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거지 소년 (1645)
작가 : 뮤릴로 (Bartolome Esteban MurillO: 1617- 1682)
크기 : 켄버스 유채 134 X 100cm
소재지 : 프랑스 파리 루부르 미술관
세빌리아에서 이발사를 아버지로 둔 가정의 14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28세에 결혼과 아기를 낳으면서 그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을 모델로 해서 “성모님과 아기 예수” “로사리오의 성모”와 같은 걸작을 남겼는데, 그가 그린 성모상은 너무도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일방 그의 작품이 너무 단조롭다는 인상도 주기도 했다. 그는 결혼과 자녀출산이라는 너무도 펑범한 인생 여정을 통해 걸작을 창출할 줄 아는 작가였다.
그가 작가로서의 삶의 경험을 더 심화시키기 위해 마드리드로 이주하면서 그의 작품 경향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귀부인과 여성 취향에서 벗어나 당시 사회 여건에 필요한 복음적인 가치에 눈뜨게 만들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가 이 작품을 제작할, 1645-1650년 전후 스페인은 식민지로부터 황금을 긁어 날라 부유했던 경제가 끝나고 어려운 시기가 되면서 거지가 많았다.
부유하던 처지에서 가난해 졌을 때 사람들은 가난을 부끄러움으로 생각해서 감추고픈 유혹을 받게 된다. 또한 그 반작용으로 몇몇 귀족들이나 부유층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화려한 그림에 대한 기호가 커지는 처지에 작가는 복음적 시각에서 작품을 제작하고픈 열정을 느끼면서 사회의 비참한 모습에 눈길을 돌렸다.
그는 결코 사회의 비참함을 고발하거나 폭로하고자 하는 동기가 아니라 크리스챤의 시각에서 비참한 사회 현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초대하는 마음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예술가의 강론이라 볼 수 있다.
- 소년의 매무새로 보아 영락없는 거지이다 부모가 없는 고아인지, 가난한 부모로 부터 버림을 받았는지 알수 없는 이 소년은 비참한 거지의 몰골을 하고 있다.
앉아 있는 곳은 남의 집 헛간처럼 보이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소년은 지금 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벼룩을 잡기에 여념이 없다. 소년의 비참한 처지에서 벼룩이라는 것은 대수롭지만 않은 것이다.
허기를 이기기 위해 구걸 해 온 썩은 과일 몇 개와 말라 붙은 생선이 나뒹굴고 있는 소년의 주변이나 그의 옷차림은 소년의 외적 환경의 열악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벼룩은 이렇게 어려운 소년의 처지를 내적까지 괴롭히는 악마 수준의 고통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작가의 스페인의 혼(魂)이 드러난다. 스페인 혼에는 아무리 기쁜 순간에도 아픔과 슬픔의 고뇌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스페인의 상징인 투우와 풀라멩고 춤은 스페인을 읽을 수 있는 아품과 고뇌의 상징이다
요즘 스포츠 영웅 이상의 대우와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투우사는 자기에게 열광하는 펜들 앞에서 언젠가 황소의 뿔에 찔려 피를 흘리며 쓸어져야 할 위험과 공포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처지이다.
그러기에 그가 투우에 몰두할수록 승리의 함성과 함께 투우장에서 피로 범벅이된 채 비참한 모습으로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 아픔과 슬픔의 그림자가 그에게 드리우고 있다.
집시들의 춤에서 연유된 플라멩고 역시 집시라는 처지, 자 신의 모든 것을 한껏 표현할 수 있는 여건에서 추는 춤이 춤이지만 집시라는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존재로서의 고뇌를 그 춤을 통해 표현하게 되며 그러기에 플라멩고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살아가는 스페인 사람들의 영혼에 숨어 있는 깊은 고뇌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괴롭히는 벼룩잡기에 몰두하고 있는 이 소년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비참함과 또 다른 이 고뇌를 수용하고 이탈하기 위해 노력하는 스페인의 혼을 표현했다.
소년의 더러운 발바닥은 소년의 열악한 처지를 반영하고 있다. 한마디로 밑바닥까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철저한 절망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 이렇게 더 없이 비참한 환경에 있는 소년의 처지에 걸맞지 않게 밝은 빛이 들어오고 있다. 이 빛은 불행의 상징과 같은 소년의 얼굴과 가난의 상처로만신창이가 된 발을 비추고 있다.
빛이 비치는 소년의 실재적 처지는 벽면의 주색갈인 어둠과 같은 암담한 처지인데 이 암담한 인간을 빛이 비춤으로서 그 비참함이 드러나는게 아니라 그 비참함을 저편에 있는 생기가 드러나고 있다.
주변의 열악한 환경이 그의 비참한 처지라면 이 빛은 하느님의 따스한 사랑의 손길이다. 이 소년은 세상으로 부터 버림 받은 처지이지만 자비하신 하느님의 품안에 있다는 상징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는 스페인 화풍의 특성적인 면을 사용했다. 이것은 극적인 자연주의적 효과를 내기 위해 명암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몸의 가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벼룩을 잡고 있는 소년의 애처러운 모습에 빛이 닥아오면서 소년의 얼굴은 더 이상 슬퍼거나 비참한 모습이 아니다.
작가의 다른 그림에서도 가난한 서민들의 삶은 가난하기에 슬프고 비참한 그런 모습이 아니고 담담한 표정의 모습들이 많은데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빛을 받고 있는 소년의 표정은 안팎의 고통에 짖눌려 체념 상태에 있거나,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어떤 달관(達觀)의 상태에 이른 동자 스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소년의 이런 표정은 어린 나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성서가 말하는 가난의 지혜를 체득한 수도자의 모습이다. 성서의 가난은 두 가지 상반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극복해야 할 비참한 상태로서의 가난과 그다음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할 수 있는 수행의 길로서의 가난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가난을 찬미도 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도우는 것을 큰 선업으로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 첫 설교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마태오 5:2)이란 말씀으로 시작하심으로 가난은 더 이상 비참한 상태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상태임을 알리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야고보 : 2: 5)
가난한 자가 하느님 나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정신적 귀족임이 마리아의 찬가에서 구구절절 나타나고 있다.(루카 1: 44- 55) 예수님은 가난을 예찬하신 분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가난을 선택하심으로서 가난한 사람들과 특별한 연대를 유지하셨다.
베틀레헴에서의 탄생 (루카 2: 7), 나자렡에서의 삶( 마태 13: 55) 십자가에서 죽음에 이르기 까지 그분은 가난하셨다. 그분은 가난하게 살라고 가르치신 스승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가난한 사람의 처지에서 생활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반 사람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그런 가난의 고통과 비참함을 영웅다운 인내로 받아 들여 초연해지라고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가난의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 즉 성서가 가르치신 “아나윔 Anawim “가난한 사람” 으로서 , 하느님 나라에서 그들은 라자로처럼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위로를 받게 될 복된 존재임을 알리셨다. (루카 16: 19- 25)
루카 복음사가는 미래에 이들에게 베풀어질 상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약속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루카 6: 20)
그러나 아무리 가난을 미화하고 영성화시켜도 실재적으로 가난은 비참한 것임이 성서에 나타나고 있으며 이 소년은 바로 가난의 비참함을 제시한 성서의 내용을 그 시대 스페인 정황에 맞게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보시(補施)의 차원을 강조하는 어떤 다른 종교 보다 더 탁월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를 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가난한 사람의 모습을 예수님과 동일 선상에서 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돕는 것이란 탁월한 가르침이 성서에 드러나고 있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 마태오 25: 40) 예수의 가르침은 이런 관점에서 충격적이며 혁명적이다. 세상의 모든 비참한 가난이라는 쓰레기를 다 태울 수 있는 불씨와 같은 가르침이다.
소년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 빛처럼, 열악한 가난의 처지에서도 평온한 표정의 소년의 얼굴처럼, 가난은 크리스챤 영성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특별한 수행의 밝은 길임을 제시하면서도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동양적 체념이나 방관이 아닌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돕는 것이고 , 가난한 사람의 가난을 외면한다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배신이라는 준엄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의 이 작품은 당시 스페인 사회에 꼭 필요한 가난의 신학을 너무도 명쾌하고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예술가는 신학자와 달리 탁월한 감성으로 진리를 표현하기에 이성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신학자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더 심원한 부분을 표현하는데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대단히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한편의 신학 논문이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의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 자녀 여러분 , 말고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안에서 사랑합시다.” ( 1 요한 3: 18)
작가의 시대와 문화와 전혀 거리가 먼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성서의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 15)
- 이종한(요한) 신부님의 성화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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