큰 소리로 당신 제자들의 사랑을 촉구하시는 것 같아 더욱 그러하다. 흔히 국민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닌 일부 국가들이 풍부한 재화를 누리는 반면에, 다른 나라들은 생활 필수품도 없이 기아와 질병과 온갖 불행으로 고통을 받는 걸림돌은 없어야 한다. 가난과 사랑의 정신은 그리스도 교회의 영광이며 증거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 특히 젊은이들을 칭찬하고 도와 주어야 한다. 더욱이, 교회의 오랜 관습대로, 쓰고 남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가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 현대의 불행을 힘껏 덜어 주는 일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의무이며, 주교들이 말과 모범으로 이 일에 앞장 서야 한다. 원조금품의 모?珝? 분배는, 일률적이고 경직된 방법은 아니더라도, 교구와 국가, 전세계에서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또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곳은 어디에서나 가톨릭 신자들과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공동으로 활동하여야 한다. 사랑의 정신은 현명하고 질서 정연한 사회 활동과 자선의 실천을 결코 금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발 도상국들에 봉사하고자 헌신하려는 사람들은 또한 적절한 교육을 알맞게 받을 필요가 있다.
국제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교회의 효과적 현존
89. 교회는 하느님에게서 받은 자기 사명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은총의 보화를 나누어 줄 때에, 하느님의 법인 자연법을 인식시켜 세계 어디에서나 평화를 확립하고 사람들과 민족들 사이에 형제 공동체의 확고한 토대를 놓는 데에 공헌한다. 따라서 사람들의 협력을 장려하고 증진할 수 있도록 교회는 바로 민족들의 공동체 안에 반드시 현존하여야 한다. 이러한 현존은 참으로 교회의 공적 기관을 통하여, 또 오로지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겠다는 열망을 지닌 모든 그리스도인의 충만하고 성실한 공동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달성하려면, 바로 신자들이 인간으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깨달아 자기 생활 영역에서 국제 공동체와 즉각 협력하려는 의지를 일깨우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종교 교육과 시민 교육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젊은이들의 양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국제 기관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역할
90. 그리스도인들의 훌륭한 국제 활동은 분명히, 개인이든 단체이든, 국가 간의 협력을 증진하고자 설립되었거나 설립될 국제 기구에서 일하는 공동 활동이다. 또한 가톨릭의 여러 국제 단체들도 평화와 형제애 안에서 민족들의 공동체 건설에 여러 가지로 이바지할 수 있다. 따라서 제대로 양성된 협력자들의 수를 증가시키고 필요한 자원을 확대하고 그 역량을 적절히 조정하여 그러한 단체들을 강화하여야 한다. 우리 시대에서는 활동의 효율성과 대화의 필요성이 공동 계획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단체들은 분명히 가톨릭 신자들에게 부합하는 보편 감각을 일깨워 참으로 세계적인 연대 의식과 책임감을 형성하는 데에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
끝으로, 국제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임무를 올바로 완수하기 위하여 가톨릭 신자들은 복음의 사랑을 함께 고백하는 갈라진 형제들이나 진정한 평화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과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협력하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공의회는 아직도 인류의 대부분을 괴롭히고 있는 극심한 빈곤을 고려하여,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어디에서나 증진하도록 보편 교회의 한 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여긴다. 이 기관의 임무는 빈곤한 지역들의 발전과 국가 간의 사회 정의를 증진하도록 가톨릭 신자들의 공동체를 일깨우는 것이다.
신자 개인과 지역 교회의 임무
91. 이 거룩한 공의회는 교회의 가르침의 보고에서 몇 가지를 꺼내어, 하느님을 믿든 하느님을 명백히 인정하지 않든 현대의 모든 사람을 도와 주고자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온전한 사명을 더 분명히 깨달아, 세계를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에 더욱 부합시키고, 보편적이고 더 근본적인 형제애를 추구하며, 사랑의 충동을 받아 아낌없는 공동 노력으로 현대의 긴급한 요청에 부응할 수 있도록 도와 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환경과 인간 문화 형태가 크게 달라, 여러 부분에서 일부러 일반적인 특성만을 고려하여 이 문서를 내어 놓는다. 더구나 교회 안에서 이미 공인된 교리를 밝히더라도,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문제들을 다룬 경우가 드물지 않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과 복음 정신에 의지하여 우리가 제시한 많은 것들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목자들의 지도를 받아 각각의 민족과 그 사고 방식에 적응시켜 행동으로 옮긴다면, 모든 사람에게 확실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의 대화
92. 복음의 메시지로 전세계를 비추고 온갖 민족과 인종과 문화의 모든 사람을 한 분이신 성령 안으로 모아들여야 할 자기 사명의 힘으로, 교회는 성실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고 촉진하는 저 형제애의 상징이 된다. 그것은 먼저 바로 교회 안에서 사목자들이든 그 밖의 그리스도인들이든 하나인 하느님 백성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람 사이에서 언제나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정당한 모든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호 존중과 존경과 화합을 증진하도록 요구한다. 신자들을 갈라놓는 것들보다 일치시키는 것들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일에는 일치가, 불확실한 일에는 자유가, 모든 일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1)
우리의 마음은 또 아직 우리와 함께 완전한 친교 안에서 살지 못하는 형제들과 그 공동체들을 끌어안는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께 대한 신앙 고백과 사랑의 유대로 그들과 결합되어 있으며,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기대하고 바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이 일치가 성령의 강력한 힘으로 진리와 사랑 안에서 진전될수록 그만큼 전세계의 일치와 평화의 전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합쳐 이 드높은 목적을 오늘날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더욱더 적합한 방법을 찾아, 복음에 날로 더욱 동화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자녀들의 가족으로 부름 받은 인류 가족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형제로서 협력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제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 전통 안에 고귀한 종교적 인간적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마음을 돌려, 우리가 모두 진솔한 대화를 통하여 성령의 권유를 충실히 받아들이고 기꺼이 실천하게 되기를 바란다. 오로지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적절하고 지혜롭게 이루어지는 이러한 대화를 간절히 바라므로, 우리 편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 인간 정신의 드높은 가치를 고양하지만 그 원천인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또는 교회를 반대하고 여러 모로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까지도 배제하지 않는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만물의 시작이시며 마침이시므로 우리는 모두 형제가 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이 동일한 인간적 신적 소명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어떠한 폭력이나 기만도 없이 진정한 평화 속에서 세계 건설에 협력할 수 있고 또 협력하여야 한다.
세계 건설과 그 목표의 성취
93.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세계의 사람들에게 언제나 더 관대하게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하는 일보다 더 열렬히 바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복음을 충실히 따르며 복음의 힘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이 지상에서 완수하여야 할 위대한 과업을 받아들였으며,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분께 이 과업에 대한 셈을 바쳐야 한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실하게 손수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2)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모든 사람 안에서 형제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리스도를 실제로 사랑하며 그렇게 하여 진리를 증언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의 신비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를 바라신다. 이 길을 걸으며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살아 있는 희망, 마침내 언젠가는 주님의 영광이 빛나는 고향에서 지고의 평화와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에페 3,20-21). 거룩한 공의회의 교부들은 이 헌장의 모든 것에 낱낱이 찬성하였다. 본인은 그리스도께서 본인에게 부여하신 사도 권한으로 존경하는 교부들과 더불어 이를 성령 안에서 승인하고 결정하고 제정하며, 공의회에서 제정한 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포하기를 명 령한다.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1965년 12월 7일
가톨릭 교회 주교 바오로 자서
(교부들의 서명이 따른다)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
머리말 / 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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